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75쪽 긴 이야기 종착지는 결국 ‘전두환 집권 합리화’

2018.11.07 06:00 입력 2018.11.07 17:23 수정

98일. 5·18민주화운동이 무력진압된 1980년 5월27일부터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그해 9월 제11대 대통령으로 취임할 때까지의 시간이다. 신군부는 유신체제가 무너진 10·26 이후 ‘서울의 봄’으로 상징되는 국민들의 민주화 열망과 열기를 군홧발로 짓밟으며 제12대 전두환 대통령 만들기와 제5공화국 출범(1981년 3월) 준비에 속도를 냈다. 사전정비 작업인 ‘숙청’과 ‘숙정’이 이어진 것이다. 정적들을 제거하고, ‘사회정화’란 이름 아래 언론과 시민사회, 재계를 옥죄었다. 신군부가 편찬한 <제5공화국 전사(前史)>는 이 과정을 “국민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은 “새 사회 건설”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본문 5·6편 주인공은 전두환…5공화국 출범 과정 그려
국보위 ‘사회 정화’ 명목으로 정치·사회·종교 망라 ‘숙청’

<5공 전사> 본문 5·6편은 제5공화국의 출범 과정과 그 직후를 다룬다. 이제 <5공 전사>의 유일무이한 주인공은 ‘전두환’이다. 중앙정보부장 서리까지 겸임하던 전두환 사령관은 1980년 5월31일 설치된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 상임위원장을 맡는다.

국보위는 대통령 자문기구로 설치됐지만 전 상임위원장과 신군부는 최규하 대통령을 철저히 소외시키며 권력을 휘두른다. 사실 12·12 쿠데타로 이미 실권은 신군부에 있었다.

김대중 등 정적 567명 활동 막고 공무원 5500여명 ‘숙정’
172개 간행물 폐간 ‘언론 탄압’ 조계종 스님 153명 강제연행
삼청교육대엔 4만여명 끌려가…이 중 36%가 전과 없는 사람들

1980년 8월18일 전두환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상임위원장이 청와대를 떠나는 최규하 대통령과 악수하고 있다. 최 대통령은 취임 8개월 만에 사임하면서 ‘헌정사상 최단기 집권 대통령’이 됐고, 15일 뒤 전두환 위원장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1980년 8월18일 전두환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상임위원장이 청와대를 떠나는 최규하 대통령과 악수하고 있다. 최 대통령은 취임 8개월 만에 사임하면서 ‘헌정사상 최단기 집권 대통령’이 됐고, 15일 뒤 전두환 위원장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막강한 권력을 쥔 국보위는 정적들의 ‘숙청’을 단행한다. 이미 5·17 비상계엄과 함께 김대중, 김종필 등 26명은 체포됐고, 김영삼 당시 신민당 총재는 가택연금된 상태였다. 결국 김종필 민주공화당 총재는 국보위 출범 23일 만에, 김영삼 총재는 84일 만에 정계은퇴를 발표한다. 행정부 길들이기 작업도 이뤄졌다. 국보위는 7월 두 차례의 ‘숙정’을 통해 공무원 5500여명을 잘라냈다. <5공 전사>는 “국가관이 투철하지 못하고 오도된 시국관으로 무능·무사안일에 젖었던 자” 등의 “숙정은 깨끗하고 공정한 새 시대를 열기 위한 조치”라고 포장했다.

신군부식의 ‘사회정화 작업’도 사회 전 분야에 걸쳐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됐다. 여론 통제를 위해선 언론 탄압이 필요했고, 무려 172개 정기간행물의 등록을 취소시켰다. ‘한국판 아우슈비츠’로 불리는 ‘삼청교육대’가 나타난 것도 이때다. 국보위는 1980년 7월29일 ‘불량배 소탕계획’(삼청계획 5호)을 만들어 영장 없이 6만여명을 체포했다. 붙잡힌 사람들을 A·B·C·D등급으로 나눴고, 일부는 군부대로 보내 ‘순화교육’을 시켰다. 이른바 삼청교육대다.

그해 8~12월 삼청교육대에 끌려간 시민은 4만여명이다. ‘불량배 검거’라고 했지만, 검거된 사람의 35.9%는 전과가 없었다. 심지어 980여명은 학생이었다. 이 ‘순화교육’ 기간에 적어도 54명이 사망했다.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대표적인 반인권적 국가 폭력이다. <5공 전사>는 이 국가 폭력을 “그동안 사회에 깊이 뿌리박고, 사회의 기강과 질서를 어지럽혀 온 고질적인 사회악의 바탕을 제거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국보위는 사실 출범 당시부터 5·16 쿠데타로 설치돼 권력을 휘두른 국가재건최고회의의 재판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5공 전사>는 이 같은 당대의 지적을 “억측”이라고 주장하며 ‘5공의 전신’ 역할을 한 국보위를 정당화하는 데도 힘을 쏟고 있다. <5공 전사>는 “국보위 설치가 발표되자 한국에서 사실상의 군정이 실시되고 비상계엄이 장기화됨으로써 정치발전이 늦어지거나 심지어는 헌정마저 중단되지 않나 하는 우려도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억측이나 오해는 국보위의 활동과 업적 그리고 국보위 이후의 상황에 비추어볼 때 한낱 기우에 불과했음이 입증됐다”고 적었다.

심지어 국보위 설치의 “불가피”한 이유의 하나로 5·18민주화운동의 재발 방지를 들기도 했다. <5공 전사> 편찬자들은 이후 전 상임위원장의 대통령 취임 직전 분위기를 다루면서 “광주사태 이후 전 국민이 강력한 지도자를 중심으로 국가의 안정과 번영을 갈구하고 있었다”고 기록했다. 군부의 양민학살이 벌어진 민주화운동을 ‘전두환 대통령’ 등장의 필요성을 뒷받침하는 근거로까지 이용한 서술이다.

전 상임위원장은 마침내 1980년 9월1일 11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전 대통령은 곧 7년 단임 간선제 개헌안을 국민투표에 부쳐 통과시키며 5공 출범의 막바지 작업에 돌입했다. 개헌안 공고날인 10월27일엔 ‘불교계 정화’를 들어 조계종 스님 등 153명을 강제연행하는 ‘10·27 법난’을 일으켰다.

이틀 뒤엔 여야 4개 정당을 해산하고, 국보위를 ‘국가보위입법회의’(입법회의)로 개편했다.

국보위를 통해 이뤄졌던 ‘반대 목소리’ 말살 작업인 숙청과 숙정은 입법회의에서도 이어졌다. 입법회의 내 정치쇄신9인회는 정치활동 규제대상자 567명을 선정해 1988년 6월30일까지 정치활동을 일절 금지시켰다.

<b>‘새 사회 건설’이라고 썼지만…</b> <5공 전사> 1866쪽은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통한 신군부의 권력장악을 ‘새 질서, 새 가치관, 새 윤리를 바탕으로 한 사회건설’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새 사회 건설’이라고 썼지만… <5공 전사> 1866쪽은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통한 신군부의 권력장악을 ‘새 질서, 새 가치관, 새 윤리를 바탕으로 한 사회건설’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새 정치 질서”를 위한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사실상 신군부만을 위한 ‘정치권 정리 작업’의 일환이었다. ‘입법 전위부대’ 격인 입법회의 활동에 대해 <5공 전사> 편찬자들마저 그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다. 입법회의 활동 중 반대토론이 회기 동안 한 차례밖에 없었고, 본회의 표결이 불과 두 차례 이뤄진 점을 들어 “5공화국의 새 국회상 정립에 있어서 고려되어야 할 문제점”이라고 적었다.

신군부의 사전정지 작업 끝에 1981년 2월25일 대통령선거인단에 의한 간접선거로 제12대 대통령에 전두환 후보가 당선되고, 3월3일 전두환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제5공화국이 출범했다. 1945년 해방부터 5공 출범 직후까지를 다룬 <5공 전사>의 종착점이다.

<제5공화국 전사>는 모두 2475쪽 분량이다. 그 본문의 마지막 문장은 이렇다. “민주, 복지, 정의사회의 실현이 결단코 한 시대에 한정된 유한목표가 아니라 역사와 함께하는 우리 민족의 영원한 숙제라는 사실도 또한 명심해야 할 것이다.”

결국 이 영원한 숙제를 마음에 품고 ‘민주주의 암흑’의 시대를 극복한 것은 <5공 전사>가 ‘개혁 주도세력’으로 포장한 신군부가 아닌 시민들이었다.

<시리즈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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