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퇴·저녁 삶”에 웃거나…“그림자 노동”에 울거나

2019.07.01 21:58 입력 2019.07.01 21:59 수정

도입 1년, 명암

“칼퇴·저녁 삶”에 웃거나…“그림자 노동”에 울거나

300인 이상 사업장에 주 52시간 근무제가 도입된 지 1일로 1년을 맞았다. 52시간 근무제가 안착된 대기업을 중심으로 정시 퇴근 문화가 확산됐다. 대기업 사무직 노동자들 중엔 제도 안착에 만족하는 목소리가 많다. 추가 고용 없는 근로시간 단축이 ‘무급 노동’만 늘렸다는 불만도 적지 않다. 한 대기업 대리 김모씨는 “예전에는 ‘칼퇴’를 하면 눈치를 줬는데, 이제는 반대로 야근할 때 (상사가) 눈치를 본다”며 “퇴근시간 지나서 업무지시를 할 때 미안해하는 분위기”라고 말했다. 디자인업계에서 일하는 박모씨는 “52시간제가 도입됐어도 업무량은 그대로다. 회사에서 일하는 시간이 줄었을 뿐 집에 가서 수당 없이 일한다”고 전했다.

■ 52시간 근무제가 바꾼 저녁 풍경

▶“정시 퇴근 후 취미”
유연근무제 대기업 만족 커
카톡 업무지시·회식 줄어
인근 술집·학원 희비 교차

대기업 사원 최모씨(34)는 오후 5시30분이 되면 모든 업무를 마친다. 컴퓨터와 사무실 불이 꺼지기 때문이다. 최씨는 “인사팀에서 각 사무실을 돌며 퇴근을 독려하고, 제때 퇴근하지 않은 이들은 ‘퇴근제 위반자’라는 명목으로 사내 게시판에 이름이 오른다”면서 “퇴근 시간이 빨라진 덕에 여가 시간을 즐기고 있다”고 했다. 주중 테니스에 야구 레슨은 예전엔 상상도 할 수 없던 일이다.

주 52시간제 도입 이후 유연근무제가 안착된 대기업 노동자들의 만족감이 특히 높았다. 화장품 회사에 다니는 임모씨(35)는 지난해 7월부터 출퇴근 시간이 ‘자율’로 바뀌었다. 회사가 ‘코어(핵심) 근무시간’으로 지정한 오전 11시~오후 4시 외 나머지 시간은 자유롭게 일할 시간을 선택해 근무한다. 임씨는 “가족 식사 시간이 주 1~2회에서 3~4회 정도로 늘어났다”며 “취미로 일상을 기록하는 유튜브 방송도 시작했다”고 말했다.

박모씨(29)도 “정해진 출퇴근 시간이 없고 한 달간 일정한 근무 시간만 채우면 되는 시스템으로 달라졌다”며 “최근 필라테스를 시작했다”고 말했다.

최근 한국경제연구원이 대기업 144개사를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 결과 근로시간 단축에 따라 업무 효율을 높이기 위한 방안으로 대기업 10곳 중 7곳이 이 같은 근무시간 관리제도(68.8%)를 도입했다. 과반 이상(56.3%)이 유연근무제를 실시한다고 답했다.

대기업 회사원 김모씨(31)는 가장 큰 변화로 ‘회사 분위기’를 꼽았다. 김씨는 “과거에는 야근하는 사람이 하지 않는 사람에게 눈치를 줬다면, 이제는 야근하는 사람이 일을 못하는 사람처럼 인식된다”고 말했다. 퇴근 후 ‘카카오톡 업무 지시’와 회식이 줄어든 점도 긍정적인 변화로 꼽았다.

노동시간 단축은 사무실 밀집 지역 상권에도 영향을 미쳤다. 서울 서대문역 인근에서 호프집을 운영하는 ㄱ씨는 “예전엔 새벽 2~3시까지 골목이 시끌시끌했지만 요새는 오후 9시면 한산해진다”면서 “ ‘김영란법’이 생기고 나서부터 장사가 안되기 시작했고, 52시간제 도입으로 직장인들이 회식을 1차에서 끝내며 장사가 더 어려워졌다”고 말했다. 서대문구에서 고깃집을 운영하는 박모씨(64)는 “37년간 장사했지만 요새가 가장 어렵다. 우리 애들도 직장인이라 좋다고 하지만 장사하는 사람은 더 힘들어졌다”고 했다.

체력관리 시설이나 외국어학원 등에는 직장인이 늘었다. 서울 광화문역 인근의 한 피트니스센터 관계자는 “직장인 회원이 99%인데, 오후 6~8시 고객이 많이 늘었다”고 말했다.

서울 강남의 필라테스 트레이너 홍모씨는 “52시간 근무제 도입 이후 회원 수가 40% 정도 증가했다”고 밝혔다. 한 중국어학원 관계자는 “직장인 수강생이 20~30% 정도 늘었다”며 “과거에는 승진 시험을 위해 등록하는 경우가 많았다면 지금은 취미로 배우려는 이들이 많아진 것 같다”고 했다.

“칼퇴·저녁 삶”에 웃거나…“그림자 노동”에 울거나

■ “퇴근 후에도 여전히 일한다…기록되지 않을 뿐”

▶“현장직 그림의 떡”
일손은 줄고 업무량 그대로
근무기록엔 없는 ‘무급노동’
“밤 퇴근도 비일비재” 불만

‘고용 없는 52시간제 도입’이 ‘그림자 노동’을 강요한다는 비판도 나온다. 회사원 박모씨(29)는 “근무시간을 다 채우면 형식적으로 집에 가라고는 하지만, 일을 줄여주지 않으니 수당 없이 퇴근 후나 주말 ‘무급 노동’을 한다”며 “업무가 많은 월말에는 (근무시간 확인을 위한) 출퇴근 버튼을 끄고 일하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대기업 현장직 노동자들에게는 52시간 근무제가 ‘먼 나라 얘기’라는 지적도 있다. 한 대기업 유통회사에서 근무하는 김모씨(30)는 “현장 외근직들은 (외부에서 일하다) 복귀 지시를 받고 사무실로 다시 들어가 최종 점검까지 마치면 오후 9시 퇴근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고 했다. 대기업 영업사원 백모씨(31)도 “비공식적인 업무는 계속된다. 여전히 일주일에 70시간 정도 일해 여가 생활은 생각하기 어렵다”고 했다.

52시간을 초과한 근무시간은 입력되지 않도록 한 사내 전산시스템 때문에 표면적인 위법 사례가 없을 뿐, 실제로 적지 않게 무급으로 초과근무를 한다는 이도 있다. 언론사에서 일하는 김모씨(37)는 “사람을 더 뽑지 않으니 업무량은 그대로고, 회사는 줄어든 노동시간에 대한 고려 없이 동일한 결과물을 요구한다”며 “기록되지 않는 추가 노동을 개인적으로 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대한상공회의소가 지난해 말 52시간 근로제가 적용되는 317개사를 조사한 결과 4곳 중 1곳은 초과 근로를 해소하지 못했다고 답했다.

▶“기대 반 우려 반”
휴게시간 늘리기 등 꼼수
추가 고용 없인 더 양극화
방송·버스업 벌써 “뜬구름”

휴게시간을 늘리는 등 각종 ‘꼼수’로 형식적으로 52시간제를 지킬 뿐 노동강도는 여전한 곳도 있다. 요양서비스업에 종사하는 김모씨는 “최저시급이 오르고 노동시간은 줄면서 야간 휴게시간을 늘리는 방식으로 임금은 줄이되 일은 그대로 시키고 있다”고 했다.

1일부터 52시간제가 도입되는 방송·금융·버스 등 업종과 내년부터 적용되는 300인 이하 중소기업에선 기대와 우려가 동시에 나온다. 한 지상파 방송사 PD는 “지금도 바쁠 때는 주 80시간까지 일하기 때문에 52시간이 안착되긴 쉽지 않을 것”이라며 “정규직 PD는 탄력근로제 등으로 맞추면 그나마 상황이 낫지만 작가나 스태프는 더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한 대기업의 300인 미만 자회사에서 근무하는 박모씨(28)는 “6개월 후부터 52시간제가 시행된다는 공지가 사내 e메일로 왔는데 잘될지 모르겠다. 최근 파트타이머 한 명 뽑은 게 전부”라고 했다. 대전의 한 중소기업에서 일하는 김모씨도 “내년부터 52시간제가 적용돼 근로시간이 줄어들면 좋겠지만, 회사는 어떻게든 돈을 뽑아내려 할 것”이라며 “ ‘저녁이 있는 삶’ 같은 건 공기업에나 해당되는 뜬구름 잡는 소리같다는 생각도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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