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 “아픔과 희망을 함께 품은 고암, 통일의 매개가 될 수도”

2017.10.27 21:24 입력 2017.10.27 21:30 수정

미술사학자 이태호 교수와 홍성 이응노 생가

경향신문 ‘명사 70인과의 동행’ 참가자들이 지난 21일 이태호 서울산수연구소 소장과 함께 충남 홍성에 있는 화가 이응노의 생가터에 세워진 기념관을 둘러보고 있다. 홍성 | 김영민 기자 viola@kyunghyang.com

경향신문 ‘명사 70인과의 동행’ 참가자들이 지난 21일 이태호 서울산수연구소 소장과 함께 충남 홍성에 있는 화가 이응노의 생가터에 세워진 기념관을 둘러보고 있다. 홍성 | 김영민 기자 viola@kyunghyang.com

어쩌면 한 번은 맞닥뜨렸을, 아니 회피했을지 모르는 이름 이응노. 여든여섯 생을 마감하는 순간까지 창작열을 불태웠던 한국 근현대 미술사를 대표하는 세계적인 화가. 이응노는 일제강점기와 분단, 군사정권이라는 암울한 시대를 서울과 일본 도쿄, 유럽에서 지내며 수많은 걸작을 쏟아냈지만 끝내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프랑스 파리에서 눈을 감았다. 갇히고 닫히기를 거부했던 천재화가를 만나러 가는 길은 묵향처럼 진하고 묵직했다.

경향신문은 지난 21일 ‘명사 70인과의 동행’에 고암 이응노를 초대했다. 충남 홍성 이응노 생가기념관에서 천년고찰 수덕사와 수덕여관, 추사 김정희 고택으로 이어지는 여정이었다.

“고암 이응노는 피카소와 같은 천재작가입니다. 늘 새로운 것을 그리던 화가였지요. 묵죽도부터 산수화, 풍속 인물화 등 수묵화의 진면목을 보여주었고 분방한 필치로 ‘문자 추상’ ‘군무’ 시리즈와 같은 세계적인 작품을 남겼습니다.”

이날 길라잡이는 명지대 초빙교수 이태호 서울산수연구소 소장(65)이 맡았다. 홍익대를 나온 이 소장은 ‘진경산수화’ ‘풍속화’ ‘초상화’ 등 한국미술사를 연구하고 있는 미술사학자다. 국립중앙박물관·국립광주박물관 학예연구사, 전남대학교 교수 등을 지냈으며 최근 출간한 <서울 산수>를 비롯해 <조선 후기 회화의 사실정신>(1996), <조선후기 그림의 기와세>(2005), <옛 화가들은 우리땅을 어떻게 그렸나>(2011), <한국미술사의 라이벌>(2014) 등 다수 저서가 있다.

기념관 안에 전시된 이응노의 유작과 유품을 둘러보고 있는 참가자들.

기념관 안에 전시된 이응노의 유작과 유품을 둘러보고 있는 참가자들.

“이응노는 잠시도 뭔가를 하지 않으면 안되는 예술가였습니다. 손을 쉬면 병이 나는 그런 사람이었죠. 평생을 끝없이 그리고, 새기고, 만들었습니다. 격동기 시대적 아픔을 오롯이 예술 창작품으로 새겼습니다.” 서울에서 2시간여 이응노 생가기념관으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이 소장이 고암의 생애를 천천히 되짚어주었다.

고암 이응노의 예술세계에 영향을 주었던 천년고찰 수덕사.

고암 이응노의 예술세계에 영향을 주었던 천년고찰 수덕사.

1904년 충남 홍성에서 태어난 이응노는 17살 때까지 고향에서 화가의 꿈을 키우다가 19살 때 서울로 올라와 해강 김규진에게 문인화와 서예를 배웠다. 1924년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청죽’으로 입선하면서 화가의 길로 들어섰고 대나무를 잘 그리기로 유명해지면서 해강에게 ‘죽사(竹史)’라는 호를 받았다. 1935년 일본으로 건너가 근대 미술교육을 받았고 1945년 귀국 후 천년고찰 수덕사 앞에 수덕여관을 지었다. 1953년 파리로 떠난 고암은 동양화의 필묵에 현대적 감각을 입힌 한국작가로 명성을 얻었지만 군사정권 시절인 1967년 ‘동백림’, 1977년 ‘백건우·윤정희 부부’ 사건에 휘말리면서 1983년 프랑스 국적을 취득했다. 1989년 서울 호암갤러리의 초대로 대규모 기획전을 열었지만 정부의 입국금지 명령으로 고국을 향한 그리움이 물거품이 됐다. 서울 전시회 첫날 파리작업실에서 심장마비로 쓰러져 86세로 생을 마감한 고암은 파리 페르 라세즈 묘지에 잠들어 있다.

충남 홍성군 홍북면 중계리에 있는 ‘이응노의 집’은 듣던 대로 고요하고 평온했다. 너른 들판 초가 생가를 마주한 홍성의 주산 용봉산(龍鳳山·381m)은 산세는 낮았지만 바위산답게 기암괴석이 둘러쳐 있어 여느 명산에 뒤떨어지지 않아보였다. 안타까운 소식을 접한 것은 고암의 집앞 뜰에서 재배한 연잎차를 들고 기념관으로 들어서면서였다. 1950~1980년대 이응노 작품과 자료를 직접 보고 싶었지만 고암미술상 수상 작가 작품이 전시 중이었다. 이 소장은 대신 ‘이응노의 삶과 예술’을 주제로 1시간여 동안 강의를 진행했다. 고암의 젊은 시절 준수한 용모부터 노경의 해맑은 표정까지 옛 사진과 그림 한 장 한 장에 순탄치 않았던 삶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답사객들의 눈이 휘둥그레진 것은 대나무 작품사진을 만나면서였다. “난초를 저렇게 그릴 수 있다니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는 반응이었다.

“대나무가 춤을 추지요. 곧지 않고 옆으로 구불구불 휘어져 있습니다. ‘군무’ 등 인간시리즈도 여기 대나무 잎사귀 군락에서 나온 것입니다.” 금강산 그림 앞에서는 외마디 탄성이 터져나왔다. 1939년 고암이 처음 그린 금강산은 붓으로 빗질하듯 세밀하면서도 사실적이었다. 1966년 프랑스 파리에서 그린 꿈속의 ‘몽경 금강’은 단순하지만 강하고 힘이 넘쳤다. 1960년대 초 유럽에서 추상표현주의가 유행했는데 고암은 먹과 물감 외에도 천이나 한지 등 재료들을 캔버스에 붙이는 등 실험적인 작품을 만드는 데 혼을 불살랐다.

답사객의 표정이 사뭇 진지해진 것은 문자들이 춤을 추는 것 같은 ‘군무’ 시리즈를 본 뒤였다. 여기저기서 스마트폰과 카메라를 꺼내들었다.

“고암은 마지막 10년을 오로지 사람을 그리는 일에만 몰두했어요. 1980년 5월 파리에서 TV로 광주민주화운동을 지켜본 뒤 그린 ‘군무’ 시리즈를 보십시오. 서로 어울리고 뒤엉켜 춤을 추는 그림을 통해 평화와 어울림, 서로 하나가 되는 세상을 꿈꾸었지요.” 이 소장은 “1970~1980년대 고암은 기억 속에 있던 한국의 산하를 끝없이 화폭에 담아냈다”며 또 다른 작품을 소개했다. 한국의 원숭이, 닭, 병아리, 말과 사슴에 대한 기억을 먹으로 추상화시킨 작품은 독특하면서도 놀라웠다.

고암의 생애와 작품을 이론적으로 살펴봤다면 이제는 현장답사에 나서야 할 때. <이응노의 집, 이야기>라는 책을 선물로 받아든 답사객들은 이응노의 유물 전시관을 둘러본 뒤 충남 예산 ‘수덕여관’으로 향했다. 천년고찰 수덕사 앞에 있는 수덕여관은 국내 유일하게 남아 있는 초가집 여관으로 고암이 직접 집을 짓고 프랑스로 떠나기 전까지 머물렀던 공간이다.

“저기 ‘수덕여관’이라고 쓰인 간판은 고암이 직접 쓴 글씨입니다. 여기 넓적한 두 개 바위에 새겨진 추상 암각화는 아직까지 정확한 뜻을 알아내지 못했어요. 다만 문자추상체를 해독할 수 있는 단서를 주역에서 찾을 수는 있는데 주역의 64궤를 추상체로 이미지화했거든요. 암각화는 고암이 ‘동백림사건’에 휘말려 2년6개월간 옥고를 치른 뒤 파리로 돌아가기 전 잠시 머무르며 남긴 작품입니다.”

고암은 군사정권 시절인 1967년 동백림 사건으로 작곡가 윤이상 등 194명과 함께 구속되었고 1969년 사면됐다. 문득 책에서 읽었던 그의 멈출 줄 모르는 창작열정이 떠올랐다. 고암은 서울구치소에서 집필 허가를 받지 못하자 간장으로 휴지에 그림을 그렸고 대전교도소로 이감되었을 때는 교도관이 가져다준 지필묵으로 그림을 그렸다. 안양교도소에서는 밥풀을 개어 종이, 천조각, 나무 등을 활용해 오브제를 만들었다. “한국의 민족적인 추상화를 개척하려고 노력했습니다. 동양화에서 선(線), 한자나 한글에서의 선(線), 삶과 움직임에서 출발해 공간구성과의 조화로 화풍을 발전시켰지요. 한국의 민족성은 특이합니다. 소박, 깨끗, 고상하면서 세련된 율동과 기백, 이 같은 나의 민족관에서 특히 유럽을 제압하는 기백을 표현하는 것이 나의 그림입니다.”(1972년 한 일간지 인터뷰)

고암의 예술세계에 영감을 주었을 수덕사가 궁금했다. 이 소장을 따라 사찰로 오르는데 마음을 닦아야 하는 덕숭산(德崇山)을 품고 있어서 그런지 가파른 계단이 끝없이 이어졌다. 10여분을 힘겹게 오르고 나서야 하늘이 열리더니 3층 석탑이 보였다. 맑은 가을 햇살이 찰랑거리는 경내는 고즈넉했다.

“현존하는 고려시대 목조건물로는 안동 봉정사 극락전,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수덕사 대웅전 등을 꼽을 수 있습니다. 수덕사가 그중에서 가장 아름다워요. 백제의 아름다운 예술혼이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자, 대웅전을 보세요. 직사각형 맞배지붕인데 정면이 가장 예쁩니다. 고려시대 건축 중심은 배흘림기둥에 있지요. 나무 기둥이 올라가면서 좁아집니다. 고암이 말하는 세련된 율동과 기백 등 민족적인 추상화 이미지를 이곳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 소장은 “대웅전의 숨은 매력은 따로 있다”며 답사객들을 측면으로 안내했다. 대웅전의 옆모습은 예상보다 아름다웠다. 배흘림기둥의 시각적인 안정감과 지붕 아래 꽃무니 장식인 화반이 울긋불긋한 단풍과 묘한 조화를 이뤘다. 이 소장은 “이번에는 먼발치에서 대웅전을 정면으로 바라보자”고 했다. 대웅전 용마루의 끝선이 산세와 끊어지지 않고 수평선으로 이어져 소나무숲으로 낮게 내려앉았다. 이응노의 목소리가 바람을 타고 들려오는 듯했다. “자연은 다 이루어놓았어. 우리는 자연 속에서 끊임없이 배워야 해.”(1989년 한 월간지 인터뷰)

서울로 돌아오는 길 이 소장이 일정에 없던 “추사 김정희 고택에 가보지 않겠냐”고 제안했다. 답사객들이 큰 박수로 화답했다.

검고 오래된 처마들이 어깨를 맞대고 있는 고택은 멀리서 보기에도 고풍스러웠다. 너른 마당 가득 농익어가는 감과 사과를 어루만지는 햇살은 따사로웠다.

“고암은 조선후기 김정희 선생을 무척이나 존경했습니다. 추사글씨를 자주 흉내냈는데 문자추상의 근간이 되었지요.” 이 소장은 경기 북부와 충청도 지역에 퍼져 있는 ㅁ자형 한옥구조도 자세히 안내했다. 고택에는 창문 위치와 크기 하나까지 선조들의 섬세한 멋이 숨어 있었다. 측면과 뒷면, 사선으로 봐도 한옥에는 자연을 거스르지 않는 아름다움이 배어 있었다. 한 답사객이 기둥에 적힌 주련을 읽었다. “가을 물같이 맑은 문장은 티끌에 물들지 않는다.”

동행을 마치고 인사를 나누는데 이 소장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아픔과 희망을 동시에 갖고 있는 이응노는 남북통일의 매개체가 될 수 있습니다. 인간과 인간의 어울림, 세상만물의 조화와 평화가 이응노의 화두입니다.”

[명사 70인과의 동행] (63) “아픔과 희망을 함께 품은 고암, 통일의 매개가 될 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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