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오면 노동착취하는 프랑스 기업, 왜?…여기선 그래도 되니까

2018.01.05 17:21 입력 2018.01.05 17:32 수정
곽원철

곽원철의 ‘알프스 베베 레나’

일러스트 | 김상민기자

일러스트 | 김상민기자

프랑스인들의 서비스 정신이 상호존중에 기반을 둔 것임을 소개한 지난 회차 칼럼에 달린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댓글 중에 이런 것이 있었다.

“9호선은 프랑스계 기업인데 왜 한국에서 열악한 노동조건으로 노동착취를 할까요? 프랑스인들도 해외에서는 그 나라 문화(?)를 존중하나 봅니다. 노동자는 국경 없이 다 노동자죠.”

9호선은 내가 프랑스로 건너갈 즈음에 개통된 노선이고 이후 가끔씩 한국에 볼일이 있어 들어올 때에도 이용해볼 기회가 없었다. 9호선에 프랑스 자본이 투자되었다는 것도 이번에 처음 알았다. 하지만 굳이 내가 잘 모르는 9호선을 예로 들 필요도 없다. 노조 파괴 공작 혐의로 지루한 법정 싸움을 벌여 온 바 있는 모 부품 업체도 프랑스 다국적기업의 한국 지사이고, 드라마로도 제작된 최규석 작가의 웹툰 <송곳>의 배경도 프랑스계 유통 업체이다. 즉 한국 노동계의 흑역사를 짚다 보면 의외로 프랑스 자본이 배경으로 깔려 있는 사례들이 제법 있는 편이다. 이는 프랑스에 대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혁명, 자유·평등·박애의 이념, 노동친화적 기업 환경 등의 이미지와 얼핏 상반되는 듯 보인다. 왜 이런 간극이 발생하는 것일까.

최규석 작가의 웹툰 <송곳>에서 프랑스 경영자들의 노동탄압 이유를 설명하는 장면.

최규석 작가의 웹툰 <송곳>에서 프랑스 경영자들의 노동탄압 이유를 설명하는 장면.

답은 의외로 간단할 수 있다. 역시 <송곳>의 대사를 빌려 보자. “여기서는 그래도 되니까.”

댓글을 달아준 독자분의 말처럼, 물론 노동자는 국경 없이 다 노동자라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이 ‘만국의 노동자들이여 단결하라!’는 인터내셔널의 정신이기도 하고. 하지만 마찬가지로, 경영자·관리자도 국경 없이 다 경영자·관리자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즉 프랑스의 경영자·관리자들이 자국 내에서 노동친화적인 정책을 펼치는 듯 보이는 것은, 그들이 다른 나라의 경영자·관리자들에 비해 딱히 노동자들에게 더 관대하거나, 자유·평등·박애의 이념이 뼛속 깊이 새겨져 있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만 “거기서는 그러면 안되니까”인 거다.

이야기가 더 심각해지기 전에 짚어 두도록 하자. 나는 노사 문제 전문가가 아니다. 노조 탄압으로 고통받는 노동자·활동가 분들이나 반대로 과도한 쟁의로 경영 활동에 어려움을 겪는 경영자·관리자 분들의 상반된 입장 양쪽 모두에 안타까움을 느끼고는 있지만, 개인적인 경험이나 감정에 국한되어 있을 뿐 (한쪽에 좀 더 치우치기는 하나 굳이 여기서 밝힐 필요는 없을 듯하다) 이를 구조적으로 충분히 이해하고 의견을 제시할 만큼의 경험이나 식견을 갖추고 있지 못하다. ‘노조 탄압’과 ‘과도한 쟁의’라는 표현이 모두 논란의 소지가 있을 수 있는, 심지어 어느 한쪽의 가슴에는 피멍이 맺힐 수 있는 표현임도 안다. 하지만 이는 앞서 말한 프랑스계 부품 회사에서 발생한 분쟁과 관련하여 현재까지도 우리나라의 소위 진보와 보수 언론이 같은 사안을 바라보는 다른 시각이기도 하다. 그러니 어쭙잖게 어느 한쪽의 이야기에 치우치기보다는, 그냥 내가 프랑스에서 경험한 노사 관계의 일면을 소개하는 정도가 이 칼럼의 취지에 더 적합하지 않을까 한다.

나는 대한민국 국민이지만 현재 법적으로는 우리 회사의 프랑스 법인에 고용된 형태이고, 따라서 프랑스 노동법의 보호를 받고 있다. 당연히 내가 원하는 노조에 가입하여 활동할 권리가 보장되지만, 부끄럽게도 아직까지 특정 노조에 가입하지는 않았다. 굳이 변명하자면, 일단 노조의 개수가 워낙 많아 딱히 어디에 가입해야 할지를 고민해보지 못했다는 것이 핑계가 될 수 있겠다. 복수 노조가 일반적인 프랑스에서는 강성·과격 노조의 대표격인 CGT(Confederation generale du travai, 노동자총연맹), 가입자 수에서는 최대이나 CGT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온건한 편인 CFDT(Confederation francaise democratique du travail, 프랑스 민주노동연맹), 주로 중간관리자급 이상이거나 전문직들이 가입 대상인 CFE-CGC(Confederation francaise de l’encadrement - Confederation generale des cadres 프랑스 관리자연맹 - 간부총연맹)와 기독노동자연맹(Confederation francaise des travailleurs chretiens, CFTC) 등 주요 5개 노조를 비롯하여 산업별, 직무별, 지역별로 수많은 노조들이 경쟁적으로 가입자를 유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히 노조의 천국이라 할 만한데 한편으로는 너무 많은 노조가 난립하는 것이 노조의 단결된 투쟁력을 저하시키는 일면도 있다. 어찌 되었든 노동자의 다양한 요구를 수용할 수 있는 노조들이 존재하여 이들 사이에서도 선의의(?) 경쟁을 하는 것은 긍정적이지 않을까 한다. 두 번째 이유는, 딱히 내가 노조에 가입해서 활동하지 않아도 단체협상의 결과가 프랑스 내 모든 직원에게 골고루 적용되기 때문이다. 내가 어떤 특정 노조에 가입한다고 해서, 프랑스어도 달리고 이곳의 노동시장에 대한 이해도 부족해 단지 머릿수 채워주는 정도 이상의 기여를 할 수 없으리라는, 다소 얌체스러운 핑계랄까. 나는 그저 가끔씩 구내 식당 앞에서 노조원들이 유인물을 나눠줄 때마다 웃으며 받아 들고 시간이 나면 프랑스어 공부 삼아 찬찬히 읽어 보는 정도로 노조 활동에 소극적인 지지를 보낼 따름이다. 어쨌든 이 유인물들에는 복잡하기 짝이 없는 연금 플랜 중 유리한 것을 선택하는 기준이라든지, 건강보험 혜택을 최대한으로 받아낼 수 있는 요령이라든지, 이따금씩 꽤 유용한 정보들이 포함되어 있기도 해서, 딱히 읽어서 손해날 일은 없기는 하다.

프랑스의 노조가 노동자들에게 나눠준 유인물. 연금, 건강보험 등에 대한 정보가 적혀 있다. 곽원철 제공

프랑스의 노조가 노동자들에게 나눠준 유인물. 연금, 건강보험 등에 대한 정보가 적혀 있다. 곽원철 제공

물론 모든 노사관계가 이렇듯 평화롭기만 한 것은 아니다. 우리 회사의 경우 최근 십수년간 이렇다 할 경영상의 어려움 없이 꾸준히 성장을 해 왔기 때문에 (그리고 그 과정에서 경영진의 판단과 역량이 크게 기여를 했다는 사실을 노조들도 어느 정도 인정하고 있기 때문에) 별다른 갈등 없는 노사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한국이나 중국을 비롯한 신흥 경제 강국의 후발 주자들에 비해 경쟁 우위를 유지하기 어려운 사양 산업이나 그외 여러 가지 이유로 고부가가치를 유지하기 어려운 산업 등에서는, 어쩔 수 없이 사업장을 폐쇄하거나 통폐합하는 등의 조치가 필요한 경우도 있을 수 있다. 이렇듯 일자리 자체가 위협받는 사안의 경우에는 단위 사업장의 노조뿐 아니라 전국 단위의 노조, 투자자와 주주의 입장을 대변하는 경영진과 경영자 단체, 그리고 정치권까지 모두 개입하는 복잡한 투쟁 양상이 불가피해지기도 하는데, 많은 경우 어느 일방의 삶이 파괴되는 극한 대립까지는 가지 않는 선에서 타협이 이루어지는 것으로 보인다. 어찌 되었든 노동자는 노조와 함께 연대하여 자신과 동료들의 일자리를 지켜야 하고, 경영진은 주주와 투자자의 이익을 보호할 의무가 있으며, 정치권은 이 모두를 아우르는 타협점을 제시할 임무를 띠고 있는 것이다. 각자의 역할에 충실한 가운데 힘의 균형을 이루며 시대의 변화에 적응해 나가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프랑스라고 항상 노동자들의 힘이 강했던 것은 물론 아니다. 유럽의 다른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프랑스에도 산업혁명과 자본주의의 발달을 겪는 과정에서 우리나라의 1960~70년대 고도 성장기에 자행된 노동 탄압을 무색하게 하는 악랄한 노동 환경의 시절이 있었음 또한 주지의 사실이다. 단결된 노동자들의 100여년에 걸친 꾸준한 투쟁과 권리 요구를 통해 오늘날의 권리를 획득한 것이다. 그 과정에서 자본가와 경영자·관리자들은 밀리기만 한 걸까? 이들은 또한 그러한 시대의 변화에 맞는 경영 및 관리 기법을 꾸준히 개발하고 적용하여, 노동자들의 요구에 부응하면서도 이익을 창출할 수 있는 방법을 끊임없이 모색해 온 것이다.

다시 9호선 이야기로 넘어가 보자. 9호선 지배구조의 문제점을 다룬 여러 국내 기사들을 뒤늦게 뒤적여 보았다. 9호선에서 발생하는 매출과 이익을 지나치게 ‘프랑스 자본에 퍼주는’ 형태로 되어 있는 모양이다. 자본 시장에서 리스크 없는 투자라는 건 사실상 있을 수 없다. 이렇듯 일방적으로 퍼주도록 되어 있는 계약을 성사시킨 ‘능력 있는’ 프랑스 기업이 어디인지 궁금해졌다.

복수의 국내 언론에 소개된 바로는 RDTA라고 하는데, 어떤 매체는 rdta.fr이라는 홈페이지 링크까지 제공하고 있어 들어가보니 Regie Departementale des Transports des Ardennes라는, 프랑스 북부 벨기에 국경 근처의 아흐덴이라는 지역에서 버스 노선을 운영하는 소규모 업체이다. 불과 125대의 버스를 보유하고 있을 뿐인 동네 버스 회사가 어떻게? 누구든 이용할 수 있는 전자공시 시스템을 이용하여 ‘서울9호선운영주식회사’의 감사 보고서를 다운받아 읽어 보았다. 확인해보니 이 ‘악덕’ 프랑스 기업은 RDTA가 아니라 RATP, 즉 파리교통공사(Regie Autonome des Transports Parisiens)였다. 아마도 RATP의 자회사인 RATP Dev Transdev Asia를 RDTA라고 약칭한 듯했다.

이 회사는 프랑스 파리 지역뿐 아니라 미국, 홍콩, 이탈리아, 브라질, 인도, 그리고 서울 등에서 트램선과 지하철 등을 운영한다. 다시 궁금해졌다. RATP는 서울 이외의 다른 도시에서 교통 운영을 하면서도 이렇게 자사에 일방적으로 유리한 계약을 맺었을까? 만약 그렇다면 대단한 능력이 아닐 수 없다.

어찌 되었건 9호선의 운영은 많은 문제가 드러난 만큼 열차 증편과 노동 환경 개선 등 대책 마련이 시급할 것이다. 또한 중요한 것은, RATP와 서울시의 계약이 과연 그렇게 불공평한 ‘퍼주기’였는지, 혹시 리스크에 대한 정당한 보상은 아니었는지(다른 자료에 의하면 애초에 수요 예측이 심각하게 잘못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수요 부족으로 개통 여부가 불확실할 정도였다고 한다), 만약 불공정한 계약이었다면 도대체 왜 지배구조를 애초에 그런 식으로 짠 건지, 여기에 책임질 사람은 누구인지 등을 면밀히 따져 보면 될 일이다. 내가 아는 프랑스의 경영자·관리자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직무에 냉철하게 충실한 사람들이다. 주어진 상황, 즉 현지의 법과 경영 환경하에서 최대한의 성과를 내기 위해 합리적인 판단을 내리도록 노력하고, 불필요한 마찰을 일으킬 수 있는 행위는 가급적 피할 것이다. 이들을 칭찬하거나 옹호하기 위해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다만 우리는 프랑스 경영진으로 하여금 “여기서도 그러면 안된다”는 걸 깨닫게 해주면 된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영리한 프랑스 경영자들은 금세 적응해 나갈 것이다.

▶필자 곽원철

[다른 삶]한국 오면 노동착취하는 프랑스 기업, 왜?…여기선 그래도 되니까


강원도에서 나고 자랐다. 서울에서 12년 남짓 직장 생활을 하다가 2009년 프랑스로 건너갔고, 우여곡절 끝에 프랑스 대기업의 그룹 전략개발실에서 근무하게 되어 지금까지 일하고 있다. 현재는 알프스 자락에 걸친 남프랑스의 산악도시 그르노블에서 아내와 갓 태어난 딸 레나와 함께 살면서 파리를 오가는 생활을 하고 있다. 살다 보니 어느 순간 ‘뭔가 남들과 다르게 하는 것’이 인생의 모토가 되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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