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개발의 그림자···‘불도저시장’ 김현옥

2016.07.01 17:51 입력 2016.07.04 18:42 수정

박정희 전 대통령의 측근으로 1966년부터 만 4년간 서울시장으로 재임한 김현옥을 아시나요? 불도저 시장으로 세종로·명동 지하도 건설, 여의도 개발, 청계고가도로·남산터널 건설 등을 추진했습니다. 서울시내 빈민 주거지를 철거하고 빈민들을 경기 광주(지금의 성남)로 이주시키는 등 박정희 전 대통령의 밀어붙이기식 개발사업을 주도했던 인물입니다. 1970년 와우 아파트 붕괴사고로 시장자리에서 물러났지만 다시 내무부 장관에 오릅니다. 서울역사박물관은 7월1일부터 8월21일까지 ‘불도저시장 김현옥’ 전시회를 진행합니다. 김현옥은 어떤 시장이었을까요?

■세종로·명동 지하도, 청계고가도로 공사

1966년 4월. 세종로지하도 설치공사 기공 |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1966년 4월. 세종로지하도 설치공사 기공 |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공사 안내판 앞에서 한손을 들고 설명하는 이가 김현옥 당시 서울시장입니다. 현재 서울지하철 광화문역과 연결된 ‘세종로 지하도’를 만드는 공사를 설명하는 중입니다. 세종로 지하도는 1966년 4월부터 그해 10월까지 공사가 진행됐습니다. 당시 광화문 4거리 모습과 공사 진행 과정을 보시죠.

1966년 세종로지하도 | 서울시(http://opengov.seoul.go.kr)

1966년 세종로지하도 | 서울시(http://opengov.seoul.go.kr)

1966년 4월29일. 세종로 지하도 공사 현장 | 서울역사박물관

1966년 4월29일. 세종로 지하도 공사 현장 | 서울역사박물관

1966년 10월 29일 세종로지하도 | 서울역사박물관

1966년 10월 29일 세종로지하도 | 서울역사박물관

공사는 순식간에 진행됐습니다. 물론 완공 이후에 지하천장에 금이 가고 보수하는 일도 벌어졌습니다. 서울시청역과 연결된 태평로 지하도와 명동 지하도, 광화문 지하도, 청계청 고가도로, 남산1·2호 터널 모두 김현옥 시장때 진행된 공사입니다. 번잡한 도로에 지하도 건설이 동시다발적으로 추진되다보니 당시 경향신문에는 다음과 같은 독자 항의 편지도 왔습니다.

“의욕있고 젊은 김현옥 시장이 취임한 후 세종로, 미도파 앞 등에 지하도공사가 벌어진 것은 교통난의 완화를 위해 오히려 만시지탄은 있을 망정, 잘하는 일이다. 그러나 과잉의욕 탓인지 이런 공사들이 한꺼번에 그것도 가장 번잡한 두곳에서 착공돼야 하는지 이유를 모르겠다. 차라리 서대문 육교 공사가 끝난 뒤에 세종로 공사를, 그리고 그 동안엔 미도파 입구 공사를 했던들 이처럼 시민들이 불편을 느끼지는 않았을 것이 아닌가”

1967년 5월2일 태평로 지하도 공사 | 서울역사박물관

1967년 5월2일 태평로 지하도 공사 | 서울역사박물관

1966년 10월 3일 명동지하도(미도파앞) 개통 | 서울시

1966년 10월 3일 명동지하도(미도파앞) 개통 | 서울시

1968년 5월31일 청계천 고가도로 공사 | 서울역사박물관

1968년 5월31일 청계천 고가도로 공사 | 서울역사박물관

서울 도심을 오가는 차량이 늘어나자 서울시는 논스톱으로 달릴수 있는 고가도로를 건설합니다. 지금은 철거된 청계 고가도로(당시 3.1고가도로)도 김현옥 시장 시절 만들어졌습니다. 당시 서울 도심에서 외곽으로 빠질수 있는 새로운 도로가 생긴겁니다. 박원순 시장이 철거하겠다고 밝힌 서울역고가도로도 김현옥 시장 시절인 1970년 8월15일 16개월만에 완공됐습니다. 서울역 고가도로 개통으로 3.1 고가도로와 퇴계로쪽에서 제1한강교 방향으로 빠지는 차량이 신호를 받지 않고 달리게 됐습니다. 물론 당시 만들어진 도로들은 이후 부실공사 논란이 빚어지기도 했습니다. 3.1고가도로는 완공 8년 뒤, 콘크리트가 깨져나가 직경 50㎝㎝의 구멍이 뚫리는 일도 있었죠. 보여주기·불도저식 개발정책이 낳은 당연한 결과였죠.

■남산 1·2호 터널

1969년 남산터널 시찰하는 김현옥 시장| 서울역사박물관

1969년 남산터널 시찰하는 김현옥 시장| 서울역사박물관

현재 서울의 주요 도로는 대부분 김현옥 시장 시절 만들어졌습니다. 경부고속도로와 도심지를 연결하는 남산 1·2호 터널도 1970년 완성됐습니다. 완공된 뒤 터널에 물이 새는 사고도 빈번했습니다. 5년 뒤 남산 1호 터널은 천장이 무너질 수 있다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서울시는 세금을 써가며 대대적인 보수공사에 들어갔습니다.

“당초부터 안전성을 무시한 설계였을 뿐만 아니라 그동안 물이 새고 터널의 천장을 암반에 매달아놓은 철근이 심한 산화작용으로 채 5년도 못돼 전면적인 보수를 해야하는 등 시민아파트와 함께 부실공사때문에 시세만 축내고 있다(…) 터널의 천장이 아치형으로 돼 암반과 천장사이에 철근 콘크리트 등으로 완전히 채워져야 하는데도 공사비를 줄이기 위해 천장을 평평하게 하고 암반과 천장사이의 공간을 채우지 않은채 철근으로 천장을 매달아두는 정도로 설계됐기 때문에 천장을 뜯어내는 전면보수가 불가피”(1975년 3월28일자 경향신문)

■여의도 개발과 밤섬 폭파

1968년 5월31일 여의도공사장 | 서울역사박물관

1968년 5월31일 여의도공사장 | 서울역사박물관

한강 개발도 추진됩니다. 한강 개발의 핵심공사는 여의도 윤중제 준공. 여의도 주위에 제방도로인 윤중제를 쌓는 공사였죠. 1968년 서울시 한강개발계획에 따라 높이 16m, 둘레 7.6㎞, 폭 35~50m의 윤중제가 완성됐습니다. 윤중제로 여의도는 침수 피해에서 벗어나게 됐고 여의도에는 국회의사당과 아파트 등이 들어서게 됩니다.

1968년 2월10일 한강 밤섬 폭파 전 | 서울역사박물관

1968년 2월10일 한강 밤섬 폭파 전 | 서울역사박물관

여의도 개발을 위해 한강 밤섬에 살던 사람들은 보금자리에서 쫓겨났습니다. 김현옥 시장은 한강 밤섬을 폭파시킨 인물이기도 하죠. 밤섬을 폭파시킨 건 한강 하구를 넓혀 물이 여의도로 범람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고 합니다. 밤섬 폭파 당일 발행된 1968년 2월10일자 경향신문은 당시 일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한강 한가운데 돌과 모래로 된 섬 밤섬(율도)1만7300평이 없어진다. 서울시는 10일 상오 밤섬 폭파작업에 착수, 5월 말까지 제거작업을 한다. 폭파이유는 하구를 넓혀 현재 공사중인 여의도를 홍수에서 구해내기 위한 것. 500년 동안 운명의 혜택을 모르고 살아온 이 밤섬은 62가구 443명이 도선업과 어업으로 살아온 서울의 명소. 행정명칭은 서울 마포구 서강동 15통 6반. 도둑이 없고 질병이 없다는 이 섬엔 ‘부군신’이란 사당이 있다. 이 고장은 500년 동안 수도물과 전깃불을 모르고 살아왔으며 한강물로 밥을 지어 먹고 살아왔다는데도 탈이 없다. 또 전기대신 집집마다 부군등이라는 조롱불을 켜서 마을을 밝게 하고 있다.(…)주민들은 서울시가 와우산에 마련한 연립주택에 집단이주 된다”

■시민아파트

1969년 금화아파트전경 | 서울역사박물관

1969년 금화아파트전경 | 서울역사박물관

서울시는 서대문구 석교동과 영천동 뒷산 고지대의 판자촌을 철거합니다. 지금의 서대문역과 독립문 사이에 시민아파트인 금화아파트를 지었습니다. 천연동, 석관동, 영천동, 냉천동 일대의 셋방이나 불광동 문화촌의 집단천막촌에 흩어있는 철거민들이 아파트에 입주했습니다.

1969년 5월20일 월곡아파트 시찰 중인 김현옥 시장 | 서울역사박물관

1969년 5월20일 월곡아파트 시찰 중인 김현옥 시장 | 서울역사박물관

월곡동에는 9동짜리 시민아파트를 준공했습니다. 문제는 서울시가 시민아파트 건설공사를 성과내기식으로 밀어붙이다보니 날림 공사가 많았다는 겁니다. 당시 시민아파트 건립에 대해 역사학자 서중석 교수는 프레시안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 프레시안 기사▶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유신 쿠데타, 열다섯 번째 마당 )

서중석= 무주택자나 아주 형편없는 집에 사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았는데, 이 사람들의 대다수는 빈민층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 사람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이게 박정희 정권의 중요한 관심사였다. 서울의 경우 무허가 불량 주택이 1961년에 8만4440호였는데 1964년에는 11만6200호, 1970년에는 18만7500호였던 것으로 통계가 나와 있다. 1966년 말 서울시내 판자촌 인구가 약 127만 명이나 됐다. 당시 서울시 인구의 3분의 1 정도나 되는 상태에 이른 것이다.
그런 상태에서 1966년 김현옥이 서울시장에 부임했다. (…)하나는 철거민들을 집단으로 이주시키는 정책이었고 다른 하나는 서민 아파트(시민 아파트)를 건립하는 정책이었다. 그중에서 서민 아파트 건립 정책이 서울시내의 경우 우선 눈에 띄었는데, 그 문제점을 단번에 싹 드러낸 것이 유명한 와우아파트 도괴 사건이었다.
불도저식, '빨리빨리'의 대표적인 사례가 와우아파트지만 다른 데에도 이것과 비슷하게 지은 경우가 많지 않았겠나. 그런데 와우아파트가 건립된 입지는 70도나 되는 경사진 산비탈이었다. 이럴 때에는 그런 경사로 인해 가중되는 힘에 저항할 수 있는 구조로 설계, 시공했어야 하는데 그런 고려가 전혀 돼 있지 않았다.
문제는 당시 서울의 시민 아파트가 다 이런 고지대에 건립됐다는 것이다. 1960년대 후반 내가 대학 다닐 때 이처럼 고지대의 시민 아파트를 참 많이 봤다. 고지대 건립은 저지대 건립에 비해 자재 운반, 공사 진척 등 모든 것에서 힘이 더 들고 건립 비용도 더 들 수밖에 없었다.
정부는 싼 가격으로 빨리빨리 지으려고 했는데 왜 이렇게 산비탈이나 산등성이에 지어놓았느냐. 여기에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당시 서울시 간부로 있었던 손정목 교수가 이 부분에 대해 쓴 게 있다. 그걸 보면 한 간부가 ‘왜 이렇게 높은 데다가 아파트를 지어야 하느냐. 공사하기도 힘들고 입주자들이 출퇴근하기도 힘들 것 아니냐’고 물었다고 한다. 당연한 것을 물어본 것이다. 그러자 김현옥 시장이 “야 이 돌대가리야, 높은 데 지어야 청와대에서 잘 보일 것 아냐”, 이렇게 얘기했다고 한다. 박정희 시기 경제 정책의 한 단면을 단적으로 이야기해주는 장면이다.

1970년 와우아파트 구조작업 현장 | 서울역사박물관

1970년 와우아파트 구조작업 현장 | 서울역사박물관

김현옥 시장의 불도저식 개발의 문제점은 1970년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해 4월8일 서울 마포 창전동 산1번지에 위치한 와우아파트(시민아파트) 15동이 무너졌습니다. 33명이 사망하고 39명이 중경상을 입었습니다. 조정래의 소설 ‘한강’은 당시 와우아파트 사건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아파트는 하필이면 아침 6시30분께에 무너졌다. 그 시각은 주민들 거의가 막 잠에서 깨어나거나 아침 식사를 하고 있을 때 였다. 두어시간만 늦게 무너졌더라도 어른들이 일 나가고 아이들이 학교를 갔을 테니 인명 피해는 훨씬 줄었을 것이다. 그런데 14가구 사람들은 한순간에 날벼락을 맞아 참혹하게 부서진 콘크리트더미 속에 파묻혀 버린 거였다. (…) 조사단의 긴급진단에 따르면 서울 시내 시민아파트의 3분의 1정도가 날림공사로 붕괴위험이 있다는 거였다. 공사가 그처럼 날림이 된 원인은 다 짐작했던 대로 무계획적인 성급한 사업 추진에다 공무원들의 부정부패가 겹쳐져 있었다. 시멘트 배합상태가 정상의 2분의 1밖에 안 되는 것도 심각한 문제인데, 예정된 기일 안에 아파트를 준공시키려고 얼음이 얼어붙는 강추위 속에서도 시멘트 작업을 몰아붙였던 것이다. 공무원들이 잇따라 쇠고랑을 차는 모습이 신문마다 실리면서 그 사건은 마무리 단계로 접어들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구청장이나 그 밑의 과장 정도만 쇠고랑을 찰 뿐 정작 시정의 총책임자인 시장은 자리를 물러나는 것으로 그만이었다”

■철거민 문제

1971년 광주대단지 | 경향신문 사진자료

1971년 광주대단지 | 경향신문 사진자료

와우아파트 붕괴사고로 김현옥 시장이 물러났지만 김 시장이 시작한 불도저식 개발 드라이브는 또다른 사건을 낳게 됩니다. 바로 광주대단지 사건이죠.

“김 서울시장은 해마다 수해를 겪는 청계천 중앙천 홍제천 등 35개 천가에 난립한 무허가 판잣집 1만1657동을 이달안에 모두 철거, 경기도 광주군의 대단지에 이주 정착시키겠다고 밝혔다” (1969년 7월14일자 경향신문)

경기 광주군 중부면(지금의 성남시 중원·수정구 일대). 바로 위 기사에서 김현옥 서울시장이 무허가 판잣집을 철거하고 서울 근교로 철거민을 집단 이주시키기 위해 조성한 곳입니다. 당시만해도 ‘광주대단지’라고 불렸습니다. 와우아파트 붕괴사고로 김시장이 물러난지 1년 뒤, 이곳에 철거민 수만여명이 “살려달라”고 모였습니다. 나무 몽둥이와 삽 등을 든 이들은 이날 관용차량과 시영버스는 물론 파출소 등 공공기관까지 불태웠죠. 정부나 언론은 즉각 “무지하고 가난한 폭도”들의 ‘폭동’이라 규정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에겐 수년에 걸친 건의, 진정, 호소, 시위와 집회도 먹혀들지 않자 최소한의 생존권·주거권을 위해 마지막으로 선택한 싸움이었습니다.

1969년 자신이 추진한 공사 준공식의 준공가위들의 모아놓은  김현옥시장 | 서울역사박물관

1969년 자신이 추진한 공사 준공식의 준공가위들의 모아놓은 김현옥시장 | 서울역사박물관

준공가위 앞에 선 김현옥 시장의 모습입니다. 현대 서울의 모습을 만든 시장이지만 개발 논리를 앞세우며 공사를 밀어붙이다 날림공사를 낳은 장본인이기도 합니다. 빈민들을 몰아낸 불도저라는 비판도 받습니다. 여러분은 김현옥 시장을 어떻게 평가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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