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사람만 몰래 오세요, 스피크이지바

2017.01.20 20:53 입력 2017.01.20 21:50 수정

미국 금주법 시대 음지 영업서 유래

핫도그 가게·꽃집 등 ‘생뚱맞은’ 뒷문 열면 술집

한남동 뒷골목, 간판도 없어서 더욱 찾기 힘든‘스피크이지 몰타르’. 저 나무문을 두드려야 입장이 가능하다.

한남동 뒷골목, 간판도 없어서 더욱 찾기 힘든‘스피크이지 몰타르’. 저 나무문을 두드려야 입장이 가능하다.

18일 오후 8시 서울 한남동의 ‘스피크이지몰타르’. 컴컴한 골목길에 들어앉은 바 앞엔 이미 한 명의 남성과 두 명의 여성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런 곳에 바가 있을 줄 몰랐다”는 일행의 얘기에 이 남성은 “여긴 문을 두드려야 열어준다”며 간판도 없는 바의 나무 문을 두드렸다. 종업원이 인원 수를 확인하더니 “기다리라”는 말을 남기고 문을 닫았다. 잠시 후 현관 조명이 들어오더니 문이 열렸다. 내부에는 ‘촬영금지’ ‘만취금지’라는 문구가, 입구에는 ‘바텐더의 룰을 어기는 사람을 거부할 수 있다(we can reject out of rule breaker)’는 안내문이 걸려있었다. 한 남성은 “처음엔 문틈으로 확인하고 열어주기에 무슨 마약이라도 파는 줄 알았다”고 했다. 기자는 여성 바텐더에게 칵테일을 추천해달라고 했다. “식사했어요? 평소 즐기는 과일은….” 바텐더는 좋아하는 향까지 물은 뒤 상세한 설명과 함께 ‘아마폴라’를 만들어줬다.

스피크이지(speakeasy)바가 요즘 유행이다. 스피크이지바는 1920년대 미국의 금주법 시대에 음지에서 영업하던 바를 일컫는다. 경찰이나 이웃들에게 알리지 않도록 ‘쉬쉬하며 조용히 말한다’는 데에서 유래했다.

스피크이지바는 2000년대 중반 뉴욕에서 히트치더니 홍콩, 일본 등지로 확산됐다. ‘제발 말하지 마세요’라는 뜻의 뉴욕 이스트빌리지의 ‘PDT(please don’t tell)’는 핫도그 가게 내부에 있는 공중전화의 1번을 눌러야 문이 열린다.

200여종 이상의 위스키를 구비한 청담동 볼트+82.

200여종 이상의 위스키를 구비한 청담동 볼트+82.

12일 오후 10시, 청담동 ‘볼트+82’를 찾았을 때는 라운지를 통과해 별도의 유리덧문을 여니 지하에 바가 펼쳐졌다. 바텐더는 200여종의 위스키를 구비하고 있다고 했다. 견과류, 크래커, 바질페스토로 구성된 기본 안주를 내놓은 뒤 계산하고 나자 “핫팩처럼 쓰세요”라며 뜨끈하게 데운 이탈리아산 유리병 생수를 건넸다. 여긴 무슨 서비스가 좋을까? “구두광택 서비스 ‘문샤이너’ 반응이 좋습니다.” 문샤인(moonshine)이란 밀주라는 속어. ‘은은한 달빛 아래에서 술을 마신다’는 이중적 의미다.

키보다 작은 문을 통과해야 하는 한남동 블라인드피그. 마침 내부수리 주간이라 들어갈 수 없었다.

키보다 작은 문을 통과해야 하는 한남동 블라인드피그. 마침 내부수리 주간이라 들어갈 수 없었다.

한남동 ‘블라인드피그’는 골목길에 있는데, 키보다 훨씬 낮은 문을 열고 허리 숙여 들어가야 한다. 18일 밤 찾았을 때는 수리 중이었다. 청담동 ‘르 챔버’는 서가에 꽂힌 책을 누르면 책장이 밀리며 바로 들어갈 수 있다. 아기자기한 분위기로 여성들이 즐겨 찾는 청담동 ‘앨리스’는 꽃집을 통해 입장한다.

업계의 말을 종합하면 국내 스피크이지바 원조격은 2012년 한남동에 생긴 ‘스피크이지몰타르’와 ‘볼트+82’이다. “간판 만들 돈이 없어” 주택가에 간판도 없이 문을 연 ‘볼트+82’ 마서우 대표는 친구들에게 이끌려 뉴욕에서 스피크이지바를 알게 된 뒤 바를 열었다고 했다. 스피크이지바의 매력은? 마 대표는 영화 <타짜> 속 정 마담의 대사 “이 창문은 막아. 해 뜨는 거 보면서 화투치고 싶겠어? 백화점 창문 없는 거 몰라?”를 인용했다. “바깥 세계와 단절된 느낌을 주는 공간에서 술 마시기 좋은 분위기가 매력이죠.” ‘볼트+82’는 2014년 청담동으로 이전했다.

포시즌스 호텔 서울의 지하 1층에 ‘숨겨져’있는 ‘찰스H.’의 입구. 김영민 기자

포시즌스 호텔 서울의 지하 1층에 ‘숨겨져’있는 ‘찰스H.’의 입구. 김영민 기자

스피크이지바는 청담동과 연남동으로 확산되더니 호텔에도 생겼다. 2015년 영업을 시작한 광화문 포시즌스호텔은 1920년대 뉴욕스타일의 바 ‘찰스H.’를 열었다. 홈페이지에 ‘지하 1층에 숨겨져 있습니다’라고 소개된 ‘찰스H.’는 입구를 찾기 어려운 바로 유명하다. 김민영 매니저는 “고객이 스스로 숨겨진 벽문을 열고 들어가야 비로소 입장이 가능하다는 점이 오히려 큰 호응을 얻고 있다”고 말했다. 술은? 싱글몰트위스키와 창의성 높은 칵테일이 인기다. 이진우 바텐더는 “싱글몰트위스키에 이어 크래프트 칵테일(전문성과 정성이 담긴 완성도 높은 칵테일)이 인기를 얻으며 스피크이지바가 떠오르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싱글몰트위스키란 100% 맥아를 원료로, 여러 양조장이 아닌 한 증류소에서 제조한 몰트위스키를 말한다. 한마디로 고급 위스키다. 손님들은 20대부터 초로의 신사까지 다양하다. 미식블로거 김새봄씨는 “옷을 잘 차려입고 나름대로 분위기 내며 가는 곳”이라고 했지만, 캐주얼 차림의 손님도 많았다. 김씨는 “‘혼술족’의 증가와 함께 양보다 질을 선호하는 음주 문화가 자리 잡으면서 스피크이지바가 더욱 유행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재키유 ‘칵테일위크&위스키라이브’ 대표에 따르면 통상 20여종 이상의 싱글몰트위스키를 보유하고 전문 바텐더를 갖춘 바를 일컫는 싱글몰트위스키바는 2010년에는 불과 10개 미만이었으나, 현재 전국 250여개에 이를 정도로 빠르게 성장 중이다. 그렇다고 몰트위스키바가 모두 스피크이지 바는 아니다. 알음알음 단골만 찾는 탓에 정확한 수는 파악하기 어렵다.

기자가 다녀온 스피크이지 바

볼트+82의 진토닉과 기본으로 내놓는 안주.

볼트+82의 진토닉과 기본으로 내놓는 안주.

저녁 8시부터 영업하는 한남동 ‘스피크이지 몰타르’는 9시가 되자 바가 거의 찼다. 자리가 없어서 돌아가는 손님도 생겼다. ‘철저하게 통제되는 입구’는 바의 적정 인원을 조절하는 역할도 담당하는 듯했다. 바텐더는 파인애플, 오이, 자몽필(껍질) 레몬주스가 들어가 상큼한 칵테일 ‘아마폴라’가 이 바의 ‘시그니처(대표 메뉴)’라고 소개했다. 이탈리아어로 아름다운 여성을 일컫는다는 설명도 곁들였다. 기자와 동반한 일행은 계란노른자와 생크림이 들어간 럼 플립을 주문했다. 칵테일 가격은 각각 19000원, 커버 차지는 1인당 5천원으로 크래커를 기본 안주로 내준다. 위치는 용산구 독서당길 73-4. 한남오거리 인근 지리를 아는 사람이라면 구슬모아당구장을 찾아가는 것이 빠르다. 문의 070-4228-7268

볼트+82(Vault+82)는 1층 라운지 분위기의 바와 구두케어를 담당하는 문샤이너 부스, 2층에 스테이크하우스, 지하 1층 몰트위스키 바를 갖추고 있다. 한남동 시대를 마치고 2014년 청담동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갤러리와 협업해 내건 그림과 다채로운 위스키 컬렉션 등 인테리어에도 힘을 줬다. 한때 청담동 카페 문화의 중흥기를 이끌었던 그랜드하루에의 마룻바닥을 그대로 살리는 데에도 제법 공을 들였다고. 커버차지는 1인당 15,000원. 견과류와 크래커, 바질페스토로 구성된 기본 안주를 제공한다. 2인이 진토닉을 한 잔씩 마시고 62,000원을 지불했다. 강남구 압구정로72길 22. 문의 02-544-9234

찰스H.의 이진우 바텐더가 인기 칵테일 ‘맨해튼 플라이트’를 따르고 있다. 김영민 기자

찰스H.의 이진우 바텐더가 인기 칵테일 ‘맨해튼 플라이트’를 따르고 있다. 김영민 기자

포시즌스 호텔 서울의 찰스H.는 인근 직장인들 덕분인지 간혹 저녁 9시에 방문해도 ‘대기 손님’이 되기도 한다. 요즘은 SNS를 통해 위치를 알고 오는 손님이 많다. 때로 같은 지하 1층에 있는 뷔페레스토랑 더 마켓 키친에서 식사를 하고 나오다가 ‘벽을 뚫고 나오는’ 바 손님을 발견하고 호기심에 찾는 이들도 있다. 커버차지와 같은 개념의 테이블차지(1인당 10000원)를 내면, 웰컴 샴페인과 기본 카나페가 제공된다. 모든 칵테일은 2만원 대로 책정되어 있다. 대표적인 칵테일은 아메리칸 라이 위스키를 베이스로 한 맨해튼 플라이트. 3가지 방식으로 변주된 칵테일 3잔이 나오는 메뉴라 더 인기다. 가격은 29000원. 홍보 담당자는 뉴욕 출신의 헤드 바텐더 크리스토퍼 라우더의 뒤를 이어 2월 중 런던에서 새로운 바텐더가 올 예정이라고 귀뜸했다. 종로구 새문안로 97. 문의 02-6888-5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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