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가정 양립정책인 육아휴직부터 남성도 쓸 수 있게 유인책 펴야

2013.06.14 06:00 입력 2013.06.14 10:06 수정
특별취재팀

남성 육아휴직 김명섭씨 사례로 본 정책 방향

김명섭씨(44)는 직원 20명 정도의 작은 전자회사 임원이다. 2년 전 그에게는 늦둥이 둘째딸 태린양(2)이 생겼다. 첫아이는 고등학생이다. 아내는 대기업 계열 보험사에서 영업일을 한다. 관리해야 할 고객이 많아 늘 바쁜 아내는 일을 쉴 형편이 되지 않았다.

김명섭씨는 육아휴직을 결심했다. 기간은 6개월. 보통의 남자 직장인이라면 결코 쉽지 않은 일이지만, 회사 간부이자 가족적인 기업 문화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출산 한 달 전, 육아휴직을 시작했다. 만삭과 산후조리 시기를 도왔다. 태린이가 태어나고 1개월반 뒤 아내는 복직을 했다. 육아 전쟁이 시작됐다. 기상과 동시에 태린이의 기저귀를 갈고 분유를 탔다. 아내를 출근시킨 뒤에는 기저귀를 빨았다. 잠시 숨을 돌리려고 하면 아이가 울었다. 정신없이 지낸 6개월이었다. 복직할 때 체중은 7㎏이 줄었다. 복직 뒤에는 김씨 어머니가 태린이를 키우고 있다. 요즘도 거의 매일 일이 많은 아내를 대신해 어머니 댁으로 ‘칼퇴근’한다. 김씨는 “내 친구들은 ‘아이를 돌보는 것은 엄마’라고 생각한다. 친구 자녀들은 아빠 대신 엄마만 찾지만, 내 딸은 엄마 대신 아빠를 찾는다. 나도, 아내도 만족한다”고 말했다.

김씨는 ‘매우’ 특별한 사례다. 일과 가정의 양립에 성공했고 지금도 성공하고 있다. 육아휴직이 가능한 상황, 일찍 퇴근할 수 있는 직장 덕분이다.

2년 전 육아휴직을 사용했던 김명섭씨(44)가 지난달 17일 경기 의왕시 내손동의 한 놀이터에서 딸 태린양(2)과 놀고 있다. | 서성일 기자

2년 전 육아휴직을 사용했던 김명섭씨(44)가 지난달 17일 경기 의왕시 내손동의 한 놀이터에서 딸 태린양(2)과 놀고 있다. | 서성일 기자

한국 사회에서 보통 남성이 당당하게 육아휴직을 신청하고, 아이 돌봄을 위해 칼퇴근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얘기다. 대기업에 근무하는 최지훈씨(29·가명)는 올 초 둘째가 생겼지만 육아휴직은 꿈도 꾸지 못했다. 최씨는 “맞벌이에 아이가 둘이나 돼서 육아휴직이 꼭 필요한데 한번도 쓸 생각을 해보지 못했다. 여자 동료들도 눈치보며 육아휴직을 쓰는 판국에 남자인 내가 육아휴직을 쓰겠다는 건 ‘회사 그만두겠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법적으로 보장된 배우자 출산휴가 3일도 사용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통상 한국 사회에서 육아휴직은 여성의 전유물이다. 일과 가정의 양립을 위한 정책이 여성만을 정책목표로 하고 있는 데 따른 것이다.

박근혜 정부는 고용률 70% 달성을 위해 ‘일과 가정의 양립’을 위한 여러 정책을 내놓았다. 정부가 지난 4일 발표한 ‘고용률 70% 로드맵’을 보면, 앞으로 임신한 여성 노동자들은 3개월의 출산휴가에 이어 곧바로 1년간 ‘자동 육아휴직’을 쓸 수 있게 된다. 육아휴직 후 1년 동안은 ‘육아기 근로시간 단축제도’도 활용할 수 있다. 경력단절 여성들의 복귀를 위해 시간제 일자리를 2012년 149만개에서 2017년 242만개로 늘릴 계획이다.

정부가 내놓은 정책은 사실상 ‘여성’을 정책목표로 삼고 있다. 자동 육아휴직과 육아기 근로시간 단축제도를 사용하는 사람은 주로 여성일 가능성이 높고, 시간제 일자리를 늘리는 이유도 여성들의 복귀를 위해서다. 가족 내에서 1차 양육책임을 맡는 사람은 ‘엄마’라는 점을 전제로 깔고 시작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남성 임금이 여성 임금에 비해 많기 때문에 여성이 휴직이나 시간제 일자리를 선택할 가능성이 높다. 고용률 70% 로드맵은 “여성에게 일과 가정의 양립이 가능하게 해 여성 고용률을 높이겠다는 게 목적”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하지만 여성을 지나치게 정책의 표적으로 삼으면 도리어 일과 가정의 양립이나 여성 고용률 향상을 저해하는 쪽으로 움직일 가능성이 크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 김종숙 여성일자리·인재센터장은 “일과 가정 양립정책이 여성 노동자에게만 집중돼 ‘여성을 지원하는 제도’ 정도로만 자리를 잡으면, 기업들은 여성을 고용할 때 ‘비용’이 든다고 생각해 오히려 여성 고용을 기피하게 된다”고 말했다. 실제로 많은 중소기업 사장들은 “여성을 고용하면 육아휴직 같은 제도 때문에 남성을 고용하는 것보다 비용이 너무 많이 들어 여성 고용을 하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남성의 일·가정 양립은 여전히 요원하다. 지난 한 해 동안 육아휴직을 쓴 노동자 6만4069명 중 남성 육아휴직자는 3%에도 못 미치는 1790명에 불과했다.

[왜 지금 ‘여성 일자리’인가]일·가정 양립정책인 육아휴직부터 남성도 쓸 수 있게 유인책 펴야

전문가들은 남녀 구분 없이 일과 가정을 양립할 수 있는 분위기 조성이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김종숙 센터장은 “남성과 여성이 모두 일·가정 양립정책의 수혜자가 되면 기업들은 육아휴직이나 근로시간 단축제도와 같은 제도를 ‘여성 고용에 따른 비용’이 아니라 ‘사람을 채용하는 데 마땅히 지불해야 할 비용’이라고 생각하게 된다”며 “그렇기 때문에 남녀 근로자가 동일하게 혜택을 받을 수 있어야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 홍승아 가족·다문화정책센터장도 “먼저 일·가정 양립정책을 남성이 사용할 수 있도록 유인하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며 “한국에서 가장 안정된 일·가정 양립정책인 육아휴직부터 남성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육아휴직 남성 할당제와 같은 제도를 강력하게 추진해야 한다”고 말했다.

남녀 구분 없는 일과 가정의 양립은 여성 고용을 확대할 뿐만 아니라 아빠와 아이들의 관계도 좋게 한다. 김명섭씨는 “‘딸에게 사랑받는 아빠’여서 행복하다”고 말했다. 일에 치여 아이들에게 외면받는 주변 아빠들을 보면 안타깝다고도 했다. 그는 “다른 아빠들도 육아와 가정생활에 충분히 참여할 수 있도록 사회 분위기가 바뀌고 제도가 개선되면 많은 아빠들이 행복해질 것 같다”고 말했다.

<1부 끝>

■ 특별취재팀 전병역(산업부)·김재중(정책사회부)·남지원(사회부)·이혜인(전국사회부)·이재덕(경제부) 기자


추천기사

바로가기 링크 설명

화제의 추천 정보

    오늘의 인기 정보

      이 시각 포토 정보

      내 뉴스플리에 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