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성의 ‘길목’에서 ‘학원가’가 되기까지…‘도시화 전이지대’ 노량진의 기록

2022.06.20 11:15

1999년 서울 동작구 노량진 학원가의 모습. 서울역사박물관제공

1999년 서울 동작구 노량진 학원가의 모습. 서울역사박물관제공

서울의 대표적인 학원가, 수도권 최대 수산시장, 개항기 첫 철도역이 위치한 서울 동작구 노량진은 도시화 전후 역사가 기록된 공간이다. 한강 남쪽의 도성 길목이었던 이곳은 도시가 확장하면서 발전하는 수도의 기반시설이 들어서며 역할이 계속 변화됐다.

서울역사박물관은 2021년 급변한 공간의 삶을 연구하는 ‘서울생활문화자료조사’를 진행해 ‘노량진, 삶의 환승지대 도시화의 전이지대’라는 이름의 보고서를 발간했다고 20일 밝혔다.

보고서에 따르면 조선시대 노량진은 사람과 물자가 도성 안팎으로 들고나는 길목이었다. 한양에 속하지 못한 채 도성 사람들이 쓸 땔감을 파는 공급처였다. 1900년 한강철교, 1917년 한강인도교(한강대교)가 생기자 나루터의 기능도 상실됐다. 그러다 1936년 경성부에 편입되고 철도와 전차가 지나면서 서울과 인천, 강북과 강남을 잇는 역할을 한다.

1910년대 노량진에 건설된 한강인도교 모습.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1910년대 노량진에 건설된 한강인도교 모습.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1915년 한강철교 전경.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1915년 한강철교 전경.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1937년 준공된 한강인도교(한강대교) 전경.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1937년 준공된 한강인도교(한강대교) 전경.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토박이 주민 박소강씨(72)는 “기차는 시내로 못 들어가고 철교, 배 다리도 없으니 모든 것을 일단 노량진에 내려야 했다”며 “3·1운동 전까지 내륙 산물은 노량진 거쳐 인천까지 갔고, 인천으로 들어온 해외 물자도 노량진을 거쳐 (남쪽으로)갔다”고 설명한다. 그는 “일반 화물은 큰길 쪽에 내리고, 석탄은 지금 수산시장 쪽에 쌓아서 노량진수산시장 쪽에 연탄공장도 많다”고 기억한다.

일제강점기 도시 확장과 함께 노량진역, 노량진 수원지 등 기반시설이 자리잡았다. 1960~1970년대에는 한강변 도로와 수원지 주변 입체 교차로 등이 설치됐다. 수원지는 원래 1910년 주요 무역항이었던 인천의 상수도 급수용으로 만들어져 관영으로 운영됐다가 1922년 인천에 무상으로 양도됐다. 관할권 서울로 이관된 것은 1948년이다.

노량진역 북쪽 한강변을 따라 1967년 첫 유료 자동차전용도로인 강변1로(현 노들로)가 건설되면서 일대는 큰 변화를 맞는다. 수원지에서 여의도 남단 강변을 따라 이어진 도로가 상습 침수를 막는 제방 역할을 하면서 한강변에 택지 2만2000평이 조성됐고, 이 자리에는 1971년 한국냉장(현 노량진수산시장)이 들어서게 된 것이다. 한강을 흙으로 덮은 뒤 시장을 짓기 전까지 철도변에 피난민촌이 생기기도 했다.

1976년 서울 동작구 노량진수산시장의 경매 모습.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1976년 서울 동작구 노량진수산시장의 경매 모습.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1975년 서울 동작구 노량진수원지 일대 모습.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1975년 서울 동작구 노량진수원지 일대 모습.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서울 동작구 노량진수산시장은 한강을 흙으로 메운 땅에 들어섰다. 왼쪽 운동장이 옛 수산시장 자리다.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서울 동작구 노량진수산시장은 한강을 흙으로 메운 땅에 들어섰다. 왼쪽 운동장이 옛 수산시장 자리다.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1977년 정부가 수도권 인구 재배치 기본 계획을 추진하며 이 지역은 ‘학원가의 상징’이 됐다. 광화문·종로 등 사대문 안에 있던 학원을 노량진·강남·용산 등 사대문 밖으로 이전했다. 1978년 재수학원인 대성을 시작으로 1979년부터 대형 종합학원과 기술학원, 정진·한샘 등 단과학원들도 노량진으로 옮겨가 1980년대에 학원가의 면모를 갖추게 됐다.

문상주 고려직업전문학교 이사장은 “한샘학원을 들어가려고 학생들이 2~3일씩 기다렸다”며 “수강증을 끊으려고 요새 아파트 청약하듯이 학부모들이 몰려왔다”고 회상했다.

노량진 학원가는 1990년대 후반 수능이 도입되고 대치동 학원가가 부상하면서 재수·단과학원이 대거 이탈했다. 외환위기가 맞물리면서 빈 공간을 공무원 학원이 대체했다. 정대열 노량진 제일서점 대표 역시 “그때 공무원 시험은 ‘노량진 아니면 안 된다’고 했다”며 “꼭대기에 고시원을 만들어도 다 차는 전성기가 있었다”고 기억한다.

서울 동작구 노량진동 만양로 좌우로 펼쳐진 노량진 고시촌의 모습.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서울 동작구 노량진동 만양로 좌우로 펼쳐진 노량진 고시촌의 모습.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그러다 2010년대 후반 대형학원들이 공무원 수험시장에 진출하면서 학원가는 다시 변화한다. 특히 인터넷 강의가 보편화되면서 노량진에 자리 잡았던 중·소형 학원들이 밀려나게 됐다. 이제 대형학원들은 강의뿐만 아니라 생활 관리에 집중하며 ‘관리형 독서실’이 등장하고 있다. 독서실과 제휴를 맺거나 직접 운영하는 방식으로 학원에서 수험생의 독서실 출입, 공부 시간, 생활 일정을 철저하게 관리해 주는 것이다. 인터넷 강의도 기본 제공한다.

조사 보고서는 서울역사박물관 홈페이지(http://museum.seoul.go.kr)에서 열람하거나 서울책방(https://store.seoul.go.kr)에서 2만5000원에 구입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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