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문장 속 ‘민주, 복지, 정의사회’를 실현한 건 군홧발에도 굴하지 않은 시민들

2018.11.07 06:00 입력 2018.11.07 06:01 수정

5공화국 ‘공수표 약속’

“민주”, “복지”, “정의사회”. <제5공화국 전사(前史)>는 끝부분에 이 같은 ‘5공의 약속’이 “신뢰의 바탕 위에 현실화되기를 기대한다”고 썼지만 그 약속은 독재와 권위주의로 이어졌다. 이미지 크게 보기

“민주”, “복지”, “정의사회”. <제5공화국 전사(前史)>는 끝부분에 이 같은 ‘5공의 약속’이 “신뢰의 바탕 위에 현실화되기를 기대한다”고 썼지만 그 약속은 독재와 권위주의로 이어졌다.

“지금은 새 시대의 문턱에서 오랜 산고 끝에 배태된 새로운 청사진을 바라보면서 훗날 그러한 약속들이 신뢰의 바탕 위에 현실화되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1982년 5월 완성된 <제5공화국 전사(前史)>는 앞선 박정희 독재정권의 실정, 이후 과도기 민간정부의 무능, 여기에 ‘북괴’와 ‘경제위기’라는 혼란을 잠재울 전두환 대통령의 지도력과 신군부의 애국충정을 드러내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 5공 출범 직후까지만을 다룬 <5공 전사>의 마지막 절은 ‘제5공화국의 출범과 국정지표’다. 전두환 대통령과 신군부, 즉 5공의 ‘새로운 청사진’이자 국민들에 대한 ‘5공의 약속’이다.

<5공 전사>는 5공의 집권 과정을 “사회 저변에 깊게 물들어 있던 온갖 비리와 파쟁의 어두운 그림자가 일시에 표면에 드러남으로써 누적된 상처를 자체 정화해야 했던 불가피한 진통”이라고 표현했다. 또 “ ‘국민적 합의’의 실천에 합당한 실천과제를 찾아야 했다”면서 민주주의 토착화, 복지사회, 정의사회, 교육혁신과 문화창달이라는 4가지 목표를 내세웠다.

가짜 민주주의
여당만 유리한 체육관선거
야당 공천까지 관리한 독재

‘민주주의 토착화’라는 국정지표와 관련, 5공은 겉으로 ‘민주주의’를 지향했다. 중임제한을 기본으로 하는 대통령 단임제를 채택했고 야당후보의 출마를 인정했다.

<5공 전사>는 전두환 대통령이 “헌법에 충실하고 모든 법령을 지키는 것이 바로 정치적 탄압과 권력남용으로부터 해방을 촉진하는 첩경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고 기록한다. 하지만 5공이 말한 민주주의는 그저 형식상 허울뿐이었음을 이후의 역사가 증명한다.

단임제를 채택했지만 여당에만 유리한 ‘체육관선거’는 유지됐다. ‘정치풍토 쇄신을 위한 특별조치법’을 만들어 독재에 협조하지 않는 정치인들의 정치활동을 막았다.

이른바 ‘땡전 뉴스’로 회자되는 언론탄압은 집권 기간 내내 집요했다. 야당의 공천까지 직접 관리하며 사실상 1당 독재체제를 구축한 신군부는 취약한 정당성을 학림·부림사건 등 공안조작으로 덮으려 했다. 결국 ‘가짜 민주주의’는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와 이한열 열사의 희생이 도화선이 돼 1987년 6월항쟁으로 끝을 맺었다.

<b>5공화국 ‘역행한 민주주의’</b> 5공 신군부는 인권 탄압, 언론 검열, 우민화 정책 등으로 민주주의의 암흑기를 만들었지만 시민들은 이에 맞서 참여와 연대를 통해 민주주의의 여명을 밝혔다. 사진은 위부터 1980년 10월 국가보위입법회의 의원들의 선서, 삼청교육대에 끌려간 시민들, 인천시 사회정화추진위원회 주최 체육대회, 불온불법간행물을 논의하는 출판계 사회정화위원회의 회의 장면이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5공화국 ‘역행한 민주주의’ 5공 신군부는 인권 탄압, 언론 검열, 우민화 정책 등으로 민주주의의 암흑기를 만들었지만 시민들은 이에 맞서 참여와 연대를 통해 민주주의의 여명을 밝혔다. 사진은 위부터 1980년 10월 국가보위입법회의 의원들의 선서, 삼청교육대에 끌려간 시민들, 인천시 사회정화추진위원회 주최 체육대회, 불온불법간행물을 논의하는 출판계 사회정화위원회의 회의 장면이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가짜 복지사회
민주 노조 해산·노동법 개악
5공 집권 뒤 노조 수 반토막

<5공 전사>는 전임 정권이 “계층·지역 간 위화감을 조성하고 사회불안 요소를 팽배”하게 했다며 새 정권의 국정지표에 ‘복지사회 건설’을 강조했다.

일부 성과도 있었다. 국민 지지를 얻기 위한 유화정책의 일환으로 5공은 기존 의료보험과 산재보험 적용범위를 확대하고, 아동·노인 등 사회적 약자에 대한 공공서비스를 강화하는 등의 개선을 이뤘다.

하지만 “노동조건 향상은 물론 임금 격차를 완화하고, 근로자 재산형성을 촉진해 기업과 근로자가 공존공영을 할 수 있도록 노사 협력체제를 확립”한다는 전 대통령의 선언과 달리 노동탄압은 극심했다. 5·18민주화운동 이후 이어진 노동계 정화 조치, 민주노조 해산, 노동법 개악 등을 통해 1979년 4947개이던 노조가 1981년엔 2141개로 반토막 났다.

가짜 정의사회
113만명 활동한 지역정화위
지역 사회 통제·감시 기구로

국정지표 ‘정의사회’는 “새 가치관의 정립을 위해서는 사회개혁 주도세력의 시종일관한 열의와 정의감은 물론, 국민 개개인의 의식구조가 바뀌어야 한다”는 취지 아래 ‘사회정화운동’으로 집행됐다. 한국 현대사의 대표적 인권침해로 꼽히는 삼청교육대를 비롯, ‘정화’라는 이름을 악용한 감시와 단속은 집권 내내 이어졌다. 중앙에 사회정화위원회, 전국에 지역정화위원회를 설치해 사회정화운동을 이어간 것이다. 전국 행정단위에 총 113만명, 6만7367개에 이르는 지역정화위원회는 ‘사회 개조’를 명분으로 ‘불순분자 색출’에 앞장서면서 지역사회를 통제하는 감시기구로 운영됐다. 1980년 8월 시작된 사회정화운동은 1987년 6월 끝났지만, 그 조직은 민간단체로 전환돼 ‘바르게살기운동’으로 이어지고 있다.

가짜 문화창달
정치적 무관심 조장이 목적
‘3S’는 손꼽히는 우민화 정책

5공화국은 “민주시민으로서의 자질 향상, 인격의 함양, 확고한 보안의식의 정립, 창의력 개발에 역점을 둔 전인교육”과 동시에 “민족문화의 주체성 확립과 전통문화의 창조적 발전”을 강조하며 교육혁신과 문화창달을 내세웠다. 하지만 3S(스크린·섹스·스포츠)로 상징되는 정책은 우민화의 대표적 사례로 손꼽힌다. 대통령기록관은 “국민들의 정치적 무관심을 조장하기 위한 정부 정책에 기인했던 것으로 평가된다. 즉, 시민들의 정치의식을 문화정책을 통해 약화시키고자 하는 의도”라고 기록하고 있다. <5공 전사> 속 새로운 청사진, 장밋빛 약속은 그저 공수표가 되고 말았다.

<시리즈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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