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먹고 밟고 뒹굴고…눈은 ‘축제’ 사육사에겐 치워야 할 ‘숙제’

2017.12.01 17:31 입력 2017.12.01 17:43 수정
최종욱 수의사

눈 오는 날의 동물원

하얀 함박눈이 수북이 내린 겨울 아침엔 누구나 조금씩은 낭만적이 된다. 온통 하얗게 착색된 세상은 일상사에 찌들려 무거웠던 감정들까지 모두 날려 버릴 것 같은 시원한 청량감을 던져준다.

그래서 이런 아침엔 자동차나 나무 위의 눈을 한 움큼 집어서 누군가에게 마냥 던지고픈 어린아이 같은 장난기마저 슬슬 발동한다.

그런 감정은 비단 인간들만 느끼는 감정이 아닌 것 같다. 두툼한 털이 코만 빼놓고 얼굴 전체를 덮고 있는 사슴이나 들소 같은 녀석들은 이 새하얀 설국이 마치 제 세상이라도 된 것처럼 마냥 즐겁고 신나기만 한 모양이다.

아침에 들러보면 다른 동물사는 깨끗한데 유독 이들이 있는 곳의 운동장은 밤새 자기들끼리 무슨 축제라도 벌인 듯 발자국이 어지러이 널려 있다.

[이거슨 동물의 세계] (18) 먹고 밟고 뒹굴고…눈은 ‘축제’ 사육사에겐 치워야 할 ‘숙제’

그런데 눈이 오면 가장 좋아할 것이라 예상했던 북극곰 ‘화이트’나 알래스카 코디악 불곰 ‘코디’는 생각보다 눈 맞는 것을 싫어하는 것 같다. 어쩌면 둘 다 나이를 먹어서 그런 건지도 모르겠다. 눈 오는 날 아침 호기심에 한 번씩 가보면 의외로 운동장이 깨끗하다. 눈밭 위에 남은 흔적이라곤 전날 곰이 먹다 흘린 음식 부스러기를 주으러 온 까치와 직박구리 몇 마리의 작은 발자국이 전부. 하지만 이 게으름뱅이들도 아침 추위가 가시고 조금이라도 햇볕이 난다 싶으면 성큼성큼 헤집고 다니기 시작해 좁은 운동장 바닥이 금세 커다란 곰 발자국으로 어지럽게 도배되어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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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차 한 잔 마시려고 매점에 들어가서 하염없이 눈 내리는 창밖을 우두커니 바라보는데, 물범 ‘진주’ 녀석이 물속에서 어렵사리 기어 나오는 것이 눈에 띈다. ‘진주’는 누가 지켜보고 있는지도 모르고 이리 구르고 저리 구르며 열심히 눈 위를 헤집고 다닌다. 물범들은 발이 퇴화되어 육지에서는 주로 배치기로 이동한다. 그래서 물 밖에서 이동하는 것이 엄청나게 불편한데 눈 오는 날만큼은 눈썰매 타듯이 미끄러져 나갈 수 있어 마냥 즐거운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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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암벽 위의 가장 높은 둥지나 나무 꼭대기에 주로 머물러 있는 홍부리 황새도 진한 눈이 내린 오늘 같은 날만큼은 하루 종일 바닥에 내려와 다른 새들과 어울리며 논다. 역시 눈 오는 날만 볼 수 있는 진귀한 풍경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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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위를 많이 탈 것 같은 얼룩말이나 기린들도 눈 밟기를 의외로 좋아한다. 하얀 눈 바탕에 진한 얼룩말 줄무늬가 더욱 선명하게 대조되어 드러난다. 개코원숭이도 쭉 손을 내밀어 오늘 눈 맛은 어떤가 하고 연신 맛을 보고 있다.

밤새 두툼하게 내린 하얀 눈은 사람에게나 동물에게나 무료한 일상에서 잠시나마 벗어날 수 있게 해주는 자연의 멋진 선물과도 같다. 눈 위에 등을 문지르며 데굴데굴 구르는 풍산개 ‘풍돌이’를 보면서 어렸을 적 눈 오는 날 아침, 친구들과 썰매 탈 생각에 이불 속에서부터 들떠 있었던 그 기분 좋음 속으로 잠시 추억의 여행을 떠나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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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런 감상도 잠시, 곧 동물원 마이크에서 소란하게 “전 직원은 제설 장비를 갖추고 모두 모이라”는 지시가 떨어진다. 역시 낭만은 짧고 현실은 무한하다. 부랴부랴 손에 잡히는 대로 큰 플라스틱 눈삽 하나를 챙겨들고 길게 길을 내며 앞으로 나아간다. 하얀 설국엔 금세 보기 싫은 까만 아스팔트가 드러난다. 가끔은 관람객들도 이런 깔끔함보단 뽀송뽀송한 동물원 눈 위를 한번 걸어보고 싶지 않을까? 영화 <러브스토리>처럼 눈 위에 그대로 쓰러져 인생 스탬프를 찍고 있는 모습을 상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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