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12) 일과 가정 모두를 허하라

2013.06.14 06:00 입력 2013.06.14 10:07 수정
특별취재팀

출근 늦추고, 집에서 일하고… 유연근무만 가능해도 육아 짐 덜어

국내외 기업들은 자녀를 가진 여성들이 더 마음 편히 일하면서 능력을 발휘하게끔 노력하고 있다.

대표적인 게 야근 등 노동시간 줄이기나 시차출퇴근 같은 유연근무제 도입, 남성 위주 기업문화 개선 등이다. 한동안 내로라하는 다국적 기업들의 전유물 같던 이런 제도를 국내 기업들도 상당 부분 따라하고 있다. 정부도 공공부문을 필두로 유연근무제를 확대하려고 노력 중이다.

다만 아직 다수 기업이 형식은 주입했지만 내용적으로 갈 길은 멀어 보인다. 결국 여성인력을 왜 채용하고 키워야 하는지 충분한 고민이 부족해 보이거나 눈앞에 사업성을 계산한 행동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또 이런 제도의 이면에는 여성이 더 편히 일하면서도 가사에 대한 짐을 계속 더 지고 가길 바라는 판단이 깔려 있다.

[왜 지금 ‘여성 일자리’인가]1부 (12) 일과 가정 모두를 허하라

가족친화기업으로 잘 알려진 화학업체 듀폰코리아의 함성화 차장(37)은 2년6개월 넘게 집에서 일하고 있다. 회사에 전혀 안 나가는 것은 아니다. 함씨는 “집에서만 일해도 지장은 없지만 직원들과의 관계에 문제가 있을 수 있어 수요일은 오전 9시~오후 6시 회사에 나가 일한다”고 말했다.

재택근무도 오전 9시에 일을 시작하면 오후 6시에 끝나는 게 원칙이다. 점심시간은 12~1시다. 따로 확인은 안 하지만 e메일로 실시간으로 소통하고, 휴대폰과 회사 전화를 연결시켜놓았다. 그는 “사무실에서는 전화를 못 받아도 거리낌 없는데 집에서는 회사보다 부담감이 큰 것은 사실”이라고 말했다.

함씨가 재택근무를 택한 이유는 근무 특성과 아이(초등 5년) 때문이다. 그는 “업무상 회사에 나가도 국내보다는 해외팀들과 일을 많이 하다보니 시차 문제가 많다”며 “오전 8~9시에 해외팀과 회의를 하려면 출근을 더 일찍 해야 하고 밤늦게 회의도 잦아 재택근무가 낫다”고 말했다. 아들이 어린이집에 다닐 때는 출근시간을 늦추는 시차출퇴근제도 썼다.

아이가 초등학교에 가면서 출근 늦추기만으로는 힘들어졌다. 그는 “학교에서 엄마를 종종 부르고, 또래 엄마들이 모여 아이들끼리 친구가 되는데 우리 아이가 소외되자 ‘엄마가 회사를 그만두면 안되냐’고 하더라”며 “재택근무가 없었으면 다른 엄마들처럼 1~2학년 때쯤 그만뒀을 것 같다”고 밝혔다. 재택근무를 한다고 아이랑 놀아줄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집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아이가 정서적으로 안정되는 걸 느꼈다.

듀폰코리아에 함씨 같은 재택근무자는 6명이다. 남성 2명은 1주일에 하루씩 재택근무를 통해 가족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 업무효율과 만족도를 높인다. 1년 이상 재택근무가 어려운 직군도 1~2개월 재택근무는 사유에 따라 허용한다. 함씨는 “30~40대에 경력이 쌓여 이제 성과물을 내야 하는데 자녀 문제 등으로 그만둬야 하면 회사도 손해가 된다”며 “재택근무로 사무실 비용 등도 절약될 수 있다”고 말했다. 듀폰코리아 직원의 약 30%(공장 제외 시 46%)가 여성이며, 이사 이상 임원의 16%도 여성이다.

다국적 제약사인 한국MSD의 최정은 팀장(32)도 2010년 11월 육아휴직 없이 출산 3개월 뒤 복귀했다. 임신 때는 검진 휴가에다 탄력근무를 썼고 출산 뒤 1년 동안은 하루 1시간씩 단축근무도 했다. 최 팀장은 지금도 아이를 유치원에 보내고 오전 9시30분에 느긋하게 출근해 오후 6시30분에 퇴근한다. 이 회사는 탄력근무제로 오전 10시~오후 4시 핵심시간을 중심으로 하루 8시간을 조율할 수 있다.

그는 “가장 큰 장점은 이런 제도를 100% 눈치보지 않고 쓸 수 있는 문화”라며 “근무시간이 아니라 성과로 능력을 평가하는 문화가 잘 정착돼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둘째를 가졌을 때 지인들의 “축하해. 그럼 이제 회사는?”이라는 반응은 출산·육아로 휴직이나 사직을 고려조차 안 해본 최 팀장에게는 먼나라 얘기로 들린다.

최 팀장의 팀원도 모두 여성이다. 한국MSD는 630여명 직원 중 남녀 비율이 53 대 47이고 매니저급의 남녀비도 58 대 42로 균형적인 건 당연한 귀결로 보인다. 임원 12명 중에 8명(66.6%)을 여성이 차지한 배경도 “일과 생활 사이에 균형을 잡도록 배려하는 제도적 지원과 기업문화 덕분”이라고 그는 생각한다. 나아가 “남자이기 때문에, 여자이기 때문에가 아니라 유연함과 다양성이 존중받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들 기업 문화는 철저히 일 중심으로 짜여져 있다. 인간관계를 중시하는 한국 기업 직원들이 보기에는 삭막한 측면도 있지만 출산·육아를 이유로 밀려나거나 근무평점이 깎이는 건 통하지 않는다. 또 회식에 빠졌다가 중요한 결정이나 정보를 놓쳐 불이익을 당하는 일도 생각하기 어렵다. 이런 분위기에서 상대적으로 여성들은 능력을 발휘하고 살아남기 수월해지는 측면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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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에너지, KT 등 몇몇 국내 기업들도 유연근무제 등 가족친화적인 제도를 도입하고 있다.

SK에너지의 이주은씨(32)는 “탄력시간제를 도입한 뒤 아침에 아이를 챙기고도 여유로워졌다”며 “야근 같은 문화가 바뀌고, 여성만이 아니라 남성도 이 제도를 자유롭게 쓰는 인식을 가져야 성과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씨는 “탄력근무제 하나만 하면 아마 무용지물이었겠지만 초과근무를 없애고 휴가를 최대한 쓰는 등 조직문화를 바꾸려는 노력과 함께 팀원들이 무기명으로 팀장을 평가하는 시스템을 같이 도입한 덕분”이라고 말했다.

KT의 김지영 매니저(34)는 5살 아이에 이어 둘째를 임신 중이어서 1주일에 이틀씩 재택근무를 하고 있다. 왕복 2시간인 출퇴근 시간을 절약하고 육아에 더 힘쓸 수도 있게 됐다. 김씨도 “얼굴을 봐야 일한다고 생각하고 눈에 안 보이면 노는지 모른다는 인식이 유연근무 확대의 큰 걸림돌”이라고 말했다.

아직은 초보단계여서 서구 제도를 억지로 끼워맞춘 측면도 눈에 띈다. 때로는 직원의 편리보다는 업무효율 위주로 도입하다보니 형식에 그치곤 한다. 어린 자녀를 둔 여직원의 출근을 조절하는 유연근무제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고객 수요에 따라 영업시간을 오후 6시30분까지 늦춘 점포에 유연근무를 적용했지만 정작 어린 자녀를 둔 여직원이 없어 실효성이 떨어진 경우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현재 유연근무제는 여직원보다는 영업 확대를 위한 제도 같다”며 “직장 어린이집을 만들어주는 게 여직원들에게 훨씬 효과가 크다”고 지적했다.

다국적 기업 등 앞선 조직들이 비용을 들이면서까지 여직원을 채용하고 유지시키는 이유는 단지 성평등 차원을 넘어선다. 훈련된 여직원은 인적 자원으로서 가치가 높아 기업에 보탬이 된다는 판단에서다. 예컨대 보스턴컨설팅그룹이 여성 1만2000명에게 물어본 결과, 여성이 다양한 품목의 64%를 구매하거나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나타났다. 가구는 94%, 주택은 91%, 자동차의 60%는 여성들이 결정한다고 한다.

소비 주체로서 여성의 역할이 커지는 만큼 기업들도 제품·서비스 생산 과정에 여직원의 경험과 지혜를 빌려야 성공할 가능성이 커지는 것이다.

국내 기업은 아직 유연근무제 도입 비율이 10%가 못된다. 대한상공회의소의 지난달 8일 연구보고서에서 선택적 근로시간제(시차출퇴근제)의 국내 기업 활용률은 3.3%에 그쳤다. 이는 미국(54.0%)의 10분의 1에도 못 미치고 독일(33.0%), 영국(9.4%)에 뒤처진다.

통계청은 지난해 3월 기준 상용근로자 중 유연근무제를 쓰는 비율은 6.7%뿐이라고 밝혔다. 반면 전체 임금근로자 중 유연근무를 활용하는 이는 13.4%였고, 특히 처우가 열악한 시간제 근로가 59.6%로 최다였다. 유연근무제 확대만 강조할 경우 최근 정부의 여성을 겨냥한 ‘반듯한 시간제 일자리’ 확대 방침과 맞물려 나쁜 일자리를 양산할 수 있다.

또 유연근무제가 자칫 자녀 있는 여성 위주로 적용될 경우 역효과를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의 2011년 연구 결과, 조사 대상자 대부분이 유연근무제 이후 시간적, 정신적인 여유가 생겼다고 답했지만, 여성은 3분의 2 이상이 여유를 자녀 양육 및 교육에 사용하는 반면, 남성은 절반 미만만이 자녀 양육 및 교육에 사용하고, 그 외 취미생활에 사용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유연근무가 여성에게 일은 물론 가사 부담까지 가중시키는 결과를 부를 수 있다는 뜻이다.

여성이 직장에서는 일하는 시간이 줄어도 가사노동은 줄지 않는다는 외국 연구 결과도 있다. 시민건강증진연구소는 13일 로즈 J 박사 등이 호주의 성인 약 3000명을 대상으로 일자리 종류와 삶의 질의 관계를 조사한 결과를 토대로 한 ‘여성과 시간제 고용’이란 논문을 인용해 “여성은 시간제든, 전일제든 유급노동을 하지 않든 가정에서 시간적 압박에 차이를 보이지 않았다”고 밝혔다.

연구소는 “시간제 일자리로 노동시간을 줄이는 것은 필요하지만, 여성 삶의 질을 높이는 데는 미흡하다”며 “효과가 불분명한 시간제 일자리보다는 정규직 일자리 창출에 힘쓰고 기업이 법정 근로시간을 지키도록 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습관적인 야근을 지양하는 등 근로시간 단축이 전제돼야 한다는 뜻이다.

■ 특별취재팀 전병역(산업부)·김재중(정책사회부)·남지원(사회부)·이혜인(전국사회부)·이재덕(경제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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