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47년 ‘복권’ 최초 발행

2018.08.05 20:54 입력 2018.08.05 21:01 수정

태극기 달고 첫 출전 런던 올림픽 낭보에 ‘올림픽 후원’ 복권 첫선

경향신문 1948년 5월 5일자에 실린 올림픽 복권 당첨자 번호다. 지금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복잡하게 되어 있다.

경향신문 1948년 5월 5일자에 실린 올림픽 복권 당첨자 번호다. 지금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복잡하게 되어 있다.

해방 후 팍팍한 삶 속에서도 기쁜 소식 하나가 날아들었다. 서윤복 선수가 국제마라톤대회인 미국 보스턴 마라톤에서 우승한 것이다. 식민지 시기 손기정 선수의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우승처럼 스포츠에서 한국 선수가 선전했다는 소식은 암흑 속에 하나의 빛이 되었다. 여운형이 조선체육회 회장을 맡으면서 손기정 선수의 베를린 올림픽 출전을 격려하고, 히틀러가 베를린 올림픽을 개최하고, 박정희가 박대통령컵 축구대회를 만든 것도 어둠 속에서 빛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 물론 이들의 정치적 의도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여운형이 젊은이들의 기운을 불러일으켜 독립운동과 통일정부 수립에 힘을 모으기 원했다면, 히틀러와 박정희는 정통성 없는 독재정부를 합리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박태균의 버치 보고서](19)1947년 ‘복권’ 최초 발행

미군정하에서 한국인들의 마음을 설레게 한 또 하나의 이벤트는 1948년의 런던 올림픽이었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 이후 제2차 세계대전으로 두 차례 올림픽이 열리지 못했다. 게다가 한국인들에게는 처음으로 태극기를 가슴에 달고 올림픽에 나갈 수 있는 기회였다. 몇 종목에 참가하고 몇 등을 하느냐가 문제가 아니었다. 아직 독립정부가 수립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올림픽에 참가할 수 있다는 낭보가 1946년 12월 미국으로부터 날아들었고, 다음해 6월에는 국제올림픽위원회에서 조선체육회를 승인했다(경향신문 1946년 12월22일자, 1947년 6월25일자).

반면 1940년 올림픽 개최 예정지였던 일본은 독일과 함께 1948년 올림픽에 초대받지 못했다. 오히려 일본이 1940년 올림픽에 사용하려고 마련했던 차를 한국의 올림픽 선수단이 해방 이후 사용하는 에피소드도 있었다(경향신문 1946년 6월22일자). 물론 ‘Korea’라는 이름으로 처음 참가한 올림픽에서 좋은 성적을 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당시 신문에는 ‘올림픽 대회의 참패 원인은 무엇’(경향신문 1946년 8월18일자)이라는 기획 연재기사가 올라왔다. 앞에서 손기정과 서윤복의 이름을 거론한 후 국민들도 ‘올림픽 후원권’을 사서 선수단의 활약을 기대했건만 그 성과는 약속과 기대에 어그러졌다는 것이다. 역도와 권투에서 ‘겨우’ 3위에 입상해 태극기가 올라갔을 뿐 그 외의 종목에서는 이렇다할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고 선수단을 질책하고 있다.

‘올림픽 대회가 열리자마자 전파로 들어온 소식은 참패에 참패를 거듭한 기막힌 소식뿐이니 누구든지 선수를 원망치 않을 자 없었다. 그러나 우리가 가장 기대한 마라톤의 우승만으로 이를 분풀이할 것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어 오직 이 마라톤이 거행될 날짜만을 고대하고 있었으니 이 마라톤은 과거의 전적으로 보아 모든 경기에 비교하여 우리 선수가 전통적 역량을 지니고 있는 만큼 반드시 제패할 것을 너무도 굳게 믿어 왔으므로 런던 마라톤 경주에는 응당 우승할 것을 너나할 것 없이 기약하였다. 그러나 마라톤 경주에 출전한 우리 선수는 너무도 우리들의 기대와는 거리가 멀었다.’

미군정하에서 한국의 런던 올림픽 참가를 위해 애를 썼던 전경무(미국명 제이콥 던)의 장례식 장면.

미군정하에서 한국의 런던 올림픽 참가를 위해 애를 썼던 전경무(미국명 제이콥 던)의 장례식 장면.

그때나 지금이나 별로 다른 게 없는 것 같다. 월드컵 예선에서 한두 게임 졸전을 벌인 한국팀에 본선에서 좋은 성적을 올려주기를 바랐다가 잘 못했다고 질책하는 지금 언론의 태도와 아직 정부도 수립하지 못한 상태에서 체계적인 훈련도 받지 못한 선수들을 올림픽에 내보내고 큰 기대를 걸었던 당시 언론의 태도는 오십보백보다. 물론 손기정 선수와 서윤복 선수의 우승 소식에 환호했던 국민들에게 어쩌면 당연한 기대일 수도 있었지만.

그런데 이 기사 속에는 국민들을 설레게 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바로 ‘후원권’이라는 이름으로 발행된 복권이었다.

100엔짜리 복권 140만장 발매
인구비례로 지역별 차등 배포
판매 연장 부른 생소했던 복권
다 안 팔려서 서울 이전 판매도

버치 문서에는 ‘올림픽 복권 판매를 위한 규칙과 방법’이라는 1947년 12월17일자 문서가 포함되어 있다. ‘1948년 런던 올림픽을 위한 복권 판매에 들어갔다. 서울과 다른 지역에서 독립적으로 발매되었다. 한 장에 100엔으로 총 140만장의 티켓이 발행되어 다른 지역에서 판매를 위해 배포되었다. 한국올림픽지원협회에서 판매할 것이며 행운의 번호를 가진 사람들이 각 지방에서 당첨될 것이다. 티켓은 10개의 세트로 되어 있으며, 각 세트는 14만장씩 되어 있고 각각 a, b, c로 나뉘어 있다. 각각의 세트는 A1과 A8의 두 파트로 되어 있고, 넘버는 70,000까지 되어 있다. 각각의 10개 세트의 행운번호 당첨금은 1등 100만엔, 2등 2명 50만엔, 3등 3명 10만엔, 4등 5명 5만엔, 5등 10명 1만엔이다.’

이 문서만으로는 복권이 어떤 방식으로 발행되었고, 당첨금을 어떻게 배분하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단지 1946년 민주의원 의원들의 거마비가 3000엔이었고, 미군정이 민주의원에 지원한 자금이 100만엔, 민족청년단 10만엔이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1등 당첨금 100만엔은 결코 적은 액수가 아니었다. 인플레이션을 감안하더라도 보통 사람들에게 이 정도의 금액을 한 번에 벌 수 있는 방법은 복권에 당첨되는 것이 유일했다.

‘100장 이상의 티켓을 사는 사람들에게는 특별 올림픽 기념 배지가 수여될 것이다. 12월1일에 발행되어 1948년 1월31일까지 판매될 것이다. 행운의 번호 발표는 1948년 3월1일에 있을 것이며, 지역신문과 라디오를 통해 발표될 것이다. 당첨자는 3월10일까지 올림픽지원협회와 지부에 이름, 번호, 나이, 성별, 주소를 등록해야 한다. 공식 당첨자 발표는 3월20일에 지역신문과 라디오를 통해 발표될 것이다. 등록에 실패하거나 티켓이 너무 더럽고 인식이 어려울 때는 당첨이 취소된다.’

서윤복의 마라톤 제패를 기념하는 잡지 ‘국제보도(Pictorial Korea)’의 화보.

서윤복의 마라톤 제패를 기념하는 잡지 ‘국제보도(Pictorial Korea)’의 화보.

복권을 발행해서 판매하는 것도 중요했지만 과정을 공정하게 하는 것도, 사람들에게 복권을 사도록 하는 것도 필요했다. 당시 경향신문은 하지 사령관도 복권을 구매했다는 기사를 게재했다(경향신문 1948년 1월18일자). 또 버치 문서에는 복권 사기를 막기 위한 방법도 기록되어 있다.

정부 수립 안돼도 조선체육회로
국제올림픽위원회 승인 받아내
올림픽 출전 기여 미국인 초상
위조 방지 장치로 복권에 넣어

‘복권은 조선출판사에서 인쇄되어서 조선올림픽지원협회에서 배포될 것이다. 제이콥 던(Jacob Dunn)의 초상화가 인쇄될 것이다. 위조를 막기 위해서다. 지방정부와 협의가 이루어질 것이며, 자체적으로 판매원 고용도 이루어질 것이다. 분실과 도둑을 막기 위한 조치도 취해질 것이다. 판매대금은 신문을 통해서 공표될 것이며, 협회에 의해 조선산업은행 종로지점에 예치될 예정이다.’

위조를 막기 위해 복권에 초상화를 넣기로 한 것은 적절한 조치였다. 제이콥 던은 한국의 올림픽 참가를 위해 노력하다가 1947년 5월29일 비행기 사고로 사망한 전경무씨의 미국 이름이었다. ‘전’을 ‘던’으로 표기했다는 점이 독특하다. ‘조선올림픽위원회 지원협회 의장 안재홍’의 권한하에 발행된 복권은 인구 분포를 고려하여 차등적으로 배포되었다. ‘서울 4세트 56만장, 경기도 1/2세트 7만장, 충청북도 1/2세트 7만장, 충청남도 1/2세트 7만장, 전라남도 1세트 14만장, 전라북도 1세트 14만장, 경상북도 1세트 14만장, 경상남도 1세트 14만장, 강원도 3/10세트 4만2000장, 제주도 2/10세트 2만8000장.’

지금보다 복잡한 당첨방식 눈길
1등 100만엔·2등 2명 50만엔…
1등은 민주의원 지원금 맞먹어
전쟁 중 1951년 ‘애국복권’ 등장

문서의 마지막에는 염려가 섞인 언급도 첨가되어 있다. ‘다 안 팔리면 다른 지방으로 돌릴 예정’. 먹고살기도 바쁜 한국 사람들에게 복권은 생소한 것이기도 했다. 결국 판매 기간을 1948년 3월21일까지 연장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다른 지역에서 안 팔린 복권은 서울에서 판매하기도 했다(경향신문 1948년 3월12일자). 이후 1949년 어린이에게 경품 추첨을 위한 복권을 발행했고, 전쟁 중이었던 1951년에는 애국복권이 발행되기도 했다.

미군정하의 혼란한 상황 속에서 올림픽 복권은 한국 사람들이 처음으로 접해보는 것이었다. 물론 그 절차를 무난하게 진행하기도 쉽지 않았다. 복권 사기를 막기 위한 조치를 취했다는 점은 당시의 사회적 상황을 잘 보여준다. 이렇게 혼란한 상황 속에서 범죄는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이 중에서도 친일파 한상용의 손자인 신한공사 부사장이 비서를 성폭행한 사건은 미군정 내에서 유명한 범죄사건이었다(‘신한공사의 범죄 케이스’, 1947년 4월15일자 버치 문서 박스 5).

해방 이후 마라토너 서윤복 선수의 우승을 계기로 손기정 선수의 베를린 올림픽 제패가 다시 한번 사회적 관심을 모았다. 이는 손기정 선수의 우승이 당시 한국인들에게 얼마나 ‘큰 빛’이 되었는가를 잘 보여준다.

해방 이후 마라토너 서윤복 선수의 우승을 계기로 손기정 선수의 베를린 올림픽 제패가 다시 한번 사회적 관심을 모았다. 이는 손기정 선수의 우승이 당시 한국인들에게 얼마나 ‘큰 빛’이 되었는가를 잘 보여준다.

시내에서 아이들이 사라지는 사건도 발생했다. 1947년 9월30일 버치에게 고발이 들어왔다. 미군정에서 서울시내의 비행소년들을 줄여 범죄율을 낮추는 정책을 취하자, 경찰이 방랑하거나 방랑하는 것으로 보이는 소년들을 도시 밖으로 80~100㎞ 태우고 나가 버려두고 온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길에서 아이들을 잃는 사람들이 많아졌다는 것이다. 한 엄마는 꽃 사러 가게에 들어간 사이에 아이가 없어져서 알고 보니 먼 지방에 버려져 있었다고 한다(브라운 장관에게 보낸 버치의 보고, ‘미성년자에 대한 경찰의 정책’, 버치 문서 박스 2).

그러나 무엇보다도 미군정을 골치 아프게 한 사건들은 깡패들의 불법적인 행동이었다. 시대를 막론하고 서민들이나 소상인들을 괴롭히는 깡패들은 어디에나 존재했다. 해방정국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던 것 같다. 그런데 문제는 이들의 불법 활동이 정치와도 연결된다는 것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버치의 문서에 정치인들 못지않게 많이 등장하는 이름이 있었다. ‘장군의 아들’ 김두한이었다.

필자 박태균 교수

‘버치 보고서’를 발굴한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한국현대사 전문가다. 1966년생으로 서울대 국사학과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서울대 국제한국학센터 소장을 지냈다. KBS <인물현대사>,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등의 자문을 맡고, CBS 라디오 <박태균의 한국사>를 진행했다. 2015년에는 경향신문 ‘광복 70주년 특별기획-김호기·박태균의 논쟁으로 읽는 70년’에서 40회에 걸쳐 해방 이후 한국 사회 주요 담론들을 정리하기도 했다. 저서로는 <한국전쟁> <우방과 제국, 한·미관계의 두 신화>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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