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대만 고산족 풍요 기원 의식 ‘머리사냥’ 반일 저항 무기 되다

2018.06.14 21:38 입력 2018.06.14 21:49 수정

헤드헌팅과 문신, 그리고 야만

20세기까지 대만 고산족 남성들의 통과의례가 돼 온 머리사냥 문화의 심층에는 죽음을 통해 삶을 증식시키려는 은유적 사고가 숨어 있다. 이것이 개인의 무용을 뽐내고, 일본도의 성능을 자랑하고, 제국의 위용을 드러내기 위한 폭력일 뿐이었던 일제의 머리사냥과 다른 점이다. 사진은 일제의 학살을 다룬 대만 영화 <시디그 발레> 중 일본 병사의 목을 베는 장면.

20세기까지 대만 고산족 남성들의 통과의례가 돼 온 머리사냥 문화의 심층에는 죽음을 통해 삶을 증식시키려는 은유적 사고가 숨어 있다. 이것이 개인의 무용을 뽐내고, 일본도의 성능을 자랑하고, 제국의 위용을 드러내기 위한 폭력일 뿐이었던 일제의 머리사냥과 다른 점이다. 사진은 일제의 학살을 다룬 대만 영화 <시디그 발레> 중 일본 병사의 목을 베는 장면.

1930년 10월27일 대만 난터우현 우서에서 반일봉기가 발생한다. 1895년 시모노세키 조약에 따라 청으로부터 대만을 할양받은 일본의 식민지배에 대한 반발이었다. 대만총독부는 한반도에서 했던 바와 다르지 않게 경찰과 군대를 파견하고, 토지조사·일본어교육·출초(出草) 금지와 같은 방법으로 대만 원주민들을 동화시키려고 했다. 통제와 탄압에 맞선 항일봉기의 한가운데 일본 유학까지 다녀온 시디그족 족장 모나루다오(1882~1930)가 있었다.

2011년 대만의 웨이더성(魏德聖) 감독이 연출한 영화 <시디그 발레(賽德克 巴萊·Seediq Bale)>는 바로 이 사건을 극화하고 있다. 영어로는 ‘무지개 전사들(Warriors of the Rainbow)’이라고 아름답게 번역되었지만 사실은 일제의 학살에 관한 이야기다. 이 슬프고도 장엄한 영화를 따라가다보면 두 가지 인상적 이미지와 만나게 된다. 출초, 곧 머리사냥(獵頭·Head hunting)과 문신(Tattoo)이 그것이다. 시디그족 성인들은 대개 얼굴 문신을 가지고 있고, 그 문신은 남성의 경우 머리사냥과 연결되어 있다.

먼저 머리사냥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자.

아타얄족은 원래 문신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나중에 누군가 발에 문신을 했더니 보기에 아주 좋았다. 그래서 다시 얼굴에 문신을 해봤는데, 다들 아름답다고 하였다. 이렇게 해서 문신 풍속이 생겨났다. 얼굴에서 시작된 문신은 나중에는 얼굴 전체를 검게 하는 데까지 갔지만 나중에는 문신의 범위가 갈수록 축소되었다.

남자들은 평지인(平地人)들의 머리를 베어 돌아오면 이마와 턱에 문신을 할 수 있었다. 머리사냥에 나설 때 어른들은 남자아이들 한 무리를 대동하고 가서 머리를 벤 뒤 아이들한테 머리카락 한 올씩을 준다. 아이들은 이렇게 배우면서 성장한다. 평지인들을 많이 사냥한 경우 한 건에 한 줄씩 가슴에 가로줄 문신을 한다.

머리사냥에서 돌아올 때 마을의 남녀노소가 모두 모여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축하한다. 다음날에도 계속 노래하고 춤을 추는 가운데 머리를 아랍파오(머리를 걸기 위해 나무로 얽어 짜놓은 시렁)에 바친다. 부녀들은 좁쌀을 찧어 빚은 떡을 베어온 머리의 입에 넣어 먹인다. 그다음에 그 떡을 나눠 머리베기에 참가한 남자아이들에게 먹인다. 그 후 부녀들은 술을 빚고 남자들은 사냥에 나선다. 마을사람들은 잡아온 고기와 술을 함께 나눠 먹으면서 노래하고 춤추는 집단적 축제를 벌인다.

대만 고산족 시디그족의 족장 모나루다오의 동상.

대만 고산족 시디그족의 족장 모나루다오의 동상.

이 구전 자료는 시디그족의 전승이 아니다. 시디그족과 인접해 살고 있는 아타얄족의 머리사냥과 문신에 얽힌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몇 가지 정보를 확인할 수 있다. ‘아름답다’는 문신에 대한 인식, 문신과 머리사냥의 관계, 머리사냥을 후대에 전수하는 방법, 사냥한 머리에 대한 의례와 마을 축제 등등이다. 아타얄족의 사례이기는 하지만 시디그족도 크게 다르지 않다. 영화 <시디그 발레>는 바로 이런 머리사냥 축제의 장면을 화면 가득 담아놓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장면은 ‘머리에 대한 의례’다. 왜 이들은 베어온 머리를 아랍파오에 걸고 좁쌀떡을 해서 먹이는가? 또 베어온 머리가 먼저 먹은 떡을 왜 나눠 먹는가? 이는 조상신에게 먼저 음식을 바치고, 조상신이 먹은 음식을 의례에 참여한 이들이 나누는 우리의 제사와 흡사하다. 이들은 베어온 머리를 단순한 전과(戰果)로 여기지 않고 신으로 숭배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아타얄족 또는 시디그족의 의례와 인식은 우리를 머리사냥문화의 심연으로 이끈다.

중국 윈난성 란창강 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와족, 필리핀의 이푸가오족 등은 대만의 고산족과 더불어 머리사냥문화를 오랫동안 고수해오던 종족들이다. 우리는 이들을 고(古)문화권, 다시 말해 원시적 관습을 20세기까지 지속해오던 문화권의 종족들로 부른다. 이들 가운데 와족의 신화는 대만 고산족의 머리사냥문화를 해석하는 데 흥미로운 실마리를 던져준다.

와족의 원조(元祖) 부부는 처음에는 올챙이였다가 개구리가 되었고, 나중에는 괴물로 변해 동굴에 살면서 동물을 잡아먹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어느 날 사람들이 사는 먼 마을에 들어가 사람을 잡아먹고는 두개골을 가지고 돌아왔는데, 그 후 인간의 모습을 한 아이들을 많이 낳았다고 한다. 그래서 이들 부부는 두개골을 숭배했고, 자손들에게 사람의 머리를 계속 바치라는 유언을 남겼다는 것이다.

이 짤막한 신화가 ‘야만적’이라고 느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야기의 심층에는 흥미로운 문화 코드가 숨어 있다. 올챙이와 개구리 그리고 괴물은 인간이 아니다. 이들 비인간과 인간의 경계에 원조 부부의 사냥 행위와 종교적 의례가 있다. 이들의 머리사냥과 식인(食人)은 괴물 부부에게 많은 아이들을 선물한다. 사람을 먹은 괴물이 인간을 낳았다는 이야기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주술적 사유다. ‘개고기를 많이 먹으면 개를 닮는다’는 생각도 이와 다르지 않다. 동시에 머리를 계속 바치고 모시라는 와족 조상 부부의 유언에는 머리사냥과 머리 숭배가 이들에게 다산을 약속한다는 사유도 함축되어 있다. 이는 내가 지난 회 ‘뼈와 구슬’(19회)에서 거론했던 뼈가 지닌 증식의 힘과 연결된다. 죽은 어머니의 변신인 소의 뼈가 신데렐라들에게 필요한 것들을 주었듯이 사냥에서 획득한 인간의 머리뼈도 다산과 풍요를 가져다준다는 생각이 그것이다.

그런데 와족 신화를 좀 더 들여다보면 머리사냥과 숭배의례에는 문화 코드 하나가 더 숨어 있다.

헤드헌팅은 원시문화의 일부
사냥 성공 땐 ‘문신’도 부여
머리는 새로운 생명 증식시켜
농경사회 열리며 ‘풍농’의 상징

대만 고산족 시디그족 전사들
항일봉기에 앞장서다 ‘전멸’
그들의 저항은 생존의 몸부림

고산족 머리사냥은 의례이자
이웃 종족과 교환하는 행위
일제의 머리베기는 폭력이자
더 많은 죽음 생산하는 ‘야만’


옛날 하늘과 땅 사이가 아주 가까워서 사람들은 씨를 뿌려 양식을 마련할 수가 없었다. 천신 메이지가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한 사람을 죽여 그 머리로 신께 제사를 드리면 씨를 뿌릴 수 있을 거야”라고 했다. 어떤 사람이 듣고는 자신의 양자(노예)를 죽여 머리를 잘라 제사를 드렸다. 과연 하늘이 높이 올라가 씨를 뿌릴 수 있게 되었다.

이 신화는 머리베기와 농경의 시작을 연결짓고 있다. 아시아 지역의 농경기원신화를 살펴보면 천지분리신화와 접합되어 있는 경우가 적지 않다. 천지개벽 초기에는 하늘과 땅이 아주 가까워 사람들이 나무나 사다리, 높은 산을 딛고 쉽게 하늘을 오갈 수 있었고, 인간과 신이 결혼도 했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농사를 지으면서 드디어 하늘이 멀어져 인간은 더 이상 하늘에 올라갈 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 곡물을 재배하면서 식량이 많아지자 낭비가 심해져서, 너무 많이 먹고 너무 많이 싸자 화가 난 신들이 하늘을 데리고 멀리 올라가 버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와족 신화에는 농경기원신화와 천지분리신화에 머리사냥이라는 신화소가 더 부가되어 있다. 그뿐만 아니라 여기서는 천지분리와 파종의 인과관계가 전도되어 있다.

곡물을 재배해서 하늘이 멀어진 것이 아니라 하늘이 높이 올라가서 곡물을 재배할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이 모든 것이 천신 메이지의 기획이라고 말한다. 머리베기와 제사를 신의 뜻으로 긍정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농경의 기원으로까지 연결시키고 있다.

전통복식에 얼굴 문신을 한 대만 고산족의 하나인 싸오족 청년들.

전통복식에 얼굴 문신을 한 대만 고산족의 하나인 싸오족 청년들.

바로 이 지점에서 와족의 신화와 머리사냥의례는 대만 고산족의 머리사냥의례와 만난다. 왜 아타얄족은 좁쌀로 떡을 해서 잘라온 적의 머리에 먹이고 자신들도 나눠 먹었는가? 그것은 ‘머리베어모시기’가 농경의 풍요와 무관치 않다는 문화적 증표다. 와족 신화를 참조한다면 머리사냥은 일종의 풍농의례였다. 이는 또 하나의 고산족인 푸유마족이 좁쌀 파종 전의 머리사냥을 필수적 의례로 삼고 있었다는 사실을 통해 재확인할 수 있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정리하면 이렇다. 원시사회가 동물을 의례적으로 사냥하고 뼈를 소중히 여겨 숭배하는 것은 뼈를 통해 해당 동물이 재생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뼈가 뼈를 낳고 뼈가 새로운 생명을 증식시킨다. 사람의 뼈도 마찬가지다. 사람의 뼈, 곧 머리(해골)는 새로운 생명을 증식시킨다. 다산을 약속한다. 이 원시적 사유가 농경의 개시와 더불어 머리사냥과 풍농을 연결시키는 또 하나의 주술적 사유로 확장되어간 셈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머리사냥은 남성들의 통과의례가 되었을까? 이 물음에 대한 적절한 답을 얻으려면 머리사냥이 왜 문신과 결합되어 있는가를 생각해봐야 한다. 나는 오래전에 <문신의 역사>(2003)라는 작은 책을 낸 적이 있다. 거기서 문신은 신체를 보호하거나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기능을 지니고 있고, 신분을 표시하거나 종족적 정체성을 나타내는 기능도 가지고 있다고 정리한 바 있다. 고산족의 문신도 여기서 벗어나지 않는다. 여성들의 문신은 기혼자의 표지이거나 베짜기 능력의 표현이다. 그런데 고산족 남성들의 경우 문신은 전사로서의 통과의례를 거친 자의 외적 표지로 작동한다. 어떤 이유로 문신이 전사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표지가 되었을까?

나는 전쟁과 지배가 아니라 협력이 인류 진화의 산물이라고 생각한다. 사람이 사람의 목을 베는 행위는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다. 머리사냥은 문화적인 것이다. 헤드헌팅은 인류가 생존을 위해 불가피해서 만들어낸 원시문화의 일부다. 거기에는 죽음을 통해 삶을 증식시키려는 은유적 사고가 숨어 있다. 머리사냥이 문화인 한 새로운 세대는 성장 과정에서 통과의례의 형식으로 그것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하지만 머리베기는 두려운 행위다. 두려움을 없애기 위해 고산족은 머리사냥에 남자아이들을 참여시키고 획득한 머리카락을 수여한다.

머리사냥에 성공한 신참자에게는 문신을 부여한다. 이런 과정을 거쳐 문신이 전사의 상징이 되면 문신은 아름다움으로 인식되고 욕망의 대상이 된다. 문신문화는 이런 인지적 과정을 거쳐 머리사냥문화와 통합되었다고 생각된다.

1937년 중일전쟁기의 난징에서, 식민통치기의 한반도에서, 태평양전쟁기의 동남아 밀림에서 일본군의 머리베기가 무수히 자행되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대만에서도 다르지 않았다. 그렇다면 일본군의 머리베기와 고산족의 머리사냥은 같은가 다른가? 이는 원시사회의 의례적 동물 사냥과 국가사회의 동물 사냥의 차이(이 문제에 대해서는 <우리 신화의 수수께끼>에 실려 있는 ‘두 가지 사냥 두 가지 신화’를 읽어보기 바람)를 묻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물음이다.

고산족의 머리사냥은 풍요를 기원하는 의례적 행위이다. 더 적극적으로 말하자면 이웃 종족과 머리를 교환하는 행위이다. 폭력이라고 해도 그것은 의례적 폭력이고 생존에 필요한 불가피한 폭력이다. 그러나 일제의 머리사냥은 개인의 무용을 뽐내고 일본도의 성능을 자랑하고 제국의 위용을 드러내기 위한 폭력이다. 전자의 경우 죽음은 삶을 풍요롭게 만들지만 후자의 경우 죽음은 더 많은 죽음을 생산할 뿐이다. 야만성은 고산족의 것이 아니라 제국 일본의 것이다. 독가스까지 살포하여 시디그족 전사를 전멸시킨 우서 반일투쟁을 재현하는 영화 <시디그 발레>는 저 일제의 야만성에 대해 증언하고 있다. 그때 야만은 문명의 탈을 쓰고 출현했었다고!

글을 쓰는 동안 북·미 정상회담이 진행되었고, 마침내 공동성명에 서명하는 장면을 보았다. 공동성명은 “이번 합의가 한반도 및 세계에 평화와 번영을 가져오게 될 것”이라고 명시하고 있다. 아소 다로 일본 부총리의 ‘볼품없는 전용기의 추락’과 같은 야만적인 발언을 뚫고 이뤄낸 역사적 진일보다. 이즈음에서 느닷없이, 1930년 10월, 시디그족의 머리베기와 일제 군경의 머리베기를 북핵과 미핵의 대립으로 환치시켜보고 싶어진다. 지나친 상상일까? 지금 우리에겐 저 야만의 시간을 넘어서려는 상상력이 절실한 때가 아닐는지?

▶필자 조현설

한국 고전문학·구비문학을 전공했다. 서울대 교수(국문학)로 한국 신화를 포함한 동아시아 신화와 서사문학을 탐구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 <동아시아 건국신화의 역사와 논리>(2004), <우리 신화의 수수께끼>(2006), <마고할미신화 연구>(2013) 등이 있다. 논문으로 ‘해골, 삶과 죽음의 매개자’(2013), ‘천재지변, 그 정치적 욕망과 노모스’(2016)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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