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76주년

“개 돼지보다 못한 죽음 당했는데 세상은 모르더라

2024.03.28 16:18

표선면 가시마을 ‘4·3길 문화해설사’

93세 오태경 할아버지가 말하는 ‘4·3’

4·3길 문화해설사로 활동하는 오태경 할아버지가 제주 서귀포시 가시리사무소 앞 마당에 설치된 안내판 앞에서 4·3길 코스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박미라 기자

4·3길 문화해설사로 활동하는 오태경 할아버지가 제주 서귀포시 가시리사무소 앞 마당에 설치된 안내판 앞에서 4·3길 코스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박미라 기자

제주 남동쪽에 위치한 중산간마을인 서귀포시 표선면 가시리. 4월 전후 이맘때면 가시마을을 관통하는 녹산로 주변은 노란 유채꽃과 벚꽃으로 장관을 이룬다. 봄의 정취 가득한 이 아름다운 마을은 76년 전 ‘제주 4·3사건’(이하 4·3)으로 주민 421명이 희생당하는 비극을 겪었다. 집은 모두 불에 타 폐허가 됐다. 가시마을은 제주시 노형동과 북촌리에 이어 세 번째로 인명피해가 컸다. 다음 달이면 4·3 사건이 발생한지 벌써 76주년이 된다.

가시마을에서 나고 자란 오태경 할아버지(93)는 18살에 4·3을 마주했다. 참혹하지만 선명한 기억을 안고 평생을 살아온 그는 “4·3에 대해 들어주는 것이 고맙다”면서 말문을 열었다.

가시마을에서는 1948년 5·10선거 당시 마을 투표소를 습격한 무장대에 의해 이장과 학교 교장이 죽는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단선·단정 반대를 외치는 무장대가 투표소를 습격하는 사건은 제주 곳곳에서 이뤄졌다.

오 할아버지는 “무장대 습격 이후부터 마을에 서북청년단이 살다시피하면서 사람들을 괴롭혔다. 육지에서 들어온 응원경찰도 가끔씩 와서 난리쳤다. 유독 악한 사람들을 만난 것 아닌가 싶을 정도로 탄압이 심했다. 매일 같이 얻어맞고 총질 당하고…. 마을 청년들이 고야동산에서 보초를 서 ‘서청이 온다’ 하면 도망쳐 숨었다가 밤에 돌아왔다”고 말했다.

4·3 당시 중산간마을은 산간지대에서 활동하는 무장대와 이를 진압하려는 군경세력인 토벌대 간 무력 충돌의 무대가 됐다. 특히 토벌대는 무장대의 근거지를 없앤다는 빌미로 1948년 11월 중순부터 약 4개월간 중산간마을을 ‘초토화’시키는 대규모 강경진압작전을 벌인다. 이 과정에서 불을 지르고 주민들을 집단으로 살상하면서 중산간마을은 말 그대로 초토화됐다. 마을의 95% 이상이 불타 없어지고 인명피해 역시 남녀노소 구분 없이 극심했다.

오 할아버지는 “11월15일 진압군이 마을에 와서 한집 건너 한집 식으로 불을 붙이더라. 그날 하루에만 30여명이 총에 맞아 죽었다. 일주일을 태우니 온 마을이 탔다”고 말했다. 마을이 모두 불 타 살 곳이 사라진 가시마을 주민들은 소개령에 따라 표선국민학교과 토산리 절간고구마 창고에 집단 수용되거나 인근 마을 또는 산으로 흩어졌다. 오 할아버지도 부모님과 함께 토산 창고에 수용됐다.

오 할아버지는 “12월 어느 참 달 좋은 밤이었는데 군인들이 토산 창고에 있는 사람들에게 향사로 모두 모이라고 했다. 토산리 마을 사람들도 향사로 모였다. 군인들이 가시 사람, 토산 사람 나눠 서라고 한 후 토산 청년 100여명을 포승줄로 줄줄이 묶어 데려가더라. 그 앞에서 달달 떨면서 봤다. 가시리 사람 3명도 끼어 있었는데 모두 표선 모래판에서 죽었다”고 말했다.

이 때 끌려간 주민들은 12월18~19일 표선 백사장(한모살)에서 총살당했다. 이후에도 표선백사장에서는 도피자 가족, 수용 중이던 소개민에 대한 학살이 끊이지 않았다. 제주4·3추가진상조사보고서는 4·3 당시 표선백사장에서는 가시리, 토산리, 세화리, 성읍리, 수망리 주민 등 234명이 희생당한 것으로 보고 있다.

12월22일에는 표선국민학교에서 수용생활을 하던 가시리 주민 76명이 표선리 버들못에서 집단총살당했다. 경찰이 주민들을 학교 운동장에 집결시킨 후 가족 중 한명이라도 없으면 도피자 가족으로 분류해 끌고 가 사살했다.

그는 “12월 그믐쯤에는 창고에서 나오라고 해서 갔더니 길 건너 밭에 대여섯 사람을 세워놓고 총을 겨눈 채 쏘면 박수 치라고 하더라. 엄마 품에서 아이가 기어나오니 아이에게도 총을 쏘았다. 참 기가 막힌 세월을 살았다”고 말했다.

오 할아버지는 우여곡절 끝에 토산 창고 수용소에 빠져나와 마을로 돌아갔다. 그의 형은 산으로 올라간 후 어디서 죽었는지조차 모르는 행방불명인 상태로 있다. 형수는 ‘내려오면 살려준다’는 말에 산에서 내려왔으나 영문도 모른 채 군법회의에서 1년형을 받고 2살 짜리 아이와 함께 전주형무소에서 징역을 살다왔다.

그는 “우리 마을 희생자는 신고 숫자로 421명이지만 가족 모두가 죽어 신고하지 못한 이들까지 합하면 500명이 넘을 것”이라면서 “마을은 1949년 5월 본동을 중심으로 재건됐다”고 말했다.

오태경 할아버지는 가시마을에서 나고 자라 18살 때 4·3을 겪었다. 2017년 개통한 표선리 가시면 4·3길의 문화해설사로 활동하며 4·3을 알리고 있다. 박미라 기자

오태경 할아버지는 가시마을에서 나고 자라 18살 때 4·3을 겪었다. 2017년 개통한 표선리 가시면 4·3길의 문화해설사로 활동하며 4·3을 알리고 있다. 박미라 기자

표선면 가시리 새가름은 4·3 때 폐허가 된 후 복구되지 못하고 잃어버린 마을로 남아있다. 잃어버린 마을 새가름 표지석. 박미라 기자

표선면 가시리 새가름은 4·3 때 폐허가 된 후 복구되지 못하고 잃어버린 마을로 남아있다. 잃어버린 마을 새가름 표지석. 박미라 기자

오 할아버지는 2017년 가시마을 4·3길이 개통하면서부터 현재까지 8년째 ‘4·3길 문화해설사’로 활동하고 있다. 2017년 5월 4·3유족회와 함께 미국을 찾아 4·3 경험을 증언하기도 했다. 내용의 참담함에 통역사와 참석자 모두 오열했다.

그는 4·3희생자유족회, 천주교 제주교구, 세계섬학회, 제주주민자치연대와 함께 미국 백악관 앞에서 집회를 열고 미 군정기에 발생한 4·3 양민학살에 대해 미국이 제대로 된 진상규명을 하고 사과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떠올리지 않으려고 해도 생각난다. 사람 죽이는 것을 개·돼지 죽이는 것보다 더 쉽게 여겼다. 제주사람은 총에 맞아 죽어도, 죽도록 맞아도, 어디 가서 굶어 죽어도 하소연할 곳 없었다. 내 갑장 6명도 인천형무소에 끌려가 돌아오지 못했다. 농촌에 있는 사람들이 무엇을 그리 잘못했다고 죽어야 했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오 할아버지는 “그런 세상이 다시는 오면 안된다는 생각에 내가 알고 있는 선에서 4·3을 알리고 있다. 제주의 세가 약해서 그런가. 그 어떤 역사보다 큰 피해와 악행을 당했는데도 세상에 알려지지 않더라. 하긴 예전에는 함부로 말하지도 못했다. 이제야 자유롭게 말한다. 억울한 4·3이 전국적으로,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 마을 속 4·3 흔적 엮은 ‘4·3길’

동광 큰넓궤 동굴 입구. 박미라 기자

동광 큰넓궤 동굴 입구. 박미라 기자
76년 전 휘몰아친 4·3의 광풍은 제주 섬 곳곳을 상처입혔다. ‘4·3길’은 마을에 새겨진 4·3의 상흔을 연결한 길이다. 다시는 반복되어서는 안될 아픈 역사의 현장을 걸으며 인권과 평화를 되새기자는 취지에서 조성됐다.

4·3길은 2015년 안덕 동광마을을 시작으로 2016년 남원 의귀·조천 북촌마을, 2017년 한림 금악·표선 가시마을, 2018년 제주 오라마을, 2022년 애월 소길마을, 제주시 아라동 등 현재까지 8곳에 조성됐다.

4·3길은 공모를 통해 선정하는 만큼 마을 주민 스스로 4·3길을 구성했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특히 마을마다 ‘4·3길 문화해설사’가 운영된다. 제주도 4·3지원과 또는 각 마을 4·3길 센터로 요청하면 4·3길 해설사와 걸으며 마을에 얽힌 4·3 이야기와 마을의 문화, 역사를 들을 수 있다. 4·3길 해설사는 4·3을 경험한 주민과 유족 등이 주로 활동하고 있다.

o 안덕 동광마을-희생자는 170여명에 달한다. 1948년 11월 중순 토벌대가 들이닥치자 마을 주민 120여명은 자연동굴인 큰넓궤에 숨어들어 생활했다. 50여일간의 피난 생활 끝에 결국 발각되고, 도망치다 붙잡힌 상당수의 주민들은 정방폭포로 끌려가 집단총살당했다. 학살 직후 시신 수습조차 허락되지 않아 유족들은 시신 없이 헛묘를 만들어야 했다. 당시 130여호가 살던 큰 마을이었던 무등이왓과 삼밧구석은 복원되지 못한 ‘잃어버린 마을’이 됐다. 큰넓궤 가는 길(6㎞)과 무등이왓 가는 길(6㎞) 등 2개 코스가 있다.

o 남원 의귀마을-1949년 1월12일 무장대가 군인들이 주둔 중인 의귀초등학교를 습격했다. 군인들은 습격받은 당일 학교에 수용 중이던 주민 60여명을 근처 밭으로 끌고 가 보복 살해했다. 시신은 수습조차 허용되지 않은 채 흙만 씌워진 채 방치됐다. 유족들이 수개월후 수습하려 했으나 구덩이에 시신들이 엉켜있어 구별할 수 없었다. 유족들은 그대로 세 개의 구덩이에 봉분을 쌓고 성묘를 했다. 이후 현의합장묘 비석을 세웠다. 마을 전체 희생자는 250여명이다. 신산모루 가는 길(7㎞), 민오름주둔소 가는 길(7㎞) 2개 코스가 있다.

o 조천 북촌마을-1949년 1월17일 너븐숭이 인근에서 군인 2명이 무장대의 습격으로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군인들은 곧바로 마을의 집을 불태우고 주민들을 북촌초등학교에 집결시킨 뒤 남녀노소 구분 없이 주변 들과 밭에서 300여명을 집단학살했다. 4·3 당시 단일사건으로는 가장 많은 인명희생이 있었다. 4·3길은 북촌 너븐숭이 4·3 기념관을 출발해 서우봉, 북촌환해장성, 낸시빌레, 당팟 등 8㎞ 길이의 코스로 구성됐다.

o 한림 금악마을-4·3으로 300여호의 가옥이 없어지고 150여명의 주민이 학살되거나 행방불명 됐다. 모슬포에 주둔하던 9연대 군인들이 새벽에 마을을 덮쳐 주민 9명을 모슬봉 자락으로 끌고 가 총살하기도 했다. 동카름, 새카름, 오소록이, 웃동네, 일동이못 등 상당수의 마을이 복구되지 못하고 잃어버린 마을이 됐다. 동가름 가는길(5㎞), 웃동네 가는길(7㎞) 2개 코스가 있다.

o 표선 가시마을-가시리사무소에서 출발해 4·3당시 주민들이 마을을 지키기 위해 보초를 섰던 고야동산, 가시마을을 세운 한천의 묘를 모셔둔 한씨방묘, 잃어버린 마을 새가름 등 11곳의 장소 7㎞를 연결했다.

o 제주 오라동-4·3사건 초반인 1948년 5월1일 오라리 연미마을에 우익청년단원들이 10여 채의 민가를 태우는 오라리 방화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으로 인해 4·3이 평화적으로 마무리할 수 있었던 진압대 김익렬 제9연대장과 무장대 김달삼간 평화협상이 깨지고 만다. 미군정은 강경진압으로 태세를 전환했고, 이후 4·3은 끝도 없는 유혈충돌로 번지게 된다. 오라동은 4·3 전개 과정에서 주민 240여명이 희생됐다. 어우늘, 해산이 마을 등은 복구되지 못한 채 잃어버린 마을이 됐다. 해산이동네 가는 길(6.5㎞), 선달벵뒤 가는 길(5.5㎞)가 있다.

o 애월 소길마을-중산간의 작은 마을이었던 소길마을의 희생자는 70여명이다. 소길 원동마을은 1948년 11월13일 새벽 근처에 무장대가 있다는 첩보를 듣고 찾아온 토벌대에 의해 4살 아이부터 60대 노인까치 무차별 총살당했다. 주민 대부분이 한날한시에 죽임을 당하면서 마을 자체가 사라지는 비극을 겪었다. 소길리 사무소에서 시작해 할망당 4·3성, 잃어버린 마을 윤남비, 원동 등 8㎞를 걷는 코스로 구성됐다.

o 제주 아라동-1948년 11월14일 아라1구의 인다마을과 아란마을이 전소됐고, 보름 후 아라2구가 초토화됐다. 희생자는 200여명에 달한다. 특히 제1코스에 포함된 박성내 하천은 1948년 12월21일 진압군이 조천읍 주민 100여명을 토벌에 갈 것이라고 속인 후 집단총살하고 불태운 장소다. 1코스는 산천단에서 시작해 문형순 서장묘, 잃어버린 마을인 죽성마을과 웃인다라 등을 거쳐 박성내까지 8.3㎞다. 2코스는 관음사부터 진지동굴, 월평 4·3성터, 영평상동 마을회관까지 9㎞에 걸쳐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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