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중으로” 미룬 14년…모두의 인권보호는 지연됐다

2020.01.28 06:00 입력 2020.01.28 10:33 수정

차별주의 집단에 휘둘리는 정치가 변해야 ‘입법’ 길 열린다

차별금지법 제정 위해선

[가장 보통의 차별]“나중으로” 미룬 14년…모두의 인권보호는 지연됐다

2007년 참여정부 첫 발의 이후
표심 압력에 7건 전부 폐기·철회

2007년 노무현 정부 법무부가 최초로 차별금지법안을 발의한 이후 권영길·노회찬안까지 더하면 발의된 법안은 총 7건이다. 이 중 5건이 발의 의원의 임기만료로 폐기됐고 2건은 발의한 의원들이 스스로 철회했다. 폐기·철회의 주된 이유는 보수 개신교계의 반대다.

정치권이 차별금지법에 관한 논의·토론을 사실상 중단한 것도 14년째 미제정 상태에 영향을 끼쳤다.

■ 보수개신교 세력의 반대

보수개신교 단체는 2007년부터 차별금지법 입법을 강경하게 반대해왔다. 성적지향, 장애, 인종, 학력, 병력, 고용형태 등 2007년 10월 법무부 법안의 20개 차별금지 항목 중 성적지향을 문제 삼았다. 의회선교연합 등 개신교 단체들은 “며느리가 남자라니 동성애가 웬 말이냐”라는 구호를 내걸었다. “소수자 보호라는 이유로 대부분 국민을 역차별하는 망국적 법안”이라며 비난했다. 한국경영자총협회 등 재계도 학력, 병력 등에 따른 차별금지가 자유로운 기업 활동을 제약할 수 있다고 했다. 법무부 법안은 성적지향, 학력, 병력, 출신국가 등 7개 차별금지 사유를 삭제한 채 법제처에 올라갔다.

마지막 차별금지법안 역시 보수개신교 세력의 격렬한 반대로 철회됐다. 김한길·최원식 의원이 2013년 2월 발의한 차별금지법안을 철회하면서 밝힌 글에서 이를 알 수 있다.

이들은 “법안 발의 이후 기독교 일부 교단을 중심으로 법 제정 반대 운동이 격렬하게 전개됐다”며 “법안을 공동발의한 의원들은 물론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소속 위원·위원회 행정실을 대상으로 한 항의전화로 상당한 업무 차질이 빚어진다”고 했다. 법안은 재·보궐선거를 1주일여 앞두고 철회됐다.

종교사회학 연구자인 김현준 서교인문사회연구실 연구원은 개신교 세력의 ‘표’를 지적했다. 정치권이 개신교인들의 표를 의식해 차별금지법 제정을 꺼린다는 것이다. 그는 소수인 일부 보수개신교 세력의 적극적인 행동이 과잉대표된다고도 봤다.

김 연구원은 “에스더기도운동본부 등 개신교계열 극우단체는 2007년 결성되자마자 직접 국회에 전화하거나, 지역 자치조직에 전화를 독려하는 식으로 반대운동을 했다”고 했다. 그는 “국회의원들은 표를 얻으려고 지역 유지를 만나는데, 목사도 그들 중 하나”라며 “목사들이 ‘동성애 문제는 교리와 밀접한 문제’라며 의원들을 압박할 수 있다”고 했다.

언어·종교·장애·용모·학력 등
20개 넘는 방대한 사유 있지만
반대 논리로 ‘성적지향’만 부각

차별금지법은 ‘성적지향’에 관한 것으로만 협소하게 논의돼 왔다. 정치권에서 법의 본질을 두고 깊이 있는 토론을 한 적은 없다. 19대 대선만 봐도 대부분의 후보는 “차별금지법은 찬성하지만 동성혼은 반대한다”는 피상적 수준의 언급만 했다. 보수개신교 세력의 표심을 얻으려고 동성애만을 콕 집어 차별금지법 제정을 반대하는 정치인들도 있다. 20대 국회도 차별금지법 제정을 논의조차 하지 않았다.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는 핑계를 댄다.

차별금지법은 성적지향에 대한 차별만을 다루는 법이 아니다. 언어, 종교, 장애, 용모 등 20가지 이상의 차별금지 사유를 다룬다. 어떤 사유로든 사람을 차별해선 안되며, 모든 사람이 평등한 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하자는 게 법의 목표다. 하지만 차별금지법의 진면목은 진지하게 논의되지 못했다. 정치권이 대선 국면에서 다룰 땐 ‘동성혼 합법화’ 찬반 여부로 논의가 납작해졌다.

유엔 등 국제기구는 다양한 이유로 한국 정부에 차별금지법 입법을 권고한다. 문재인 정부 들어 차별금지법 입법을 권고하거나 권고 관련 진행 상황을 진단한 유엔 관련 기구만 해도 유엔 경제·사회·문화적 권리위원회, 유엔 인종차별철폐위원회, 유엔 아동권리위원회 등 여럿이다. 이들은 출신·장애·가족 구성 등 사유로 아동을 차별하지 말 것, 인종 차별 관련 법적 근거를 마련할 것 등을 요구하는 과정에서 차별금지법을 논의했다. 가장 최근인 지난해 12월 개최된 유엔 사회권위원회는 한국 정부를 차별금지법 입법 권고에 관해 ‘진전 불충분’으로 평가했다.

■ 차별금지법 제정의 새 전략

“반발 심한 건 차별 심각하단 뜻
오해 없애고 긍정 여론 형성 위해
평등증진법 등 명칭 변화도 방법”

전문가들은 차별금지법 제정에 정치권의 태도 변화가 중요하다고 봤다. 정치권이 성적지향, 성별 정체성 등 일부 항목에 대한 반발을 사회적 차별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고 했다.

조혜인 희망을만드는법 변호사는 “반대 목소리가 많다는 건, 뒤집어 말하면 사회적 차별이 심각하다는 이야기”라며 “차별이 있기 때문에 법을 만들라는 건데, 반대 목소리 때문에 법을 못 만든다는 건 인권 관점에서는 말이 안된다”고 했다.

김지혜 강릉원주대 다문화학과 교수는 저서 <선량한 차별주의자>에서 “애초에 차별금지라는 헌법적 명령을 법제화하려는 공론의 장에서, 그 기본원칙을 거슬러 노골적·조직적으로 차별하는 사람의 주장을 받아들이는 것 자체가 오류”라고 봤다. 그는 “헌법 원칙을 따라야 할 국가기관인 정부와 국회가 그 규율 대상인 차별을 옹호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온 게 지금까지 차별금지법이 제정되지 못한 근본적인 원인”이라고 했다.

시민단체의 전략 변화가 필요하다는 얘기도 나왔다. 김 연구원은 “극우세력이 정치권에 압력 등 영향을 행사한 반면, 차별금지법 제정을 요구하는 시민단체 쪽은 그동안 국민을 대상으로 한 여론 변화에 더 초점을 맞췄다”며 “정당정치에 직접 들어가 활동하는 등 정치·제도적인 측면에서의 변화를 만드는 전략도 고려해야 한다”고 했다.

입법 반대 측을 설득하는 방안도 제안됐다. 법안 명칭 변경을 바꿔 긍정적인 뉘앙스를 주도록 하자는 것이다. 홍성수 숙명여대 법학부 교수는 “차별금지법이 긍정적인 뉘앙스를 갖게 하는 것도 중요하다”며 “ ‘차별금지법’ 대신 ‘평등증진법’ 등의 단어로 바꾼다면 평등 정책을 법제화한다는 의미를 살리면서도 법을 둘러싼 오해를 불식시키고 많은 동의를 이끌어 낼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종교 등 특정 사안에 대해 예외조항을 두는 방법도 있다. 독일의 일반평등대우법에 따르면 신학교 입학 자격은 신앙심 있는 사람에 한한다. 특정 종교·세계관과 밀접하게 연관된 직업·근로관계라고 보기 때문이다.

홍 교수는 “ ‘종교적 예외’를 명문화하진 않았지만 한국의 차별금지법도 당연히 종교 특성에 따른 일부 차별에 대해선 예외로 해석할 것”이라며 “해당 내용을 명시적으로 법에 적는다면 우려를 줄일 수 있다”고 했다.

[가장 보통의 차별]“나중으로” 미룬 14년…모두의 인권보호는 지연됐다

■문재인 대통령

“동성애를 합법화할 생각은 없지만 차별은 반대한다”
-2017년 4월25일 대선후보 4차 TV 토론회

“사회적 합의가 필요”
-2017년 대선

■이혜훈 새로운보수당(당시 새누리당) 의원

“하나님의 나라를 무너뜨리는 이 법을 어떤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혼신의 힘을 다해 밀고 있는지 정확히 알아야 기도할 수 있다”
-2016년 5월31일 차별금지법 반대 포럼 ‘차별금지법 입법 시도 사례 및 입법 진행 상황’ 강연

■박영선 중소벤처기업부 장관(당시 민주당 의원)

“하나님의 이름으로 여러분께 다시 한번 동성애법, 차별금지법, 인권 관련 법
그리고 이슬람 문제, 저희는 결코 이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을 강하게 말씀드린다”
-2016년 2월29일 의원회관 ‘나라와 교회를 바로 세우기 위한 3당 대표 초청 국회 기도회’

■이언주 무소속 의원

“성소수자나 난민에 대한 판단의 영역을 금지하는 건 위험한 ‘전체주의적’ 발상”
-2018년 11월13일 시사저널 인터뷰

■정미경 자유한국당 최고위원

“차별금지법은 평등만 강조해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질서를 부정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2016년 4월 새누리당 수원시(무) 지역 출마 당시 공약집 내용

■김윤덕 전 민주당 국회의원

“동성애에 대해 절대 반대하고 오해의 소지가 있는 차별금지법 철회에 적극적으로 앞장섰다”
-2016년 4월5일 보도자료


■ ‘지금 여기서’ 행해지는 차별에 주목…
“우리 때는” “다른 나라에 비하면”이란 말로 정당화 말아야


본지 인터랙티브 조사 응답자

“이성애·고학력·비장애는 ‘특권’
성별·나이·외모로 차별 받았다”


경향신문은 지난 15일부터 ‘차별·특권 경험’을 묻는 인터랙티브를 진행하며 응답자에게 차별받은 경험과 차별금지법에 관한 생각을 물었다. 응답자들은 성별, 성적지향, 학력, 거주지역, 외모, 나이, 경제력, 장애·병력 범주와 관련해 차별을 받은 경험 등을 털어놓았다.

25세 여성이라 밝힌 한 응답자는 어린 시절 난독증을 앓았다는 이유만으로 차별을 겪었다고 했다. 국어 시간 선생님은 응답자가 한 문단을 제대로 읽지 못한다며 조롱했다. 수업이 끝날 때까지 그 글을 다 읽도록 시켜 응답자는 울면서 글을 읽어야 했다. 그는 중학교를 자퇴한 뒤 검정고시를 거쳐 한국방송통신대학을 다니다가 유명대에 편입했다. 그는 “학벌주의로 수혜를 받는 대학에 다니면서 사람들의 시선이 달라지는 것을 느꼈다”면서도 “시선은 달라졌지만, 저 자신은 달라진 게 없었다”고 했다.

시민단체 종사자라고 밝힌 33세 응답자는 다양한 범주에서 ‘꼬리표’를 달고 살았다고 했다. 그는 “늘 없는 집, 지방 출신, 지방대 출신, 전공 부적응 등의 꼬리표가 붙었다. 없는 집 애들이 더 머리를 굴린다는 소리도 들었다”고 했다.

또 다른 응답자는 “매번 청년에는 20·30대 대졸 이상이거나 직업을 가진 사람만 포함된다”며 학력과 직업으로 차별받았다고 했다. “고향인 전라도에 대한 편견으로 좋지 않은 시선을 느낄 때가 있다”, “대학원에서 어리다는 이유로 연장자에게 인턴 기회를 넘긴 적 있다” 등 30대 여성 응답자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감정적이고 인정욕구가 크다’는 평가를 주변에서 많이 받았다”고 했다.

응답자 다수가 차별금지법을 조속히 제정해야 한다는 의견을 냈다. 한 응답자는 “인권을 후퇴시키는 움직임에 가담하는 정부와 국회에 답답함을 느낀다. ‘사회적 합의’를 운운할 게 아니라 차별금지법을 제정해 무엇이 차별인지, 왜 차별을 겪게 되는지, 차별 없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지 등에 대해 논의하는 장을 만들어야 한다”고 썼다. 다른 응답자는 “자신의 특권을 인지하지 못하고 타인을 차별하는 것이 일상화된 한국 사회에서 차별금지법은 더 나은 사회를 위해 할 수 있는 최소한이라 생각한다”고 했다.

응답자들은 “차별은 개인의 인권을 무참히 짓밟는 행위다. 개인의 인권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차별금지법은 제정돼야 한다” “누구에게나 강자의 면과 약자의 면이 있다. 내가 가해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차별금지법은 만들어져야 한다” “모든 사람이 차별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부터 인식해야 한다” “차별과 혐오에 대해 공적 교육이 이뤄졌으면 좋겠다” 등 여러 답변을 했다.

차별에 대한 생각도 이야기했다. 한 응답자는 차별을 절대적 기준으로 보기보다 상대적으로 살펴봐야 한다고 했다. 그는 “여성에 대한 사회적 차별을 논할 때, 할머니나 어머니 세대와 비교하거나 인도 등 저개발국 여성과 비교하지 말아야 한다. 그들과 비교해 현재 한국 여성들의 삶이 더 낫다고 해도 불법촬영, 데이트폭력, 경력단절, 유리천장 등 각종 문제에 시달린다”고 했다.

27일 오후 2시 기준 1824명이 인터랙티브에 참여했다. 전체 응답자 평균 차트에 따르면 응답자들은 성적지향(이성애), 학력(고학력), 거주지역(서울), 장애(비장애) 범주에서 특권을 누리고 성별, 나이, 외모 때문에 부당한 차별을 받았다고 답했다. 남성 평균 응답은 모든 범주에서 특권 영역에 표시됐다. 여성 평균 응답 차트에서는 성별과 나이 때문에 차별받았다는 응답이 주를 이뤘다.성별을 기타로 표시한 사람들은 성적지향, 나이, 외모, 성별, 경제력에서 차별층에 속했다. 나이대별 평균 응답 결과도 상이했다. 20대 응답자들은 나이, 외모, 성별 범주에서 차별을 경험했다. 30대 응답자들은 경제력·나이·성별에서, 40대 응답자들은 나이·성별에서 차별을 받은 적이 있다고 답했다. 50·60대 응답 평균은 모든 범주에서 특권층에 속했다.


<시리즈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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