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 “취업규칙 불이익 변경, 노동자 동의 없으면 무효” 새 판례 선언

2023.05.11 14:41 입력 2023.05.11 18:08 수정

김명수 대법원장과 대법관들이 11일 오후 서울 서초구 대법원 대법정에서 열린 전원합의체 선고를 위해 자리에 앉아있다. 연합뉴스

김명수 대법원장과 대법관들이 11일 오후 서울 서초구 대법원 대법정에서 열린 전원합의체 선고를 위해 자리에 앉아있다. 연합뉴스

사용자가 취업규칙을 노동자에게 불리하게 바꿀 때 반드시 노동조합 또는 노동자 과반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고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판단했다. ‘사회통념상 합리성’이 있으면 노동자 동의를 받지 않아도 취업규칙을 변경할 수 있다고 했던 기존 판례를 폐기하고 새 판례를 세운 것이다. 노동조건 결정에 있어서 노사 대등의 원칙을 재확인한 판결이다.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11일 A씨 등이 현대자동차를 상대로 낸 부당이득금 반환 청구소송 상고심에서 원심 판결을 파기하고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다.

현대차는 2004년 일반직 과장 이상·연구직 선임연구원 이상·생산직 기장 이상 직위자에게 적용되는 ‘간부사원 취업규칙’을 만들어 시행했다. 주 5일제 도입을 명분으로 기존 취업규칙에 있던 월차 유급휴가 조항을 삭제하고 연차휴가 일수를 25일로 제한하는 내용이었다. 현대차는 새 취업규칙에 대해 당시 간부사원 중 89% 인원의 동의서를 받았고 노조 동의는 받지 않았다.

원고들은 간부사원 취업규칙이 기존보다 노동자에게 불리해졌는데, 회사가 노동자 동의를 제대로 받지 않아 무효라면서 현대차가 미지급 연월차 휴가수당을 지급하라고 주장했다. 특히 간부사원 취업규칙은 당시 간부사원 뿐 아니라 장차 간부사원이 될 대리 이하 직원들에게도 막대한 영향을 미치므로 취업규칙 변경에는 전체 노동자 과반수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근로기준법 제94조1항은 사용자가 취업규칙을 노동자에게 불리하게 변경하는 경우 노동조합 또는 노동자 과반수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고 규정한다. 이른바 ‘집단적 동의권’이다. 하지만 기존에 대법원은 사용자가 일방적으로 취업규칙을 변경해 노동자의 권리·이익을 박탈하는 것은 원칙적으로 안 된다면서도, ‘사회통념상 합리성’이 있으면 유효하다는 입장이었다. 근로기준법 규정이 있음에도 대법원이 판례로 취업규칙 불이익 변경 요건의 예외를 허용했던 것이다. 현대차는 기존 판례에 근거해 간부사원 취업규칙은 ‘사회통념상 합리성’이 있으므로 유효하다고 주장했다.

김명수 대법원장과 대법관들이 11일 오후 서울 서초구 대법원 대법정에서 열린 전원합의체 선고를 위해 자리에 앉아있다. 연합뉴스

김명수 대법원장과 대법관들이 11일 오후 서울 서초구 대법원 대법정에서 열린 전원합의체 선고를 위해 자리에 앉아있다. 연합뉴스

이번에 대법원은 대법관 7명의 다수의견으로 사용자가 취업규칙을 노동자에게 불리하게 변경하면서 노동자의 집단적 동의를 받지 못했다면 그 취업규칙은 원칙적으로 무효라고 밝혔다. ‘사회통념상 합리성’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취업규칙이 유효하다고 인정할 수는 없다고 했다.

대법원은 “취업규칙의 불이익 변경에 대한 근로자의 집단적 동의권은 근로조건의 노사 대등 결정 원칙을 실현하는 중요한 절차적 권리”라며 “변경되는 취업규칙 내용의 타당성이나 합리성으로 대체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판시했다. 기존 판례가 “근로조건의 기준은 인간의 존엄성을 보장하도록 법률로 정한다”는 헌법 제32조3항, “근로조건은 근로자와 사용자가 동등한 지위에서 자유의사에 따라 결정해야 한다”는 근로기준법 제4조 취지에 반한다는 것이다.

대법원은 또 강행규정인 근로기준법 제94조1항이 취업규칙 불이익 변경에 대한 노동자의 집단적 동의권을 명시해 이를 반드시 지켜야 하는 반면, 기존 판례의 ‘사회통념상 합리성’ 개념은 모호해 법적 불안정성이 크다고 지적했다. 대법원은 “근로조건의 유연한 조정은 사용자에 의한 일방적 취업규칙 변경을 승인함으로써가 아니라, 단체교섭이나 근로자의 이해를 구하는 사용자의 설득과 노력을 통해 이뤄져야 한다”고 했다. 사용자가 일방적으로 취업규칙 변경을 밀어붙이면 안 된다는 의미이다.

이흥구·오경미 대법관은 보충의견을 통해 “근로자에게 근로현장은 삶의 토대이고, 취업규칙에서 정하는 근로조건은 이를 구성하는 뼈대”라며 “근로자가 근로조건을 설정, 변경하는 과정에 주체적으로 참여하는 것이 인간의 존엄성과 자율성의 보장”이라고 덧붙였다.

다만 대법원은 노동자 측이 집단적 동의권을 남용했는지는 별도로 따져봐야 한다고 했다. 취업규칙 변경의 필요성이 객관적으로 명백하고 사용자 측이 진지하게 설득·노력을 했음에도 노동자 측이 합리적 근거 없이 취업규칙 변경에 반대한다면 이는 집단적 동의권의 ‘남용’이기 때문에 사용자 손을 들어줄 수도 있다고 했다. 대법원은 이 같은 새 판례 법리에 따라 현대차 사건을 다시 심리하라고 했다.

대법원은 “근로자의 집단적 동의권이 갖는 절차적 중요성을 강조해 사용자로서는 근로자의 집단적 동의를 구하고자 하는 진지한 설득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점을 확인했다”고 이번 판결 의미를 설명했다. 취업규칙에는 임금피크제, 퇴직금, 연차수당 등 여러 노동조건 관련 규정이 담겨있어 이번 판례는 향후 다른 사업장의 노사관계에도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대법관 6명은 기존 판례를 유지해야 한다는 별개의견을 냈다. 이들은 “사회통념상 합리성 법리는 대법원이 오랜 기간 그 타당성을 인정해 적용한 것으로 현재에도 여전히 타당하다”고 했다.

한국경영자총협회는 이날 입장을 내고 “노동법의 경직성을 완화하는 법리로 자리잡았던 기존 판례를 부인한 대법원에 유감”이라며 “법 제도가 신속히 개선돼야 한다”고 밝혔다. 2016년 박근혜 정부는 대법원의 기존 판례를 토대로 요건 완화를 담은 ‘양대지침’을 추진하고 공공기관의 취업규칙 변경으로 성과연봉제를 도입해 노동계와 큰 갈등을 빚었다.

한국노총은 논평을 내고 “대법원이 사회통념상 합리성 이론을 폐기하고 새 판례를 세운 것을 환영한다”며 “이번 판결을 계기로 대항력이 약한 개별 노동자를 움직여 노조를 무력화하고 근로조건을 개악하려는 일체의 시도가 종식되기를 희망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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