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비율, 파견·비정규직으로 채우고 관리자 자리는 결국 남성 몫

2013.06.06 06:00
특별취재팀

‘적극적 고용개선조치 시행계획서’ 제출 업체 분석

2012년 적극적 고용개선조치(AA) 시행계획서 제출기업 중 여성근로자 비율에 비해 여성관리자 비율이 현저히 낮은 업체 출처 : 한정애 민주당 의원, 고용노동부

‘98.5 대 1.5’. 2011년 현재 한국 100대 기업에 포진한 남녀 임원비율이다.

여성시대가 된 지 오래라는 한국사회에서 기업 고위직의 성비는 왜 이렇게 차이가 나는 걸까. 기업들은 여성 관리자를 늘리기 위해 진정한 노력을 하고 있는 것일까.

경향신문 여성 일자리 특별취재팀은 5일 민주당 한정애 의원이 공개한 ‘2012년 적극적 고용개선조치(AA) 시행계획서 제출업체’ 중 여성노동자 비율(20% 이상)은 높지만 여성관리자 비율(4% 이하)이 낮은 기업(직원 1500명 이상) 36곳을 선정해 전화인터뷰를 시도했다.

적극적 고용개선조치는 사업장의 여성노동자 비율과 여성 관리직 비율을 높이기 위해 2006년 도입됐다. 상시노동자 50인 이상 공공기관과 500인 이상 민간기업은 매년 여성노동자 비율 및 여성 관리직 비율을 고용노동부에 제출한다. 업종 평균의 60%에 못미치는 수준미달 사업체들은 여성노동자·관리직 비율을 높이기 위한 시행계획서를 별도로 작성해 제출해야 한다. 일종의 반성문인 셈이다.

분석결과 여성 노동자 수가 많은 기업이라도 여성의 대다수는 하위직에 분포해 있었다. 파견직, 비정규직 여성까지 상시 노동자로 표기해 여성노동자 비율을 50% 이상으로 유지한 기업도 다수였다.

기업들은 여성 고위직이 적은 것에 대해 인재풀 부족에서 기인한 것이며 시간이 지나면 해결될 것으로 막연히 여기고 있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기업들이 사내에서 여성의 능력을 제대로 평가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하고, 기업문화 변화, 육아휴직 확대, 근로시간 축소 등 적극적인 방안을 마련하지 않으면 여성관리자가 늘어나지 못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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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산·파견·비정규직으로 숫자 늘리기

여성노동자 비율이 높은 기업의 상당수 여성들은 생산직, 파견직, 비정규직에 분포해 있다.

닭고기 전문업체인 하림은 2012년 전체 노동자 1888명 중 여성이 994명이라고 밝혔다. 이중 900여명은 육가공 공장의 생산라인에서 근무하는 40~50대 여성이다. 여성노동자 비율은 52%에 이르지만 사실상 대다수가 단순노무직에 종사하는 셈이다. 인사권을 가진 팀장급 직원은 129명이지만 이 중 여성은 1명뿐이다. 고위직 관리자 23명 중에 여성은 아무도 없다.

식품업체 오뚜기는 전체 직원 3265명 중 여성이 2330명으로 여직원의 비율이 70%를 넘는다. 대부분 판매직원이다. 직급이 높아질수록 여성의 비율은 현저히 떨어진다. 연차가 낮은 주임급 직원(총 450명)에서 여성은 100명으로 여성 비율이 22%로 낮아진다. 관리자급 175명 중 여성은 2명(차장 1명, 상무 1명)에 불과하다.

비정규직과 파견직원을 상시노동자에 포함시킨 업체들은 여성노동자 비율에서는 업계 평균 이상으로 나타났지만 여성관리자 비율은 현저히 낮았다. 낮은 질의 일자리인 비정규직과 파견직을 포함시키는 것은 질 좋은 여성일자리를 늘리기 위해 도입한 AA제도의 취지와 역행한다. 한국마사회는 직원 8676명 중 여성이 5632명으로 여성 노동자 비율이 64.91%에 이른다. 여기에는 비정규직과 시간제 노동자들이 포함돼 있다. 마권을 발매하는 비정규직과 시간제 여성 노동자 5500여명을 포함시켰다. 정규직 직원 중에서 여성 비율은 13% 안팎에 불과하다. 고위관리자 149명 중 여성은 3명(2.01%)뿐이다.

롯데쇼핑 롯데슈퍼사업본부는 매장에서 판매를 담당하는 4000여명의 비정규직 주부사원을 상시노동자로 포함시켰다. 비정규직을 제외한 정규직 2111명 중 여성은 11.8%다. 현장 판매사원은 여성이지만 관리자는 대부분 남성이다. 특히 롯데슈퍼 500개 점포의 점장은 모두 남성이다.

건물 청소·주차·경비 등 시설관리를 업으로 하는 업체들도 여성노동자 수는 많았지만 여성관리자 비율은 1%를 밑돌았다. 우체국시설관리지원단은 전체 노동자 2414명 중에 1222명이 여성이지만 청소를 담당하는 고령 여성이 대부분이다. 현장인력을 뺀 본사 직원은 40명으로 여직원은 7명에 불과했다. 시설관리업을 하는 성원개발 역시 전체 노동자 3560명 중 여성이 1301명에 달했지만 본사 인력을 제외하고는 모두 미화직이다. 전체 관리자 153명 중 여성은 2명뿐이다. 성원개발 관계자는 “수년간 경력을 쌓고 본사근무를 할 수 있는 여성 인력이 드물다. 용역인력은 근무연수가 1~2년에 불과하다. 관리자로 활용할 수 있는 여성인력을 확보하겠다고는 밝혔지만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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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력풀 구축 미비, 여성에 책임 전가

여성관리자가 극히 드문 것은 관리자급으로 승진이 용이한 정규직 공채에 남성만을 채용해 왔기 때문이다. 마사회는 1982년부터 공채를 시작했지만 당시에는 남성만 뽑았다. 마사회 관계자는 “현재 고용차별은 전혀 없지만 당시에는 군 가산점이 있어 남성에게 유리했고, 경마산업 특성상 고객들을 응대해야 하는 일이 많아 남성을 선호했다”고 밝혔다.

기업들은 관리자로 채용할 여성들의 인력 자체가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국민체육진흥공단 관계자는 “90년대 통틀어 5명의 여성을 채용했고 2000년 이후에서야 본격적으로 여성인력을 확대했다. 경력있는 여성 관리자풀 자체가 전체적으로 부족하다”고 말했다. 삼성 에버랜드도 “90년대 들어서야 대규모의 여성인력 공개채용이 시작됐다. 이들이 관리자로 성장하기에는 시간이 부족한 상황”이라고 밝혔다.

업무강도 및 가사문제, 남성에게 특화된 업무가 여성관리자가 성장하지 못하는 가장 큰 원인이라고 지적한 업체도 있었다. 편의점 ‘CU’를 운영하는 보광그룹 산하 BGF리테일은 “24시 편의점이다보니 야간에 사건이 발생하는 경우가 잦고, 점포를 관리하고 점주들의 애로사항을 해결하는 일이 힘들다. 이동하는 일도 많아서 여성들이 초기에 그만두는 경우가 많았다”고 말했다. LG이노텍은 “여성들을 구조적으로 진급을 못하게 해서 발생한 문제라기보다는 여성 스스로 가사문제 때문에 회사를 그만두는 경우가 많았다”고 밝혔다.

■ 여성관리자 증가가 시간문제?

상당수 기업들은 여성관리자 부족문제가 시간문제에 불과하다고 내다봤다. 금감원 관계자는 “입사시험을 통해 남녀가 공정하게 들어온다. 지금처럼 차별없이 신규 채용을 하면 여성관리자가 적은 문제는 해소가 된다”고 말했다. 롯데슈퍼사업본부는 “대졸 공채에서 거의 반반씩 뽑는다. 덕분에 작년에 3명이던 관리자가 올해 7명이 됐다. 내년에는 또 늘어난다. (여성관리자 문제는) 시간이 흐르면 자연스럽게 해결될 것”이라고 말했다.

하나대투증권 관계자는 “승진할 때 여성인력을 확대하고 있다. 올해 여성이 2명 더 승진해 총 관리자 비율이 1.97%로 올랐다”며 “이런 추세라면 4~5년 후에는 여성관리자 비율이 5% 정도로 늘어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림 관계자는 “4~5년 전부터 여성 과장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여성 인력을 발굴하고 승진을 확대할 것”이라고 밝혔다.

LG디스플레이 관계자는 “이미 출산휴가, 육아휴직은 자유롭게 쓰고 어린이집도 사내에 있어 (사내복지가) 잘돼 있다”며 “여성 관리자를 별도로 늘리기 위한 노력은 하지 않는다. 남자 직원에게 오히려 역차별이 된다. 진급 자체는 역량 중심으로 한다”고 말했다.

업체들은 제각각 여성비율을 높이기 위해 모성보호차원의 제도를 도입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들은 “육아휴직제도도 있고 기업문화가 조금씩 바뀌고 있다(BGF리테일)” “자율 출퇴근제를 도입하고 승진에서도 업적과 능력에 기반을 둔 인사제도를 운영하고 있다(삼성에버랜드)” “배우자 유급휴가를 확대 시행하고 탄력근무제를 도입했다(LG이노텍)”고 밝혔다.

금재호 한국노동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모성보호제도만 도입했을 뿐 실질적으로 돼있지 않은 경우도 많다”고 말했다. 그는 “여성을 많이 채용한다고 해서 여성관리자가 늘어난다고 보는 것은 안일한 생각”이라며 “일반적인 남성중심적인 시각으로 여성을 평가하다보면 능력있는 여성들이 저평가되는 경우가 많다. 여성의 능력을 제대로 판단하려는 노력이 선행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 특별취재팀 전병역(산업부)·김재중(정책사회부)·남지원(사회부)·이혜인(전국사회부)·이재덕(경제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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