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정신 구독료’

2024.01.12 06:00 입력 2024.01.12 06:01 수정
정유라

[언어의 업데이트]‘제정신 구독료’

언제부턴가 구독료가 생활비에서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 개수도 많아졌고 가격도 올랐다. 구독 경제가 새로운 소비 모델로 떠오르면서, 이제는 ‘구독 플레이션’이라는 용어까지 나타났다. 사람들이 구독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해 소셜 데이터를 분석하니 ‘제정신’이 높은 빈도로 함께 언급된다. 값이 오르는 각종 구독료를 향해 “제정신이 아니다”라고 비꼬는 걸까 싶어 ‘구독료’와 ‘제정신’을 같이 언급한 문장을 살펴보니 ‘제정신 구독료’를 내고 있다는 트윗이 여럿 등장한다.

‘제정신 구독료’는 매달 정신건강의학과에 지불하는 비용을 뜻한다. 고정비를 의료비가 아닌 구독료로 바꿔 표현했을 뿐인데 인식의 차원이 달라진다. 건강을 위해 영양제를 꼬박꼬박 챙기는 것을 건강 구독료라 부르니 어쩐지 건강을 더 확실하게 쥘 수 있을 것 같다. 신체와 정신 건강을 위해 ‘구독’을 택한 현대인의 일상이 담긴 ‘제정신 구독료’라는 참신한 표현에서 동시대를 압축하는 방점은 어디에 있을까? 두 단어 모두 의미심장하지만 구독의 의미와 범위가 달라지고 있다는 점에서 ‘구독료’를 먼저 들여다보고 싶다.

시대의 특징을 규정짓는 구독료가 있다. 정보가 수직적으로 전달되던 시대의 신문 구독료, 콘텐츠라는 말이 모든 장르를 아우르는 시대의 콘텐츠 구독료처럼 지금의 맥락을 보여주는 구독료가 존재한다. 개인 창작물의 유료 구독은 이미 대중화되었고, 창작자와 친밀한 관계 역시 구독의 대상이 되었다. ‘아티스트와 나만의 프라이빗 메시지’라는 ‘버블’은 내가 선택한 아티스트와 채팅을 유료로 구독하는 서비스다. 구독자만 볼 수 있는 메시지가 존재하고, 가입 기간에 따라 아티스트에게 답장 가능한 글자 수가 달라진다. 사적 대화, 더 엄밀히 말하면 답장과 소통의 권리도 유료로 구독하는 시대다.

단어가 하나의 생명체라면 구독료만큼 끊임없이 동시대성을 갱신하는 생명체가 있을까? 신문, 넷플릭스, 버블, 제정신을 나란히 두고 읽어보자. 정보, 취향, 관계, 건강 (…) 구독료의 쓸모와 시대의 요구가 포개어진다. 구독 대상도 달라졌지만 태도도 달라졌다. 구독은 원래 ‘돈값’을 기준으로 서로의 필요를 채워주며 완성되는 계약이었다. 유·무형 서비스와 실질적, 감정적 효용이 값을 하리라는 기대의 계약. 이제 구독료의 가치는 돈값이 아닌 관계의 견고함, 즉 애정을 기반으로 실현된다. 애정을 담보로 한 구독은 혜택에 기반한 구독보다 끊기 어렵다.

구독의 변화는 관계의 변화다. 영원히 소유할 수 없는 임시성, 언제든 끊을 수 있는 자율성이 새로운 관계의 역학을 만든다. 갑과 을의 구분 없이 서로가 함께 노력해야 하는 긴장감이 구독으로 맺어진다. 그러고 보면 제정신 구독료는 나 자신과 더 나은 관계를 위한 사랑의 실천이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지키기 위한 용기와 의지를 ‘구독료’로 구체화하는 시대다. 다 읽지 못할 걸 알면서 매달 사던 책값, 매일 마시는 커피처럼 ‘구독료’라 이름 붙이지 않았지만, 내가 지켜내고자 하는 것들과 ‘구독’의 방식으로 관계의 끈을 잇고 있었다. 당신의 구독료는 당신이 지키고 싶은 무언가를 보여준다. 소비가 아닌 수호를 목적으로 우리가 구독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구독료’ 앞에 무엇을 올려야 할지 고민해보자. 그 고민이 나를 점검하고 지금을 읽는 시야를 확장시켜 줄 것은 분명하다.

▶정유라

[언어의 업데이트]‘제정신 구독료’


2015년부터 빅데이터로 라이프스타일과 트렌드를 분석하는 일을 해오고 있다. <넥스트밸류>(공저), <말의 트렌드>(2022)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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