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③-⑴소비되는 청년]“우리를 ‘소비’하지 말라, 아파도 된다고 말하지 말라”

2016.01.15 22:18 입력 2016.02.02 18:35 수정

소비되는 청년

이현진씨(26)에게 ‘청년 인턴’은 입에 담고 싶지 않은 단어다. 크고 작은 기업에서 해온 인턴만 네 번째다. 그는 정부가 ‘청년’ 인턴을 늘린다는 소식을 듣고 의아했다. ‘청년’과 ‘인턴’이 동어반복처럼 여겨졌기 때문이다. 이씨는 “인턴 앞에 ‘청년’을 왜 붙이는지 모르겠다. 인턴은 거의 대부분 20대 취업준비생들이 하지 않나. ‘청년’을 붙여서 마치 청년들에게 기회를 더 주는 것처럼 눈속임하는 거 아닌가. 너무 기만적”이라고 말했다.

‘청년’은 꾸준한 인기상품이다. 청년들이 고달플수록 ‘청년’은 잘 팔렸다. ‘청년’ 소비는 정치에서 경제·문화까지 분야를 가리지 않았다. 선거철만 되면 정치인들은 여야 가리지 않고 청년을 찾아 “청년실업 해소하겠다”고 공언했다. 대기업도 “청년고용에 앞장서겠다” “스펙 초월 채용을 하겠다”고 나섰다. 정작 청년들의 삶은 나아지지 않았다.

정치인들은 ‘체험과 대화’로 청년과 소통하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대선을 두 달 앞둔 2012년 10월 패스트푸드점에서,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지난해 7월 커피점에서 아르바이트 체험을 하고 있다.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는 2014년 12월 타운홀 미팅에서, 안철수 의원은 2011년 9월 청춘 콘서트에서 청년들과 만났다(왼쪽 위부터 시계방향). 경향신문 자료사진

정치인들은 ‘체험과 대화’로 청년과 소통하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대선을 두 달 앞둔 2012년 10월 패스트푸드점에서,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지난해 7월 커피점에서 아르바이트 체험을 하고 있다.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는 2014년 12월 타운홀 미팅에서, 안철수 의원은 2011년 9월 청춘 콘서트에서 청년들과 만났다(왼쪽 위부터 시계방향). 경향신문 자료사진

■급할 때 부르는 이름, “청년”

지난해 ‘청년’을 가장 많이 언급한 사람은 박근혜 대통령이다. 한국언론진흥재단은 지난해 9월 방송과 신문 보도를 분석해 발간한 ‘청년실업, 언론보도와 국민인식’ 보고서에서 “청년실업을 가장 많이 언급한 주체는 청와대와 박 대통령”이라고 밝혔다. 박 대통령은 지난해 10월 국회 시정연설에서 ‘청년’을 32번(일자리 27번)이나 언급하기도 했다.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도 ‘청년’을 자주 입에 올렸다. 김 대표는 ‘청춘 무대’ 타운홀 미팅에서 청년들과 만나 “청년들의 분노 잘 안다”고 말했다. 그러나 또 다른 자리에선 “제 막내아들도 용돈 잘 안 주니 알바하더라” “청년들이 너무나 쉬운 일만 선호한다”고 했다. 김 대표를 향해서는 ‘킹찍탈’이라는 신조어까지 탄생했다. 분노는 안다면서 현실은 잘 모르고, 청년들의 화를 돋우는 말만 한다는 뜻이 담겼다. ‘킹찍탈’은 ‘헬조선’의 ‘대왕’ 격인 김 대표를 다음 대통령으로 찍고 ‘탈조선’(한국을 떠남)하자는 의미다.

드라마·영화·광고·웹툰이나 책에서 ‘청년’은 주요한 소재나 이슈가 됐다. 두산 ‘사람이 미래다’ 광고

드라마·영화·광고·웹툰이나 책에서 ‘청년’은 주요한 소재나 이슈가 됐다. 두산 ‘사람이 미래다’ 광고

선거를 앞두고 청년을 찾고, 정책을 쏟아내는 것은 야당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국회의원 자녀들의 취업청탁 논란에서도 야당은 빠지지 않았다.

더불어민주당은 올해 4월 총선의 청년비례대표 후보자 나이 상한선을 ‘만 45세’ 이하로 높였다. 20·30대가 정치권에 진입하긴 더 어려워졌다. 신수아씨(25·이화여대 4학년)는 “청년 나이를 높이는 것을 보면서 웃긴다고 생각했다. 청년이라는 정의를 넓게 소비하는구나, 우리가 생각하는 청년의 정의랑 다르구나 싶었다”고 했다.

웹툰 <미생>

웹툰 <미생>

■문화 속 청년, 낭만에서 현실로

드라마·영화·웹툰 등 문화 콘텐츠에서 청년은 낭만·사랑·우정의 주인공으로 많이 등장했다. 청년의 현실과 일상도 달동네·옥탑방 같은 주거지나 셰프·기자·과학수사대 같은 여러 직업을 담는 소재가 됐다. 그러나 청년은 이제 고통받는 존재로 그려지기 시작했다. 무역회사에서 열정 인턴 2년을 보내고 잘린 비정규직 장그래의 이야기를 다룬 tvN <미생>이나 KBS <직장의 신>이 대표적이다. 광고계도 청년을 위로하거나, ‘알바몬’(혜리)·‘알바천국’(유병재)처럼 유명 연예인을 앞세워 근로계약서 작성법, 최저시급 등 알바생의 권리를 알렸다. 비정규직이 드라마의 주제가 되고, 취업알선업체의 광고가 문화적 이슈가 된 것이다.

박이대승씨(38·프랑스 툴루즈2대학 박사과정)는 “최근 ‘청년’이라 묶이는 이들이 냉소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정치권·지식인·언론 모두 뜬구름 잡듯 ‘청년’을 언급한다. 구체적인 분석도 없고 주거나 저임금 노동 등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는다”며 “알바노조, 민달팽이유니온이 각기 노동과 주거 문제를 다루듯이, 구체적인 청년문제와 함께 청년을 언급할 때가 됐다”고 말했다.

걸스데이 혜리의 ‘알바몬’ 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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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담론의 중심에 선 청년

2007년 <88만원 세대>(우석훈·박권일 저)가 발간된 뒤 청년실업을 중심으로 한 담론이 시작됐다.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엄기호·2010), <청춘을 위한 나라는 없다>(한윤형·2013), <잉여사회>(최태섭·2013), <일베의 사상>(박가분·2013) 등 청년을 주제로 한 책이 쏟아지고 확장됐다. 취업난뿐 아니라 비정규직, 아르바이트 최저임금, 일베의 등장과 청년들의 심리적 소외 등이 다양한 청년문제 속에 담겨 논의됐다. 우석훈 교수는 <88만원 세대> 출간 5년째인 2012년 3월, 악화되는 청년들의 현실을 가리키며 “세상에 준 기여보다 부정적 폐해가 더 많게 된 책, 청춘들이 움직이지 않을 이유로 삼게 된 책이다. 청춘이여, 정신 좀 차려라”라며 절판을 선언했다. 2010년 3월 고려대 학생 김예슬씨의 “대학 거부” 선언은 2013년 12월 역시 고려대 학생 주현우씨가 쓴 “안녕들 하십니까” 대자보로 이어졌다.

영화 <열정같은 소리하고 있네>.

영화 <열정같은 소리하고 있네>.

한편에서는 <아프니까 청춘이다>(김난도·2010)를 필두로 청년들의 멘토를 자처하는 기성세대가 등장했다. <스무 살, 절대 지지 않기를> 이지성 작가처럼 청년에게 힘을 내라거나, <언니의 독설> 강사 김미경씨처럼 자기계발을 채찍질하는 형태도 있었다.

하지만 최근 분위기는 예전 같지 않다. 200만부가 넘게 팔린 <아프니까 청춘이다> 저자 김난도 서울대 교수는 지난해 10월 <웅크린 시간도 내 삶이니까(다시 일어서려는 그대에게)>를 펴냈다. 이 책은 포털사이트 네이버에서 누리꾼들로부터 저조한 평점(15일 현재 10점 만점에 1.97)을 받았다.

지난해 3월에는 적은 소득에도 만족하며 살아가는 일본 청년들을 소개하는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이 나와 화제가 됐다. 비슷한 시기에 한국에서는 ‘달관세대’가 등장했다.

조선일보는 안분지족하는 법을 깨달은 세대라는 의미로 청년을 ‘달관세대’라고 명명해 논란의 중심에 섰다. 유지영씨(25·취업준비생)는 “요즘 주변에서 청년 이야기를 해도 흘려듣는다”고 말했다. 어차피 변화가 없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유씨는 “대학에 처음 왔을 때 청년들아 토익책을 덮어라, 짱돌을 들어라 이런 말을 들었을 때 혹했다. 집회에도 여러 차례 나갔다. 정작 취준생이 된 지금, 토익책을 덮으면 취업할 수 있는 길은 사실상 찾기 어렵다”고 말했다.

■특별취재팀

박재현 송윤경 이혜리 이효상 정대연 김서영 김원진 기자


<김원진·이혜리 기자 oneji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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