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터트롯’의 차력쇼는 어떻게 시청자를 수동적인 소비자에 만족하게 하는가

2020.02.08 06:00 입력 2020.02.08 06:14 수정
위근우 칼럼니스트

출연자도 관객도 살짝 걸리는 ‘수치심’…그걸 버리는 게 ‘쾌락의 룰’

TV조선의 <내일은 미스터트롯>이 지난 6일 27.5%로 종합편성채널 시청률(닐슨코리아 집계) 최고기록을 세웠다. 서바이벌 트로트 경연 콘셉트의 이 프로그램은 2019년 최고의 스타 송가인을 탄생시킨 <내일은 미스트롯>의 후속편이다.  TV조선 제공

TV조선의 <내일은 미스터트롯>이 지난 6일 27.5%로 종합편성채널 시청률(닐슨코리아 집계) 최고기록을 세웠다. 서바이벌 트로트 경연 콘셉트의 이 프로그램은 2019년 최고의 스타 송가인을 탄생시킨 <내일은 미스트롯>의 후속편이다. TV조선 제공

TV조선 <내일은 미스터트롯>(이하 <미스터트롯>)의 장르는 차력이다. 조금 더 그럴싸하게 스펙터클이라 해도 될 것이다. 공중돌기를 하면서도 끊어지지 않고 노래를 부르는 나태주의 ‘태권 트롯’이나 팀 미션에서 ‘아이돌부’가 보여준 애크러배틱 댄스 같은 기예의 장이 펼쳐지기 때문만은 아니다(물론 중요한 이유다). 또한 성악과 트로트 창법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김호중, 탁 트인 성량으로 구성지게 가락을 뽑는 이찬원 등의 열창 때문만도 아니다(물론 이 역시 중요하긴 하다). 이 쇼는 한 치의 모호함도 남기지 않고 시각적·청각적 쾌락에 복무한다는 점에서 스펙터클이다. 근육질 3인조 예스보이즈의 예선 무대는 여러모로 허접했지만, 몸매를 강조한 노골적인 춤사위의 의미는 명확하다. 마스터로 불리는 장윤정 이하 판정단은 이 섹슈얼한 이미지에 대해 합격 버튼을 누르거나 누르지 않을 수 있지만, 저들이 왜 트로트 경연에서 힙업을 강조하는지 의문을 가지진 않는다. 그것이 몸매의 과시든, 성량의 과시든, ‘유소년부’의 귀여움의 과시든, 각각의 모든 순간은 판정단과 시청자의 마음에 들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는 성의 혹은 진정성을 가시화된 이미지로 드러낸다. 하여 여기엔 의미의 해석이 필요하지 않다. 충분히 흡족한지 흡족하지 않은지 주관적 포만감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오로지 즐거움을 주기 위해 몸과 마음을 다 바치는 무대가 종합편성채널 역사상 최대 시청률인 27.5%(2월6일 방영분 기준)로 이어졌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조금 더 부연하자면, 절실함을 인정받기 위한 노력이 극대화됐다고도 할 수 있다. 역시 오디션 프로그램인 Mnet <프로듀스 101> 시리즈도 마이너리거들의 절실함을 강조한 바 있지만, 아이돌 무대와 다른 <미스터트롯>은 특유의 약간의 촌스러움으로 오히려 더 강력한 절실함을 증명해낸다. 4선 국회의원의 아들인 신인선이 에어로빅 복장을 하고도 조금의 민망함 없이 체조를 할 때, 대중을 향한 그들의 구애는 소위 진정성을 획득한다. 민망함은 사치며, 사랑받기 위해선 뭐든지 할 수 있다는 태도. 이것이 이 쇼의 다양한 스펙터클이 재현하는 단 하나의 의미이자 이 쇼에서 허용되는 단 하나의 윤리다. 다시 말해 두 얼굴과 두 가지 키로 한 곡을 소화해낸 한이재의 무대를 보며 놀랄지언정, 대중에게 만족을 줘야 한다는 쇼의 본질에 벗어난 의외성이나 일탈의 순간이 튀어나오진 않는다.

근육질 몸매·에어로빅 복장…
트로트 경연에서 힙업을 강조
판정단은 결코 의문 가지지 않아
시각·청각적 쾌락만 좇는 무대
불편한 질문은 의도적으로 제거

하지만 한 치의 모호함도 의구심도 일탈도 남기지 않는 이토록 투명하고 자명한 의미만 남는 무대라는 것은 어딘가 의심스럽다. 이 모든 순간이 자연스럽고 당연하며 편안하게 느껴지기 위해선, 이 쇼가 서 있는 여러 현실적 지반과 제기 가능한 의문으로부터 무대를 철저히 분리해야 하기 때문이다. 어릴 적부터 주목받았지만 성장이 녹록지 않았던 ‘신동부’ 참가자들이 절실하고 열심히 하고 잘하는 건 당연해 보인다. 하지만 여기엔 그저 어른들의 호기심과 관심으로 아이들을 소비하고 책임지지 않았던 미디어의 무책임이 존재한다. 그들 다수가 출연했던 SBS <놀라운 대회 스타킹>을 연출했던 서혜진 PD가 <미스터트롯>의 기획자란 걸 어떻게 봐야 할까. 또한 이 쇼를 통해 주목받은 현재의 신동 홍잠언, 임도형, 정동원에 대해 미디어와 대중은 어디까지 책임 있는 태도를 유지할 수 있을까. 자신이 쓴 곡을 주겠다는 작곡가 조영수의 호의에 대해 자신에겐 공부만이 길인 것 같다는 임도형의 대답은 귀엽고 엉뚱하지만 이 쇼의 합의된 룰을 뒤집는 가장 일탈적인 순간이었다. <미스터트롯>의 스펙터클이란 이처럼 불편한 질문들을 의도적으로 지운 탈맥락화된 무대에서만 가능할 수 있다.

<미스터트롯>이 일차원적인 의미에서도 길티 플레저지만, 좀 더 복잡한 의미로도 길티 플레저인 건 그래서다. 철학자이자 문예비평가인 롤랑 바르트는 현대사회에서 새롭게 만들어진 신화들을 비판적으로 고찰한 <신화론>에서 “신화란 탈정치화된 파롤(발화)”이고, “신화는 인간 행위들의 복합성을 제거하며, 그 행위들에 단순한 본질을 부여한다. (중략) 신화는 모순이 없는 세계를 조직한다. 왜냐하면 신화가 만들어낸 세계는 깊이를 지니지 않으며 자명성 안에 펼쳐진 세계이기 때문이다. 결국 신화는 모든 것을 투명하게 만듦으로써 세계를 행복하게 한다”고 말한다. 가령 오디션 프로그램은 공정한 경쟁과 능력주의, 연예인에 대한 대중의 절대적인 권리라는 인위적 담론을 마치 당연한 자연의 섭리처럼 전제한 상태에서 진행된다. 이것이 현대의 신화가 작동하는 방식이다. <미스터트롯>이 길티 플레저인 건, 이 프로그램의 정치적 맥락을 지우기 위해 대중을 공범으로 끌어들여서다. 어머니에 대한 사랑을 담은 임영웅의 절창은 그 자체로는 길티 플레저와 거리가 멀지만, 그가 이 경쟁의 ‘진’이 되길 바라는 시청자의 바람을 통해(물론 그 자리엔 장민호, 영탁, 김호중, 누구든 들어갈 수 있다) 게임의 법칙은 정당화된다. 모든 것을 건 참가자의 무대 앞에서 시청하는 대중은 절대적 갑의 위치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오직 의심 없이 즐기는 소비자로서의 자리만이 허용된다. 이것이 바르트가 말한 “탈정치화”이자 신화가 “세계를 행복하게” 하는 방식이다. 이 행복을 즐기려면 TV조선이 마련한 이 미심쩍은 소비자의 왕좌에 죄의식이나 수치심 없이 앉아야 한다. 앞서 말한 단 하나의 윤리는 시청자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구애하는 참가자가 민망해하지 않듯, 받아들이는 시청자도 민망해해선 안된다. 그것이 <미스터트롯>을 유지시키는 쾌락 원리다. 이 세계의 즐거움을 느끼기 위해 수치심을 버리는 게 아니라, 기꺼이 수치심을 버리는 행위 자체가 쾌락적이다.

노골적이던 ‘미스트롯’보다 낫다?
그건 죄책감 줄이는 알리바이일 뿐

[위근우의 리플레이]‘미스터트롯’의 차력쇼는 어떻게 시청자를 수동적인 소비자에 만족하게 하는가

노골적인 성 상품화 문제가 있던 <내일은 미스트롯>(이하 <미스트롯>)과 비교해 <미스터트롯>은 더 마음 편히 즐길 수 있기에 더 큰 인기를 끈다는 분석은 그래서 반쪽짜리다. 당장 대중을 향한 구애가 왜 여성 오디션에선 섹스어필의 방식으로 획일화되며, 남성 참가자들에게는 더 다양한 방식이 보장되느냐는 타당한 문제의식을 차치하더라도 그렇다. <미스트롯>과 <미스터트롯>의 비교 분석은, 대중을 <미스트롯>이냐 <미스터트롯>이냐, 라는 양자택일적(이고 허구적인) 질문으로 끌어들인다. 하여 <미스트롯>의 직관적인 불편함은 상대적으로 <미스터트롯>의 세계에 진입하는 죄책감을 줄여주는 알리바이 역할을 한다. 다시 말해 <미스트롯>보다 <미스터트롯>이 정치적으로 올바른 것이 아니라, <미스트롯>의 명백한 정치적 그름과의 비교를 통해 <미스터트롯>이 정치적 맥락을 지울 수 있는 것에 가깝다. 사실 엄밀히 탈정치화되는 것은 없다. 그저 정치적이지 않은 척할 수 있을 뿐이다. 실은 시청자가 오직 소비자의 자리에서 마치 무한한 자유와 권능을 누리는 듯한 착각을 느끼는 것 자체가 정치적 의미를 갖는다. 또한 경쟁에 던져진 참가자의 절실함과 저자세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 자체가 정치적 의미를 갖는다. 한국에서 정치적으로 가장 보수적이고 종종 올바르지 않은 매체가 탈정치화된 프로그램으로 그 어느 때보다 높은 대중 보편의 호응을 이끌어냈다는 사실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미스터트롯>이 TV조선의 트로이의 목마라는 뜻은 아니다. <미스터트롯>은 단지 재밌자고 만든 쇼일 뿐이며 실제로 재밌다. 하지만 그렇기에 반문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단지 재미를 위해 무엇을 자발적으로 포기하거나 외면하고 있는가. 설마 우리에게 허용된 자유가 ‘원 픽’을 누구로 고르느냐는 자유만은 아닐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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