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 여신’이 아니고 야구인입니다

2019.04.06 06:00
위근우 칼럼니스트

스포츠채널 야구 프로그램

MBC SPORTS+ 채널은 최근 한화 이글스의 새로운 외국인 치어리더 도리스 롤랑을 한화 외국인 선수들과 함께 비교하며 ‘실질적 슈퍼 에이스’라 칭했다. 여성 치어리더를 전문직이자 업계 종사자가 아닌 남성들의 소비재로 보는 관점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MBC SPORTS+ 채널은 최근 한화 이글스의 새로운 외국인 치어리더 도리스 롤랑을 한화 외국인 선수들과 함께 비교하며 ‘실질적 슈퍼 에이스’라 칭했다. 여성 치어리더를 전문직이자 업계 종사자가 아닌 남성들의 소비재로 보는 관점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나는 프로야구팀 기아 타이거즈의 팬이다. 야구 개막 2주차인 요즘 화낼 일이 많아졌다는 뜻이다. 하지만 야구 중계를 보다보면 나지완의 배트가 허공을 허무하게 가르는 순간보다 더 불쾌한 순간이 종종 생긴다.

투구와 투구 사이, 공수 전환 사이, 잠시의 휴지(休止)마다 카메라가 그라운드에서 치어리더나 젊은 여성 관중으로 향할 때다. 게임의 맥락과는 전혀 상관없는 이 화면 전환의 의도는 꽤 투명하다. 성적 대상화된 여성 이미지를 남성 시청자들, 좀 더 확장하면 남성으로만 구성된 캐스터와 해설자들에게 제공하는 것이다. 여성을 대하는 태도에서 오십 보 백 보인 중계 문화 안에서도 유독 여성 관중과 치어리더에게 집착하기로 유명한 MBC SPORTS+ 채널의 경우 최근 한화 이글스의 새로운 외국인 치어리더 도리스 롤랑을 길게 비추며 “도리스 롤랑, 봉주르”(양준혁 해설위원) 따위의 농담 따먹기나 하더니 아예 한화 외국인 선수들과 함께 비교하며 도리스를 ‘실질적 슈퍼 에이스’라 칭하기도 했다.

MBC SPORTS+, 새 외국인 치어리더 미모 부각시키며 ‘실없는 드립’
중계 중 잠시 ‘틈’이 생기면 치어리더나 젊은 여성 관중 비추는 카메라
모두 성적 대상화된 여성을 남성 시청자·남성 진행자들에 제공하는 것
여성 아나운서의 전문성보단 외모만 부각하는 프로그램들 또한
야구에 대한 담론을 남성이 독식한 기울어진 토양 위에서 만들어져
일부 남성 관점서 벗어나 남녀 모두 불쾌감 없이 야구 즐기는 문화 돼야

포털 네이버 역시 ‘프로야구 新 외인 열전’이라는 짧은 동영상에서 올해 한국 리그에 온 외국인 선수들을 소개하며 ‘끝판왕의 등장’이라는 말과 함께 도리스 롤랑의 춤과 외모를 슬로 모션으로 비춰주었다. “새로운 자랑”(한명재 캐스터) 따위의 말이 도리스 개인이나 치어리더라는 직업에 대한 존중의 의미가 아니라는 건 명확하다. 여성 치어리더의 미모에 대한 과도한 찬사와 집착은 치어리더를 전문직이자 업계 종사자가 아닌 남성들의 소비재로 보는 관점을 드러낼 뿐이다.

새로운 문제는 아니다. 비시즌 기간인 지난해 12월, 삼성 라이온즈 소속 치어리더 황다건은 ‘일베’에 올라온 자신에 대한 성희롱적인 게시물에 의한 피해를 호소한 바 있으며, 이에 동료 치어리더인 심혜성 역시 “‘성희롱이 싫으면 노출 없는 옷을 입어라’라는 말로 피해자에게 모든 책임을 안긴다”고 의식 개선을 호소했다.

시계를 조금 더 뒤로 돌리면 2016년 잠실구장에서 원정팀 SK 와이번스의 치어리더가 한 남성에게 기습 성추행을 당하기도 했다. 한 해 더 뒤로 돌아가면 치어리더계의 슈퍼스타인 박기량이 자신에 대한 악의적 루머를 퍼뜨린 KT Wiz 선수 장성우에 대해 선처 없는 대응을 천명한 일도 있다. 당시 박기량은 “야구장에는 치어리더와 리포터, 배트걸 등 수많은 여성 노동자들이 있다. 모두들 야구를 사랑하며 가슴속에 야구인이라는 단어를 품고 사는 사람들”이라며 자신들에 대한 동업자 정신과 존중을 요구했다. 그때 변화했다면 어땠을까. 2016년의 성추행 사건을 방지했을지도 모른다. 하다못해 2016년에라도 바뀌었다면 어땠을까. 아직 10대인 치어리더 황다건이 성희롱 피해를 당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박기량 사건으로부터 4년이 흐른 지금까지 야구장 내 여성에 대한 의식은 딱히 변한 바 없는 듯하다.

방송 카메라가 투구 한 번 치어리더 한 번, 투구 한 번 여성 관중 한 번 비추는 것이 성추행이나 희롱까진 아닐지라도, 여성 노동자와 팬을 각각의 주체가 아닌 대상화된 존재로 고착화한다. 일종의 타자화라 해도 될 것이다. 프로야구 관중 800만 시대, 관중석의 반이 여성으로 채워졌지만 게임을 바라보는 시선(카메라)과 해석과 발화(해설자와 캐스터)는 오직 남성의 입장에서 구성된다.

이것을 방송사의 상업주의라는 관점만으로 비판하긴 어렵다. 틀린 지적은 아니지만 자칫 야구 시장 안에서 남성 소비자의 구매력과 영향력을 과대평가하는 오류를 저지를 수 있기 때문이다.

담론의 편향성이란 어느 입장이 수적 다수냐 아니냐보단 발화의 자원을 얼마나 독점하고 있느냐로 결정된다. 2013년 스포츠 전문 캐스터인 정우영 아나운서는 자신의 사회관계망서비스를 통해 “현재 여자 아나운서들의 모습이 비정상적이 아니라고 볼 수 있습니까? 4개 케이블채널에서 서로 경쟁하듯 영화제 시상식 MC로 만들고 모 방송사는 보기에도 민망할 정도의 의상이니 정상적인 스포츠 아나운서로 보기 힘들죠”라며 야구 프로그램 내 여성 아나운서들의 성적 대상화 문제를 비판했다. 그의 말대로 “그녀들도 ‘다른 옷 없을까요?’라고 거절하는 용기”를 내야 했을까. 여성 아나운서에 대한 성적 대상화가 결국 야구 방송의 남성 중심적 구조와 담론 지형 안에서 만들어진다는 것을 함께 이야기하지 않을 때, 이는 쉽게 여성 노동자 개인의 책임으로 환원된다. 부당한 일이다. 당장 정우영 아나운서는 그로부터 4년 뒤 2017년 SBS SPORTS <주간야구>를 진행하며 “여자분들은 <주간야구>(에서 하는 전문적 이야기)가 어려울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가 빈축을 사고 사과한 바 있다.

여성 야구 아나운서의 대상화는, 이처럼 여성을 배제 혹은 무시하고 남성들이 야구에 대한 담론을 독식하는 기울어진 토양 위에서 만들어진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아무리 김민아, 김선신 등 여성 아나운서들이 자신의 전문성을 증명해도 매년 각 스포츠채널의 야구 프로그램은 새로운 ‘야구 여신’을 배출하고 홍보한다.

이 때문에 야구 중계와 프로그램의 고질적인 여성 대상화 문제는 최근 영화 시장과 서브컬처 시장에서 제기되는 남성 목소리의 과잉 대표라는 관점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즉 시장에서의 실제 영향력에 비해 남초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한 남성 소비자의 목소리가 과잉 대표되고 담론을 주도한다는 것이다.

가령 앞서 도리스 롤랑을 ‘실질적 슈퍼 에이스’라 칭하는 방송 화면을 비롯한 MBC SPORTS+의 ‘드립’은 다분히 남초 야구 커뮤니티의 정서에 가깝다. 해당 커뮤니티에선 박기량이 인스타그램 라이브 중 페미니즘 스티커를 쓴 것에 대해 “치어리더라는 직업과 페미니즘은 양립할 수 없다”며 그의 지성을 깔보는 게시물과 댓글이 올라오기도 했다.

페미니즘적인 관점에서 여성 치어리더라는 직업이 최종적으론 없어져야 하느냐는 문제와는 별개로, 여성 노동자로서 치어리더의 인권과 노동 환경을 개선하는 것도 페미니즘적인 활동이 될 수 있다는 것은 고려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뷔페니스트’(페미니스트들이 입맛대로 논리를 취사선택한다는 비하어) 따위의 말로 여성 노동자의 주체성을 폄하하는 것이 이들의 수준이다. 이런 목소리들이 단순히 내부 응집력이 있다는 이유로 담론의 주도권을 가져갈 때 공론장의 여론은 왜곡된다.

[위근우의 리플레이]‘야구 여신’이 아니고 야구인입니다

2018년 취임한 한국야구위원회 정운찬 총재는 취임사에서 프로야구가 “야구팬뿐만이 아니라 전 국민의 ‘힐링’이 되도록” 하겠다고 포부를 밝힌 바 있다. 다양한 방법이 있겠지만 그중 가장 쉽고 효율적인 건, 전 국민과는 거리가 먼 일부 남성들 중심의 관점을 벗어나 남녀 모두 불쾌함 없이 볼 수 있는 야구 중계 및 야구 프로그램 문화를 만들어나가는 것이다.

관음증적인 카메라 워크를 없애고, 여성 치어리더와 아나운서에게 짧은 의상을 강요하지 않으며, 여성 소비자들의 목소리에 좀 더 귀 기울이는 것.

한 사람의 야구팬 입장에서, 적어도 기아 타이거즈의 속 터지는 외야 수비가 안정화되길 바라는 것보단 훨씬 빠르고 가능성 높은 ‘힐링’ 방법으로 보인다.

추천기사

바로가기 링크 설명

화제의 추천 정보

    오늘의 인기 정보

      추천 이슈

      이 시각 포토 정보

      내 뉴스플리에 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