(10)전중환 교수의 ‘사랑은 왜 진화했는가’

2015.10.23 20:49 입력 2015.10.29 10:45 수정

“나를 떠나지 않고 헌신할 사람을 고르는 장치가 사랑”

“세상에는 결코 숨길 수 없는 것이 세 가지 있다. 재채기, 가난, 그리고 사랑이다”라는 유대 속담이 있다. 그만큼 사랑은 우리가 의식적으로 통제할 수 없는 비합리적 감정이다. 인간은 진화 과정에서 왜 이 같은 감정적 특질을 얻게 됐을까. 경향신문 연중기획 ‘심리톡톡-사랑에 관하여’ 10월 강연자인 전중환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가 지난 20일 서울 정동 경향신문사 여적향에서 ‘사랑은 왜 진화했는가’를 주제로 독자들을 만났다. 강연 내용을 요약해 소개한다.

전중환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가 지난 20일 서울 정동 경향신문사에서 ‘사랑은 왜 진화했는가’에 대해 강연하고 있다. 전 교수는 “사랑이 합리적 감정이라면 되레 말이 안 된다”면서 “어떤 경우에도 나를 떠나지 않고 헌신할 사람을 고르기 위해 진화적으로 발달한 장치가 바로 사랑”이라고 말했다.  이준헌 기자 ifwedont@kyunghyang.com

전중환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가 지난 20일 서울 정동 경향신문사에서 ‘사랑은 왜 진화했는가’에 대해 강연하고 있다. 전 교수는 “사랑이 합리적 감정이라면 되레 말이 안 된다”면서 “어떤 경우에도 나를 떠나지 않고 헌신할 사람을 고르기 위해 진화적으로 발달한 장치가 바로 사랑”이라고 말했다. 이준헌 기자 ifwedont@kyunghyang.com

“사랑에 빠진 사람의 뇌는 복권에 당첨됐을 때처럼 쾌감을 느끼는 부위가 활성화돼요 얼굴이 붉어지고 목소리가 떨리죠 이런 신호들은 꾸며내기가 쉽지 않아요‘그냥 당신이라서 좋아한다’는 사람이 어떤 어려움, 어떤 매력적 이성이 나타나도 나를 떠나지 않을 사람이죠 사랑은 비합리적 상태예요”

■낭만적 사랑은 인간의 본성

인간의 몸과 마음은 굉장히 복잡합니다. 500만년 전에 침팬지의 공통 조상과 갈라진 뒤 땅에서 생활하기 시작하면서 고유한 마음이 형성되기 시작했지요. 생존과 번식에 영향을 끼치는 여러 문제들을 잘 해결하게끔 우리의 심리적 메커니즘이 발달했습니다. 예를 들면 상한 음식을 피하고, 남편의 바람기를 다스리고, 자녀의 나이터울을 조절하는 등 생존과 번식에 필요한 현실적인 문제들을 해결하는 것이지요. 진화심리학은 이처럼 먼 과거의 수렵채집 생활에서 발달한 이 같은 유전과 현재 환경의 상호작용에 대해 탐구하는 학문입니다.

적응은 과거에 맞춰 형성됐기 때문에 오늘날 생존과 번식에 꼭 유리하진 않습니다. 달콤한 음식이라고는 과일과 꿀밖에 없던 시절에 단 음식에 탐닉하는 성향을 가지도록 적응됐지만, 오늘날처럼 마트에 단 음식이 넘쳐나는 시대에 이는 성인병의 원인이 됩니다. 게으름 피우는 성향도 마찬가지입니다. 과거에는 쓸데없이 에너지를 소모하지 않기 위한 방법이었으나 현대인에게 꼭 도움 되는 건 아니지요.

통계적으로 인간 사회에서 가족을 주로 돌보는 것은 남성보다는 여성입니다. 다른 동물들에게는 이 같은 성차가 더 뚜렷하게 나타나는데요. 예외가 적지 않지만 암컷들은 홀로 자식을 키우기 때문에 누구와 성관계를 할지 신중하게 저울질합니다. 반면 수컷들은 양육에 전혀 참여하지 않고 되도록 많은 상대와 성관계 횟수를 늘리려 애쓰지요. 진화생물학자 로버트 트리버스는 ‘부모투자 이론’으로 이를 설명했습니다. 크고 값비싼 난자를 만드는 것은 암컷, 작고 값싼 정자를 만드는 것은 수컷이라고 정의되는데, 후손을 낳고 기르는 데 더 많이 투자하는 쪽이 상대를 고를 때 더 신중하다는 겁니다. 코끼리물범은 평생 낳을 수 있는 자식 수의 최댓값이 수컷은 100마리, 암컷은 8마리입니다. 기네스 기록에 따르면 사람은 남성이 888명, 여성은 69명이에요.

특히 인간의 경우 다른 종보다 아이 키우는 데 더 많은 비용이 듭니다. 신체에서 에너지를 가장 많이 소비하는 뇌가 몸무게 대비 가장 크게 진화한 종이거든요. 태아의 머리가 커서 출산 때 엄마들이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낳은 이후에도 엄마 혼자서는 도저히 기를 수가 없어요. 그래서 인간 남녀는 장기적 짝짓기 전략과 단기적 짝짓기 전략을 모두 구사합니다.

진화심리학자들은 낭만적 사랑을 보편적 인간 본성이라고 말합니다. 역사와 문화를 막론하고 모든 시대에 걸쳐서 낭만적인 사랑이 지속적으로 존재했다는 증거가 많습니다. 전 세계 166개 문화의 민간 설화를 조사했더니 147개에서 낭만적 사랑을 이야기했다는 연구도 있어요. “나의 연인이여. 그대를 보는 것만도 큰 기쁨이오.” 4000년 전 수메르 여왕의 말입니다. 1980년대 후반 한 진화심리학자가 37개국 1만여명을 조사했더니 낭만적 사랑을 장기적 배우자의 가장 중요한 특성 중 하나로 꼽았습니다. 행동생태학적 증거도 있어요. 동물들도 인간처럼 짝짓기 시기에 접어들면 잠도 못 자고 잘 먹지도 못하면서 식음을 전폐하고 한 암컷만 따라다니는 등 사랑에 빠진 사람과 유사한 행동을 합니다.

신경과학에서도 사랑에 빠진 사람들의 뇌는 마약을 복용하거나 거액의 복권에 당첨됐을 때 쾌감을 느끼는 부위가 활성화됩니다. 기껏해야 250년쯤 된 서구의 발명품이고 후기 자본주의의 산물이라고 보는 사회과학과는 다른 관점이지요.

사랑은 그렇다면 어떤 목적을 수행하기 위해 설계된 적응일까요.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인간은 아기를 키우는 데 드는 시간이 20년 가까이 되므로 엄마와 아빠가 협력해야 합니다. 따라서 이러한 장기적 배우자 관계에서 서로 간 헌신을 위한 장치인 것이지요. 어떤 어려움, 어떤 매력적 이성이 나타나더라도 나를 떠나지 않을 사람을 고르기 위한 장치가 사랑이라는 겁니다.

■한 사람에게 헌신하는 마음

사랑이란 감정은 자신의 장기적 상대에게만 헌신하게 만드는 동시에 이런 헌신을 상대방에게 ‘들키도록’ 만듭니다. 심리학자 토머스 셸링은 선택의 자유를 자발적으로, 돌이킬 수 없이 포기하면 전략 싸움에서 승리한다는 이론을 폈어요. 예로 친구와 만나기로 하고 약속장소를 놓고 티격태격할 때 이기려면 ‘종로에서 기다릴게’ 하고 전화를 끊은 뒤 휴대전화 배터리를 빼버리면 됩니다. 상대방은 거기로 올 수밖에 없지요. 사랑에 있어서도 내가 상대방에게 깊이 빠진 나머지 스스로를 통제할 수 없음을 보여주는 생리적 신호들이 있어요. 얼굴이 붉어지고 목소리는 떨리고 눈물이 나고 목소리도 쉬어집니다. 이런 신호들은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에 꾸며내기가 쉽지 않아요. 상대방에게 진심으로 빠진 비합리적 상태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실 장기적 관계를 꾀한다면 미모·재력·성격·학력처럼 애초부터 합리적 이유로 나를 택한 사람은 피해야 합니다. 조건이 사라지면 관계도 깨지지요. 그냥 ‘당신이라서 좋아한다’는 사람은 나를 떠날 합리적 이유가 생겨도 떠나지 않습니다. 사랑은 기본적으로 이런 헌신을 필요로 합니다.

대중문화 속 ‘로맨스’에 대해 이야기해볼까요. <별에서 온 그대> <상속자들> 같은 드라마와 소설, 영화 등이 많은 인기를 얻고 있습니다. 왜 사람들은 가상의 이야기인 것을 알면서도 기꺼이 이런 콘텐츠를 즐기고 지갑을 열까요. 진화심리학자 도널드 시몬스는 이런 ‘백일몽’들이 실제로 현실이 될 가능성은 극히 낮지만 일단 일어나면 번식 성공률을 크게 높이는 중요한 사건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예를 들어 30억원짜리 복권에 당첨되면 무엇을 할 것인지 리허설하고 시뮬레이션을 해보는 것과 같아요.

아침 출근길에서 언쟁한 여성이 알고 보니 대기업 회장의 외동딸인데, 사랑에 빠져 결혼하면 어떻게 될까, 이런 얘기들이지요. 실제로 일어난다면 인생을 바꿀 큰 사건이기 때문에 상상만으로 쾌감을 느끼도록 진화한 겁니다.

이런 짝짓기 관점에서 남성과 여성이 번식 성공률을 극대화하는 방법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여성은 안정적으로 양육을 지원할 ‘좋은 아빠’가 될 남자이면서 동시에 사회적 성공을 할 ‘터프가이’ 유전자의 특성을 모두 갖춘 남자를 좋은 남편감으로 꼽지요. 문제는 둘 다 갖춘 남자가 거의 없다는 겁니다. 그야말로 둘 중의 하나예요. 이런 점을 감안하면 로맨스가 인기 끄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어요. 터프가이가 사랑에 빠져서 좋은 아빠 자질을 얻는 기적적인 변모를 하는 겁니다. 강하고 지배적이고 공격적인 남성이 여성에게 복종하는 순간이 로맨스의 절정입니다. 여성의 입장에서는 매우 훌륭한 남편을 얻으면서 번식 성공도가 높아진다는 뜻이고요. 가끔 영화 <타이타닉>에서처럼 돈 없고 사회적 지위가 낮은 남자 주인공도 있지만, 지고지순한 헌신이라는 특징만큼은 빼놓을 수가 없어요.

반면 남성의 판타지는 ‘포르노’입니다. 남성들은 카메라의 시선과 자신을 동일시하고, 헌신 없는 성교를 추구합니다. 남성호르몬인 테스토스테론이 넘치는 현실 세계의 터프가이들은 사실 성적으로 문란한 사례가 많습니다. 미국의 농구선수 데니스 로드먼은 2000명과 잠자리를 같이 했다고 과시했지요. 물론 남성들도 장기적 배우자와의 사랑을 중요시합니다만, 이성과의 완벽한 일대일 결합보다 더 극단적으로 좋은 것이 포르노그래피인 겁니다.

매스미디어가 발달한 현대사회에서 우리는 파트너 선택에 있어서도 부정적 영향에 노출돼 있습니다. 진화심리학 연구 중에 슈퍼모델 사진을 본 남성그룹이 평범한 여성 사진을 본 남성그룹에 비해 ‘아내를 사랑하는가’라는 질문에 응답 비율이 낮았다는 결과도 있어요. 반대로 여성은 재벌 남성의 사진을 본 이후 남편에 대한 사랑이 떨어지는 반응을 보인다고 합니다. 진짜 관심을 기울여야 할 배우자나 애인에 대한 사랑이 매스미디어 때문에 약화될 수 있는 겁니다.

<황경상·최민영 기자 min@kyunhyang.com>

[‘심리톡톡’ 시즌2 - 사랑에 관하여](10)전중환 교수의 ‘사랑은 왜 진화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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