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 블랙리스트’ 2심 파기 환송 왜?…“직권남용죄, 하급자가 의무 없는 일 했는지도 입증돼야”

2020.01.30 21:48 입력 2020.01.30 22:37 수정

김명수 대법원장을 비롯해 대법관 14명이 30일 박근혜 정권의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건 상고심 판결을 앞두고 서울 서초구 대법원 대법정 대법관석에 앉아 있다.  권호욱 선임기자

김명수 대법원장을 비롯해 대법관 14명이 30일 박근혜 정권의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건 상고심 판결을 앞두고 서울 서초구 대법원 대법정 대법관석에 앉아 있다. 권호욱 선임기자

‘직권이 무엇인가’ 초점에서
전보다 더 엄격한 기준 제시
“예술인 명단·사업 보고는
의무 없는 일로 단정 어려워”

“죄형법정주의 위반 소지 커”
일부 대법관 무죄 소수 의견

30일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내놓은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건 판결의 핵심은 형법상 직권남용죄가 성립하려면 상급 공무원의 위법·부당한 지시로 하급 공무원이 종전과 달리 법령에 위반되는 행위를 했는지를 면밀히 따져야 된다고 강조한 데 있다. 고위공직자들의 권한 남용을 처벌하는 데 주로 적용돼온 직권남용죄에 관해 이전보다 엄격한 기준을 제시한 것이다.

형법 123조는 직권남용죄에 대해 “공무원이 직권을 남용해 사람으로 하여금 의무 없는 일을 하게 하거나 사람의 권리를 방해한 때”라고 규정한다. 각각의 요건들이 맞아떨어져야 범죄로 인정·처벌할 수 있다.

국정농단 사건을 비롯해 직권남용죄가 적용된 피고인들의 재판은 “공무원이 직권을 남용해”에 주로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상급 공무원의 관점에서 직권 범위는 어디까지인지, 권한을 남용했는지 등을 주로 따졌다. 또 다른 범죄 성립 요건인 “사람으로 하여금 의무 없는 일을 하게 했는지”는 큰 공방 대상이 아니었다.

김기춘 | 조윤선

김기춘 | 조윤선

대법원은 이번 판결에서 ‘하급자가 의무 없는 일을 했는지’도 직권남용죄를 판단하는 데 중요한 지점이라는 것을 상기시켰다.

대법원은 “공무원이 한 행위가 직권남용에 해당한다고 해 그러한 이유만으로 상대방이 한 일이 ‘의무 없는 일’에 해당한다고 인정할 수는 없다”며 “의무 없는 일에 해당하는지는 직권을 남용했는지와 별도로 상대방이 그러한 일을 할 법령상 의무가 있는지를 살펴 개별적으로 판단해야 한다”고 했다. 공무원과 공공기관 임직원은 법에 의무가 명시돼 있다.

구체적으로 대법원은 상급자 지시로 인해 하급자가 하게 된 행위가 종전에 없던 이례적인 일인지, 기존 업무와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살펴야 한다고 했다. 통상적인 업무와 별로 다른 게 없다면 설령 상급자가 직권을 남용했다고 하더라도 범죄로 처벌할 수는 없다는 의미다.

대법, 블랙리스트’ 2심 파기 환송 왜?…“직권남용죄, 하급자가 의무 없는 일 했는지도 입증돼야” 이미지 크게 보기

대법원은 “행정기관의 의사결정과 집행은 다양한 준비 과정과 검토 및 다른 공무원, 부서 또는 유관기관 등과의 협조를 거쳐 이뤄진다”며 “일방이 상대방의 요청을 청취하고 자신의 의견을 밝히거나 협조하는 등 요청에 응하는 행위를 하는 것은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법령상 의무 없는 일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고 했다.

이른바 ‘좌파 예술인’에 대한 지원을 배제하라는 지시를 김기춘 전 대통령비서실장에게 받은 한국문화예술위원회·영화진흥위원회·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직원들은 법에 위원들의 독립을 보장하고 자율적으로 사업을 수행하도록 보조하는 업무를 수행할 의무가 정해져 있다.

대법원은 이러한 의무를 벗어나 블랙리스트를 운용하게 한 것은 의무 없는 일이라고 했다. 블랙리스트 운용이 용이하도록 위원을 구성하고, ‘좌파 예술인’의 불리한 점을 부각시켜 위원에게 전달하는 등의 행위가 대표적이다.

하지만 대법원은 예술위 등 직원들이 지원 신청 예술인 명단, 사업 진행 상황을 보고하는 것은 의무 없는 일이라고 확정할 수 없다고 봤다. 이 같은 행위는 김 전 실장 등의 지시로 갑자기 한 일이 아니라 매년 하던 일들의 일환일 수도 있기 때문에 2심이 더 심리를 했어야 한다는 것이다.

박상옥 대법관은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가 직권남용이 아니라는 별개의견을 냈다. 박 대법관은 “공무원의 행위가 위헌적으로 평가된다는 이유만으로 직권을 남용했다고 인정한다면 죄형법정주의에 위반될 소지가 크다”며 “모든 문화적 활동을 기계적으로 균등하게 지원해야 할 국가의 의무나 이에 대응하는 개인의 권리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다. 조희대 대법관은 문재인 대통령 취임 후 청와대가 찾아내 박영수 특별검사팀에 제출한 이른바 ‘캐비닛 문건’은 위법수집 증거라서 유죄의 근거로 사용해선 안된다는 의견을 냈다. 조 대법관은 “이러한 대통령 행위를 허용하게 되면 정치적 보복을 위해 전임 정부 인사들을 처벌하는 데 악용될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김 전 실장이 블랙리스트에 소극적인 문화체육관광부 1급 공무원 3명에게 사직을 요구한 혐의는 1·2심에서 판단이 엇갈렸지만 최종 유죄로 확정됐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나쁜 사람’으로 지목한 노태강 전 문체부 국장에 대한 사직을 요구한 김상률 전 청와대 교문수석 혐의도 유죄로 인정됐다.

추천기사

바로가기 링크 설명

화제의 추천 정보

    오늘의 인기 정보

      이 시각 포토 정보

      내 뉴스플리에 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