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답은 ‘의료 공공성’ 강화…실행 의지·예산이 관건

2018.04.03 06:00 입력 2018.04.03 06:01 수정

“거점병원 기반, 지역·의료·복지 연계한 플랫폼 만들자”

전문가 제안 - 권용진 서울대병원 공공보건의료사업단장

[우리는 충분히 ‘돌봄’ 받고 있는가](9)답은 ‘의료 공공성’ 강화…실행 의지·예산이 관건

한국에서 의료기관의 문턱은 낮은 편이다. 빈민이든, 재벌이든 똑같은 병원에서 진료를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여기까지가 전부다. ‘돌봄’은 공평하지 않다.

예기치 않게 찾아온 질병과 사고는 평범한 가정을 순식간에 파탄으로 내몬다. 평탄한 청·장년기를 보냈더라도 노년에 부부 중 한 명이라도 중병에 걸리면 노후는 지옥으로 변한다.

치매에 걸린 노인과 그 가족, 중증질환을 앓는 아이와 평생 그 짐을 홀로 짊어져야 할 부모, 진료실 안 또는 수술대 위에서 장애인이 맞닥뜨려야 하는 공포, 갈 곳을 찾지 못하는 정신질환자, 돈이 없어 치료받지 못하는 사람들…. 경향신문은 지난달부터 6차례에 걸쳐 한국 사회가 돌보지 못하고 있는 사각지대 속 약자의 이야기를 들었다. 한국보다 한발 앞선 일본과 대만도 찾았다. 결론은 한국의 ‘돌봄 사각지대’는 최근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대부분이 돈이 없다는 이유로, 다른 곳이 더 급하다는 이유로 방치됐다.

당사자가 되기 전까지는 아무도 그 고통을 모른다. 중증질환을 앓고 있는 9세 태경이의 어머니 강혜련씨는 지난달 12일 청와대 청원사이트에 ‘의료진이 되어버린 부모’라는 글을 올렸다. “중증환아들에 대한 산정특례를 확대해 달라”는 것이 핵심이었다. 2일까지 이 청원에 동의한 사람은 불과 1600여명. 중증환아들과 부모는 목소리를 높일 수 있는 여건도 안된다.

다행히 변화의 조짐이 보인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해 직접 발표한 ‘치매국가책임제’는 추진단계부터 큰 호응을 받고 있다. 한국 사회의 고령화가 날로 심각해지면서 치매 문제에서 더 이상 당사자가 따로 있지 않다는 공감대가 생겼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돌봄 사각지대’를 없애기 위해서는 ‘의료공공성’을 더 강화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권용진 서울대병원 공공보건의료사업단장은 “사회 전체의 연대의식을 어떻게 높일지 깊게 고민하고, 건강보험 등의 제도에 (이런 정책을) 하나씩 끼워넣어야 한다”고 말했다. 30년 이상 공공의료기관에서 일해온 박찬병 서울시 서북병원장은 “현실 근거를 바탕으로 한 정책을 펼쳐야 한다”고 지적했다.

문옥륜 서울대 보건대학원 명예교수는 “민간 부문이 수행하는 공공의료에 국가가 더 적극적으로 보상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김창엽 시민건강증진연구소장은 “병원의 의미를 더 넓게 생각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미 답은 나왔다. 실행 의지와 돈(예산)에 달려 있을 뿐이다.

‘재난적 의료비’란 말이 있다. 정부가 쓰는 공식 용어다. 중증질환 등으로 개인이 감당할 수 없는 의료비가 청구돼 가계가 파산지경에 이를 때 쓰는 말이다. 평범한 사람들에게 중증질환이나 사고는 재난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이런 불행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더 나아가 의료복지 ‘사각지대’에 빠진 개인들에게 정부는 어떤 대책을 내놓아야 할까.

정답에 가장 가까운 해법은 ‘의료공공성 강화’다. 국공립 의료기관에만 국한하지 말고 나라 전체 의료시스템이 복지와 맞물려 돌아가야 한다. 의료공공성 강화 방안을 찾아 실행하고 있는 권용진 서울대병원 공공보건의료사업단장을 지난달 29일 만났다. 권 단장은 “커뮤니티(지역사회)에서 의료와 복지를 연계할 수 있는 플랫폼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했다.

- 먼저 용어정리부터 해야겠다. ‘공공의료’가 아니라 ‘의료공공성’이라고 해야 하는 이유가 뭔가.

“공공의료라는 말이 한국에서 사용된 역사를 보면 보건소나 보건지소가 만들어질 즈음에 국가의 책임을 강하게 표현하는 말로 쓰였다. 그 다음에 민간 인프라가 너무 커지면서 ‘민간의료’의 반대 개념으로 공공의료라는 말이 사용됐고, ‘공공보건의료에 관한 법률’이 만들어진 뒤에는 아예 행정용어가 됐다. 현재 법률적 정의를 보면 영어의 ‘퍼블릭 헬스(Public Health)’, 예전에는 ‘공중보건’으로 번역하던 개념을 가져다가 공공의료의 정의로 사용하고 있다. 사실 공중보건이란 말은 의료서비스로 해결하지 못하는 많은 것들을 통칭한다. 의료서비스는 환자 한 명 한 명을 치료하는 서비스이고, 공중보건은 건강에 관련된 모든 일을 뜻한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개념이 혼재돼 있다. 공공의료를 영어로 어떻게 번역할 것인가 보면 마땅한 용어가 없을 정도다. 현 단계, 한국 사회에서 공공의료가 가지는 의미는 국공립 의료기관이나 보건소의 역할이 아니라 의료시스템 전체가 좋아지는 것이다. 따라서 ‘의료공공성 강화’로 표현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

- 몸 담고 있는 팀 이름도 ‘공공보건의료사업단’이다.

“공공보건의료사업단은 정부의 카운터파트로 존재한다. 공공의료에 관한 법률이 있고, 국립대병원이다 보니 그런 이름을 써야 했다. 우리 사업단도 지난해에 서울대병원 전체에 보고하는 과정에서 ‘공공의료는 사업단이 아니라 병원 전체가 하는 일’로 정리했다. 모든 의사, 모든 조직이 의료공공성을 높이기 위해 많은 일을 하는 중에 우리는 기획하고 도와주는 조직일 뿐이라고 개념을 정했다.”

- 그럼 사업단은 어떤 일을 하나.

“크게 두 가지 분야로 일을 한다. 하나는 사업팀이고, 다른 하나는 정책팀이다. 정책팀은 정부의 보건의료정책, 보건환경정책 등을 함께 연구한다. 미세먼지를 담당하는 사람도 있다. 건강과 관련된 정부 정책을 연구하고 제안도 한다. 사업팀은 이주노동자나 장애인 등 소외되는 사람들을 돌본다. 관련 인력을 양성하는 교육도 담당한다. 대학원에 ‘공공보건의료 특론’이란 과목이 있다.”

- 한국은 ‘건강보험 당연지정제’로 모든 의료기관에서 누구나 치료를 받을 수 있다. 보건소가 필요 없다는 말도 나온다. 그럼에도 ‘공공성 강화’가 필요한 이유는.

“의료 영역에서 공공성의 핵심은 차별 없이 비슷한 의료혜택을 제공하는 것이다. 먼저 공급정책으로는 병·의원 등 인프라를 만들어야 한다. 재정정책은 사회보험으로 건강보험을 운영하는 것이다. 처음에 가장 큰 문제는 공급부족이었다. 그래서 민간 중심으로 인프라를 깔았다. 이후 일반적 공급은 충분해졌다. 그러나 지역별로는 여전히 의료취약지가 있다. 반드시 제공해야 하는 응급외상진료 등을 못하는 곳이다. 또 건강보험 초창기에 경증질환 중심으로 운영하다 보니 아직도 중증질환은 보장이 안되는 문제가 생겼다. ‘돈 없는 사람’ ‘취약지역 사는 사람’ ‘중증질환 걸린 사람’ 등은 국가가 가계파탄 위기 없이 서비스를 받도록 해줘야 한다. 아직 제도적으로 해결하지 못한 구멍이 있고, 그 구멍을 메우는 것이 의료공공성 강화다.”

- 시장에서 해결하지 못하는 ‘구멍’들은 국가가 국립의료기관 등을 지어서 해결해야 한다는 의미인가.

“현 단계에서는 국가가 어느 정도 인프라를 만들어줘야 한다. 민간이 하지 않는, 할 수 없는 분야가 있다. 예전에는 취약지에 민간병원을 만들어 운영하게 하고 공중보건의도 보냈는데, 지원을 해줘도 도산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곳에는 국가가 거점병원을 지어 운영하는 것이 맞다고 본다. 또 건강보험의 보장성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세금을 집어넣는 방식도 고려해야 한다. 현재도 건강보험에 세금을 넣기는 하지만, 의무가 아니라 건강보험 재정안정화 목적으로 넣고 있다. 재원 역시 건강증진기금에서 나가기 때문에 조세 성격과 다르다. 조세 방식으로 보험재정에 돈이 들어가면 단순하게 보험료 사용만 들여다보는 것이 아니라 정부가 큰 틀에서 재정운용을 할 수 있다. 사실 취약계층이나 소외계층 문제는 어느 나라도 제도적으로 완벽하게 해결하지 못했다. 서비스를 다양하게 개발하고, 지역 사회 안에서 의료와 복지가 연계되도록 해야 한다.”

- 복지부도 최근 커뮤니티 케어(지역사회 돌봄)를 본격 추진하고 있다. 의료공공성과 연계시킬 대목이 많은 것 같다.

“의료 형태도 변하고 있다. 사람이 아픈 것은 똑같지만 질병구조에 맞게 대책이 세워져야 한다는 의미다. 예전에는 아프면 병원 가서 수술하고 약 먹으면 끝이었다. ‘만성질환 시대’에는 병원도 가야 하고 생활관리도 해야 한다. 정부가 평소에도 사람들이 건강관리를 하게 해줘야 한다는 것이다. 일단 본인 스스로가 관리를 해야 하는데, 그러면 병원뿐만 아니라 직장과 학교의 시스템도 중요하다. 또 이 사람들이 퇴근·하교하고 나면 생활하는 지역사회의 인프라가 필요하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돈을 주는 것이 복지가 아니다. 건강하고 재미있는 삶을 지향해야 한다. 이제 의료와 복지가 맞닿는 부분이 생겼고, 이를 연계하는 것이 세계적인 추세다. 그러나 아직까지 이런 제도적 기반이 없다. 의료와 복지 사이에 제도적 장벽도 엄청 높다. 의료서비스는 전국에 인프라가 갖춰져 있고, 국민이 찾아가서 받는 형태다. 복지는 내 주거지에서 신청해 받는 서비스다. 이 두 가지 제도를 연결하는 것이 쉽지 않다. 복지부 커뮤니티 케어 추진단에 상당한 기대를 갖고 있지만 이들이 일을 제도적으로 할 수 있도록 해주는 주체가 없어 보인다. 의료 쪽에 지역의료과가 생겨야 하고, 누군가가 커뮤니티 케어를 어떻게 할지 계속 들여다보고 연구해야 한다.”

- 경향신문은 치매로 시작해서 소아중증질환, 응급의료, 중증외상, 정신질환, 의료복지 연계 등 여러 사각지대를 최근 기획기사로 조명했다. 이 가운데 가장 시급한 곳은 어디인가.

“의료복지 연계체계라고 생각한다. 플랫폼을 만들자는 것인데, 잘 만들어지면 소아중증질환이든 치매든 그 안에서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다. 지역사회에 플랫폼을 만들고, 그 안에 들어오는 다양한 문제를 해결하도록 하는 것이다. 중증질환에 걸린 어린이가 큰 병원에 입원했을 때는 별 문제가 없다. 집으로 돌아갔을 때가 문제다. 이를 지역사회 안에서 방문의료서비스 등으로 해결해야 한다. 치매도 마찬가지다. 지역사회 안에 ‘데이케어 센터’나 ‘경로당 활성화’ 등의 인프라가 있으면 덜 힘들어질 것이다. 이런 의료와 복지의 연계는 사회복지사뿐만 아니라 병원 내 인력도 할 수 있다. 큰 병원에는 사회복지사와 의사, 간호사, 영양사 등이 모두 있다. 이들을 활용해 보건소와 함께 연결망을 만들 수 있다. 하나를 더 하자면 의외로 응급외상 시스템이 문제다. 복지는 지방분권화가 돼있지만 의료는 분권화돼 있지 않다. 중앙이 지방에 어느 정도는 권한을 줘야 하는데 모두 중앙이 잡고 있다. 권역외상센터도 중앙이 지정하고, 도청 응급의료 직원도 국립중앙의료원에서 파견한다. 간단하게 말하면 응급외상은 ‘상급종합병원에 얼마나 빨리 도달하느냐’가 관건인데, 이건 지역 상황을 잘 알고 있는 시·도지사가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응급외상 문제가 최우선으로 분권화되면 다른 시스템도 분권화될 것이다. 중앙은 컨트롤타워를 만들어 배분만 잘해주면 된다. 초기에는 중앙이 모든 권한을 쥐고 있는 것이 효과적이었지만 이제는 그런 시대가 지났다.”

- 사실 의사와 병원은 대부분 민간인이고 민간기관이다. 영리를 추구하는 것이 당연하다. 이들에게 공공성을 강제할 수 있나.

“ ‘공공의료’란 말을 쓰지 말라고 한 이유 중 하나가 이런 것이다. 사람들이 ‘국공립 의료기관만 공공의료를 한다’고 착각하기 쉽다. ‘의료와 윤리의 4대 원리’란 것이 있다. 하나가 ‘선행의 원리’다. 의료행위는 기본적으로 아픈 사람을 고쳐주는 선행이다. ‘의료 공급자들은 선행을 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는 말이다. 동네의원은 다 개인사업자이고 영리추구를 하지만, 그럼에도 의사는 아픈 사람을 고치려고 일한다. 사명감이 있는 직업인이다. 이걸 신뢰해줘야 한다. 그걸 포기한다면 의사를 하지 말아야 한다.”

- 공공성 강화를 하려면 당연히 재원 문제가 나오고 증세로 이어진다. 상대적으로 혜택은 적게 받고, 부담은 더 크게 져야 하는 청년층은 반발할 수밖에 없다. 어떤 논리로 이들을 설득할 수 있을까.

“프랑스는 장학금에서도 사회보험료를 걷는다. 액수는 미미하지만 연대의식을 주는 것이다. 또 거기에는 ‘내가 이 돈을 막 쓰면 언젠가는 내가 돈을 더 내야 한다’는 전제도 깔려 있다. 반면 한국에서는 의료보험이 사회보험이지만 가입자들의 연대의식을 별로 강조하지 않는다. 이 방향을 바꿔야 한다. 가입자들의 책임의식과 연대의식을 강화하는 프로그램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공급자는 수익만 챙기려 할 것이고, 시민들도 쓰려고만 할 것이다. 또 건강한 가입자들은 돈을 내지 않으려고 할 것이다. 지금이라도 사회 전체의 연대의식을 어떻게 높일지 깊게 고민하고, 제도에 하나씩 끼워넣어야 한다.”

<시리즈 끝>

■특별취재팀

박효순·홍진수·노정연·이유진 기자


■공동기획

서울대병원 공공보건의료사업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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