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을 페미니스트 유토피아로”…586정치 맞선 성평등 정치

2018.05.18 16:35 입력 2018.05.18 18:55 수정

신지예 녹색당 서울시장 예비후보의 ‘신선한 도전’

신지예 녹색당 서울시장 예비후보(오른쪽 두번째)가 ‘강남역 여성 살해사건’ 2주기였던 지난 17일 저녁 서울 신논현역 6번 출구 앞에서 서울에 페미니스트 시장이 필요한 이유에 대해 발언하고 있다. 이준헌 기자 ifwedont@kyunghyang.com

신지예 녹색당 서울시장 예비후보(오른쪽 두번째)가 ‘강남역 여성 살해사건’ 2주기였던 지난 17일 저녁 서울 신논현역 6번 출구 앞에서 서울에 페미니스트 시장이 필요한 이유에 대해 발언하고 있다. 이준헌 기자 ifwedont@kyunghyang.com

문을 들어서자마자 오른쪽에 놓인 콘돔 자판기가 눈에 띈다. 100원만 넣으면 살 수 있다. 단, 10대 청소년만 사용 가능하다. 자판기 한가운데에 ‘누구나 안전하게 사랑할 권리가 있습니다. 콘돔은 성인용품이 아닙니다’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청소년의 안전한 사랑을 위하여 만 19세 이상 성인의 사용은 지양’한다. 청소년의 콘돔 접근성은 청소년 건강과 직결된다. ‘10대의 성’을 외면하려고만 하는 사회 분위기에서 피임 없는 성관계는 원치 않은 임신으로, 다시 인공임신중절 수술로 이어져 10대의 건강권을 침해해 왔다.

콘돔 자판기를 지나면 오른쪽으로 이어진 통로에 화장실이 나온다. 두 개로 나눠진 화장실에는 흔히 봤던 남녀 구분 표시가 없다. 대신 남성, 여성, 성소수자를 상징하는 그림 아래에 ‘성별과 상관없이 누구나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라는 안내문구가 적혀 있다. ‘성중립 화장실’이다. 성소수자들이 남성과 여성으로만 구분된 공중화장실을 이용하는 것에 대한 불편함을 호소하면서 트랜스젠더, 동성애자, 양성애자를 비롯해 모두가 이용 가능한 ‘성중립 화장실’의 필요성이 제기돼 왔다.

‘웰컴 투 페미니스트 유토피아’라고 쓰여 있는 이곳은 서울 서초구에 위치한 신지예 녹색당 서울시장 예비후보(28)의 선거사무소이다. “여성들이나 성소수자들이 자신의 신념과 생각에 대해 위협을 받지 않고 말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려고 했습니다.” 신지예 후보 캠프 홍보 담당자인 장서진씨가 설명했다. 선거사무소를 만드는 과정부터 여성들이 나섰다. “목공 등 기능을 가진 분들을 모집했어요. 기술 없는 분들도 오셔서 직접 벽을 부수고 선거사무소를 만들었어요. 후보도 같이 참여했는데 여성에게 가로막혀 있는 기존 정치의 벽을 부순다는 의미였죠.”

■지방선거 출마자 70%가 여성

지방선거를 앞두고 소셜미디어에서 한바탕 논란이 일었던 포스터가 있다. 더불어민주당이 선거홍보용으로 제작한 17개 광역단체장 후보 지도다. 파란색 지도는 남성 정치인의 얼굴로 꽉 채워져 있었다. “그 포스터에 여성이 딱 한 명 있었거든요. 바로 ‘더불어민주당’ 피켓을 들고 있던 여성 일러스트였어요.” 지난 16일 오후 서울 종로구 녹색당사에서 만난 신지예 후보가 말했다. 민주당 홍보물이 논란이 되자 녹색당은 이번 지방선거 출마자의 70% 이상이 여성임을 표시한 녹색 지도를 올렸다. “정당은 정치인으로 말한다고 생각해요. 여성 정치인의 존재는 그 정당이 여성이 정치할 만한 문화와 생태계를 만들어놓고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녹색당은 후보를 공천으로 뽑지 않아요. 해당 지역당의 풀뿌리 지역위원회에서 투표로 선출합니다. 내부 평등문화 약속문이나 여성 과반제를 시행하고 있고요. 당대표도 여성, 남성 각각 한 명씩 뽑게 돼 있어요. 만약 민주당이 여성 과반제를 실시하거나 내부에 평등문화가 있었다면 지금 광역단체장 후보가 그렇게 나올 수가 없겠죠.” 공천을 통해 후보를 선발하는 시스템으로는 남성 정치인들이 여성 정치인들에게 좀처럼 자리를 내어주지 않을 것이라는 지적이다.

“서울을 페미니스트 유토피아로”…586정치 맞선 성평등 정치

입구부터 튀는 선거사무소
청소년 전용 콘돔자판기에 성소수자 위한 성중립 화장실 “웰컴 투 페미니스트 유토피아”

왜 서울시장 선거에 나섰나
기존 정치는 여성들 대변 못해 성차별과 여혐에 맞서 싸워 페미니즘의 정치화에 앞장

‘5% 득표’ 고지 향해 돌격!
박원순표 586정치는 이젠 한계, 민주주의 경험한 세대가 나서야…당선 땐 동반자등록조례 발의

유력 정당들의 남성 중심 공천은 지금까지 정치가 여성들을 대변해오지 못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낙태죄 폐지를 주장하는 검은옷 시위, 강남역 여성 살해사건 이후 포스트잇 추모 물결, 미투 선언 등 한국 사회에서 잇달아 터져나오는 여성들의 목소리를 정치는 제대로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지난 17일 강남역 여성 살해사건 2주기를 맞아 신 후보는 당원들과 함께 ‘우리가 서로의 용기다’ ‘서울에 페미니스트 정치가 필요한 이유’ ‘여성에게 국가는 없다’ 등이 쓰인 피켓을 만들었고, 서울 신논현역 앞에서 여성 정치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정당연설회를 했다. “저는 이번 지방선거에서 페미니스트로서 서울시장에 출마했습니다. 저는 후보로서, 페미니스트로서 뿌리깊은 여성혐오와 성차별에 맞서 싸울 것입니다. 제가 강남역 사건을 추모하면서 이런 정치인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고 두려움에 일어서는 동료들을 보면서 다짐한 일입니다.” 신 후보는 선거 전 과정을 통해 ‘여성 정치’를 보여주겠다는 생각이다. “선거사무소 이름을 ‘페미니스트 유토피아’라고 지은 것도 이 때문이에요. 유토피아가 달나라 같은 이상이 아니라 현실가능한 풍경이라는 것을 보여주려고요. 방배동 50평 남짓한 공간(선거사무소)부터 시작해 서울 전역을 페미니즘으로 물들이겠다는 거죠.”

▶[인터랙티브]강남역 10번 출구 1004명의 목소리

■ 퇴보하는 소수자 인권과 586 정치

선거는 정당과 후보가 정책을 만들고 공약을 제시하는 과정을 통해 공동체가 나아갈 비전을 재정립하고 미래지향적인 가치를 구축하는 계기가 돼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기득권이 세를 규합해 권력을 강화하고 사회 변화에 제동을 거는 시도로 이어지기도 한다. 최근 들어 선거 때마다 이슈로 불거지는 성소수자 인권 문제가 대표적이다. 지난 대선을 앞두고 TV토론에서 자유한국당 홍준표 후보가 “동성애에 반대하는가”라고 묻자 민주당 문재인 후보가 “좋아하지 않는다. 합법화에 찬성하지 않는다”고 말한 대목은 성소수자 인권에 한 발 진전하려던 한국 사회가 선거 국면에서 어떻게 퇴보하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유권자들의 목소리가 아래로부터 밀어올린 차별금지법, 인권조례, 동반자등록법 등은 보수기독교계의 표를 의식한 정치인들의 눈치보기로 번번이 제도정치의 문 앞에서 굴러 떨어졌다. 이번 지방선거에서도 보수기독교계는 선거를 계기로 정치권에 반동성애 기치를 심어놓으려 하고 있다. 지난 4월3일 충남인권조례 폐지안 통과로 힘을 얻은 보수기독교계는 반동성애 여론을 지방선거까지 몰아가기 위해 ‘지방인권조례 폐지 전국 확산대회’ 등을 개최하는 등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자유한국당을 비롯한 일부 정치인들은 이들의 목소리에 호응하고 있다.

신지예 녹색당 서울시장 예비후보의 선거사무소에 비치된 10대를 위한 콘돔 자판기, 성중립 화장실, 선거사무실 개소식에 사용됐던 스티커(위 왼쪽부터 시계방향순으로).

신지예 녹색당 서울시장 예비후보의 선거사무소에 비치된 10대를 위한 콘돔 자판기, 성중립 화장실, 선거사무실 개소식에 사용됐던 스티커(위 왼쪽부터 시계방향순으로).

신 후보는 성소수자 인권 문제나 성평등에 대한 사회적 요구를 기존 제도정치가 제대로 받아 안지 못하는 데 ‘586정치’의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 “지금 국회의원 평균나이가 55.5세로 역대 국회 중 최고령이라고 합니다. 30대가 1명 있고 20대는 한 명도 없죠. 예컨대 동성애에 대해 20대와 장년층의 생각은 달라요. 동성애에 대해 찬반을 묻는 것도 우습지만, 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20대의 대다수는 동성애·동성혼은 질병이나 불법이 아니라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요. 20대는 성소수자를 한 사회의 일원으로 받아들인 지 오래예요. 장년층과 다르죠. 586 정치세력은 이를 정치의제화하지 못해요.”

그런 맥락에서 박원순 서울시장은 586정치의 최대치이자 한계를 보여준다는 평가다. “박원순 시장은 그 세대인 586에서 나올 수 있는 가장 훌륭한 정치인이지만, 586의 한계를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어요. 586은 민주주의를 경험한 게 아니라 만든 세대예요. 태어나면서부터 민주주의를 경험한 세대가 아닙니다. 그래서 민주주의가 어떤 것인지 실질적으로 이해하지 못한다고 봐요.” 신 후보는 서울시장에 당선된다면 취임 첫날 ‘동반자 등록조례안’을 발의한다는 생각이다. “2014년에 만들어진 서울시민 인권헌장은 시민들의 숙의와 토론으로 만들어져 과정도 민주적이고 내용도 좋았어요. 바로 공표하면 되는데 혐오세력들이 성소수자의 인권을 지지하는 내용이 들어있어 안된다며 반발했죠. 박원순 시장이 굴복한 거라고 생각해요.”

■유권자로부터 시작하는 정치

‘586 바깥의 새로운 정치’에 대한 구상은 다시 유권자에서 출발한다. 지난 4월28일 열린 선거사무소 개소식은 다른 후보들의 개소식과는 달랐다. 후보가 중심이 돼 그의 가족, 유명인들이 총동원되는 행사가 아니라 개소식 참가자들이 스스로의 정치적 지향 및 비전을 발표하는 데 방점이 찍혔다. 개소식에는 세 가지 색깔의 스티커가 준비돼 있었다. 초록색 스티커에는 ‘기본소득’ ‘낙태죄 폐지’ ‘청소년 참정권’ ‘성평등 개헌’ 등 녹색당의 정책 10가지가 제시돼 있다. 보라색 스티커에는 ‘싸우는 여자’ ‘미투 이후의 세상’ ‘일상 속 페미니즘’ 등 페미니즘 선언들이 나열돼 있다. 검정 스티커에는 ‘행복한 이탈자’ ‘모난돌’ ‘소확행’ ‘나의 속도’ 등 자신을 설명해주는 삶의 가치들이 쓰여 있다. 이 30개의 목록은 개소식에 앞서 미리 제시된 100여개의 단어들 중 구글 설문조사를 통해 선별한 단어들이다. 참석자들은 자신의 정체성과 정치적 지향 등을 설명할 수 있는 단어를 선택해 벽보에 붙이고 간단하게 이유를 적었다. 2개의 단어만 선택한 사람들도 있고 5~6개의 단어들을 선택한 사람들도 있었다. 이들은 앞에 나와 자신이 왜 이런 단어들을 선택했고 어떤 이유에서 신지예 후보를 지지하는지 발표했다. 정당이나 후보가 정책이나 비전을 일방적으로 제시하는 게 아니라 유권자 스스로 정치의제를 만들어간다는 의미다.

신 후보는 이번 선거에서 5%의 지지를 받겠다는 목표다. 쉽지는 않다. 그러나 결과보다 과정에 방점이 찍히는 선거를 하고 싶다. 선거운동 전 과정이 성평등하게 진행되도록 당 차원의 가이드라인도 만들었다. 본인 의사와 상관없이 정치 공간에서 소외되고 배제되어온 이들이 자신의 모습대로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다른 문화, 다른 정치를 만들어 가겠다는 것이다. ‘나보다 어려도, 딸 같아도, 이제 막 가입한 당원이어도, 동등하게 존중하고 높임말을 쓴다’ ‘발언 시간에 성비를 맞춘다. 남성이 회의, 질문, 토론의 발언을 독점하지 않는다.’ ‘결혼은 했는지, 이성친구가 있는지 등 이성애 정상가족의 고정관념의 질문을 하지 않는다’ 등. ‘평등’이라는 추상적인 단어는 이상적으로만 느껴질지 모른다. 하지만 현실에서 하나씩 약속이 이뤄진다면 이상은 곧 현실이 될 수 있다. “선거 과정에서 녹색당의 지향점을 현실로 만드는 게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는 걸 보여주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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