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워할 시간 필요… 아픔 때문에 자신의 인생 왜곡할 이유는 없죠”

2020.05.01 16:37 입력 2020.05.01 17:04 수정
김진세

부모 이혼으로 너무 힘들어요, 그래서 저는 결혼 안 하고·자식 없이 살렵니다

▶금주의 내담자 20 드라마 ‘부부의 세계’
지선우·이태오의 아들 이준영


고산시 가정사랑병원 부원장으로 바쁜 엄마는 다소 엄했다. 반면 영화 제작을 준비하느라 여유 있던 아빠는 다정다감했다. 중산층 가정의 사랑받는 외동아들로 남부러울 것 없었던 준영은 사춘기를 지나던 어느 날 부모의 불화와 이혼을 접하고 혼란에 빠졌다. 어른에게 기대고 싶어도 엄마는 너무 불안정하고, 아빠는 곁에 없었다.


온 동네를 떠들썩하게 했던 아버지의 외도와 부모의 이혼은 여린 감성의 준영이에게 감당할 수 없는 상처가 됐다. ‘부부의 세계’ 너머에는 부모의 이혼으로 고통 받는 자녀의 세계가 있었다. 드라마 <부부의 세계>의 한 장면.  JTBC 제공

온 동네를 떠들썩하게 했던 아버지의 외도와 부모의 이혼은 여린 감성의 준영이에게 감당할 수 없는 상처가 됐다. ‘부부의 세계’ 너머에는 부모의 이혼으로 고통 받는 자녀의 세계가 있었다. 드라마 <부부의 세계>의 한 장면. JTBC 제공

이준영 = ….

김 박사 = 불안해 보이는데, 무슨 문제가 있나요? 아니면 어디가 안 좋아요?

이준영 = … 그냥 화가 나고 힘이 들어서요. … 게다가 제가 저조차도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해요. … 너무 혼란스러워서 미칠 거 같아요.

김 박사 = 많이 힘들군요. 그런데 준영군, 저는 마음이 힘든 사람들을 치유하는 공부와 훈련을 한 사람이고, 준영군도 그런 도움이 필요해서 왔을 겁니다. 하지만 이렇게 이야기해주지 않으면 도움을 주는 데 한계가 많을 수밖에 없답니다.

이준영 = 네. 저를 나쁜 아이로 보실지도 몰라요. 반 친구들 학용품이나 물건을 훔쳤어요. 딱히 저에게 필요한 것도, 갖고 싶은 것도 아니에요. 뭐 그걸 살 돈이 없는 것도 아니고요. 안 그러려고 해도 통제가 안 돼요. 나쁜 짓인 줄 알면서, 어쩔 수가 없어요. 그런데 박사님, 저 같은 청소년은 혼자 상담받지 못하나요? 제가 오늘 부모님을 못 모시고 왔거든요.

사춘기인데 누구와 살아야하죠?

혼란한 마음부터 진정하는 게 중요… 쉬운 선택 아니지만 마음의 준비를

김 박사 = 혼자 온 거예요? 준영군이 의아해할 수 있지만, 보호자가 없는 미성년자는 상담을 받을 수 없어요. 법이 그렇게 되어 있거든요. 하지만 어렵게 시간을 내서 왔으니, 오늘은 준영군 이야기를 들어보는 걸로 할게요. 대신 준영군이 허락한다면, 상담이 끝나고 보호자와 전화 통화를 했으면 해요. 그리고 다음부터는 잊지 말고 보호자와 같이 오세요.

이준영 = 만약 보호자가 못 올 사정이라면요?

김 박사 = 대체 어떤 사정이 있을까요?

이준영 = 부모님이 이혼하셨거든요. 어느 날 갑자기 사이가 나빠지더니, 매일같이 싸우셨어요. 그러니 저 따위가 얼마나 힘든지 관심조차 있겠어요? 그런 사람들이 저를 위해 병원에 같이 올까요?

김 박사 = 아, 큰일이 있었군요.

이준영 = 사실 처음에는 담담했어요. 쉬쉬해서 그렇지, 알고 보면 부모님이 이혼하고 한부모와 같이 사는 친구들이 적지 않거든요. 그래서 저도 아무렇지 않을 줄 알았어요. 근데 막상 두 분이 헤어지기로 하고, 제가 누구와 살아야 하는지 결정해야 하는 순간이 오니까 정말이지 숨이 막히더라고요.

김 박사 = 혹시 부모님이 왜 헤어졌는지 이야기해줄 수 있겠어요? 어렵다면, 다음 시간에 보호자에게 들어보도록 할게요.

이준영 =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제가 도움을 받으려면, 박사님 말씀대로 숨김없이 털어놔야겠죠? 아빠에게 다른 여자가 생겼어요. 엄마가 그 사실을 알게 되었고요. 누가 봐도 아빠는 나쁜 사람이고, 엄마는 피해자예요. 근데 솔직히 말하면, 제 마음은 좀 달랐어요. 제 입장에서 보자면, 엄마가 들으면 마음 아프겠지만 아빠가 제게 나쁜 짓을 한 것도 아니잖아요. 솔직히 엄마와는 그리 친하지 않아요. 아, 네, 엄마는 훌륭한 분이세요. 뛰어난 의사 선생님이니까요.

김 박사 = 준영군이 어떤 마음일 것이라는 상상이 가네요. 저도 의사지만, 의사라는 직업이 자칫 가족들의 희생을 담보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적지 않아요. 물론 다른 직업도 마찬가지겠지만, 지나치게 바깥일에 몰두하다 보면 자녀들에게 소홀히 할 수도 있어요. 좋은 의사가 좋은 부모가 아닐 수도 있을 겁니다.

이준영 = 네, 알아요. 요즘처럼 코로나19로부터 국민을 지켜주는 일도 하셔야 하고, 가족들 먹여 살리려면 힘드시겠죠. 근데요, 저에게 필요한 것은 따로 있어요. 저도 사춘기인데, 엄마는 한 번도 제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어준 적이 없어요. 겉보기에는 아무 문제없는, 그런 엄마와 아들 사이였으니까. 적어도 이번 일이 있기 전까지는요. 좋은 학원 보내주고, 밥 챙겨주고, 용돈 주고 … 다른 부모들도 다 그렇게는 하잖아요. 아니 부모가 아니어도 그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렇지만 아빠는 달랐어요. 저랑 잘 놀아주셨죠. 제 이야기에, 생각에, 감정에 귀 기울여 주셨어요. 그런데 왜 아빠가 그런 짓 하셨는지! 저는 상상도 못했어요. 최소한 아빠는 세상에서 나를 제일 사랑하는 사람인 줄 알았으니까요.

견고해 보이던 <부부의 세계> 속 중산층 가정은 배신과 불륜으로 인해 전쟁터로 뒤바뀐다.<br />JTBC 제공

견고해 보이던 <부부의 세계> 속 중산층 가정은 배신과 불륜으로 인해 전쟁터로 뒤바뀐다.
JTBC 제공

김 박사 = 많이 혼란스럽겠어요. 아까 아빠가 준영군에게 나쁜 짓 한 것은 아니라고 했는데, 결국은 준영군을 힘들게 한 건 사실이잖아요. 그런데도 준영군은 아빠에게로 마음이 가나 봐요?

이준영 = 정말 미칠 지경이에요. 하루에도 마음이 몇 백번씩 변해요. 엄마와 아빠 중 누가 나쁜 사람일까, 누구와 함께 사는 것이 좋을까. 제가 아직 어리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는 아니라고요. 처음에는 엄마와 사는 게 편할 수 있겠다 생각했어요. 경제적으로 여유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요. 또 제가 아빠를 따라간다고 하면 주변 사람들이 어떻게 볼까, 걱정도 됐거든요. 그래서 엄마와 살기로 했어요. 쉬운 선택도 아니었고, 선택 후의 삶이 편안하지만도 않았어요. 그러던 어느 날 아빠가 나타난 거예요.

김 박사 = 아버지는 어떤 모습으로 돌아오셨나요?

이준영 = 많이 달라졌어요. 아빠는 수년간 영화를 만들겠다며 준비만 하고 있었는데, 드디어 그걸 이룬 모습이었어요. 옷차림과 눈빛을 보니 성공한 티가 나더라고요. 그런데 화가 났어요. 아빠를 빼앗겼다는 생각이 그때 처음 들더라고요. 재혼을 하셨더군요. 그럴 수 있죠. 그러려고 엄마랑 헤어진 거니까. 근데 아이까지 낳았더라고요. 너무 화가 났어요. 어떻게 저 말고 다른 자식을 낳을 수 있죠? 아무리 참으려고 해도, 제가 너무 감성적이라 그런지 몰라도, 자꾸 아빠가 보고 싶은 거예요. 다시 만난 아빠는 한결같이 제게 따뜻했거든요.

김 박사 = 우선은 혼란스러운 마음을 가라앉히는 것이 제일 중요하겠어요. 준영군이 학교에서 벌인 행동은 너무 혼란스러운 심리상태에서 생기는 일탈행동 같습니다. 좀 더 상담을 하면 좋아질 수 있으니, 너무 걱정은 말아요.

이준영 = 아, 정말 다행이에요. 저는 제가 미치는 줄 알았어요. 무서웠고요.

김 박사 = 지금은 잘 이해 못할 수도 있고, 그런 것이 당연해요. 어쩌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더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부모님이 결혼할 때도 그분들의 선택이었듯이, 헤어지는 것 또한 그분들이 선택한 거예요. 아무리 사랑했던 사이라도, 살다보면 관계를 끝내는 것이 반드시 필요한 경우가 있거든요. 준영군을 미워하거나, 준영군이 안중에도 없거나, 소중하지 않은 것은 아니랍니다. 억지소리같이 들릴 수도 있겠지만, 예전처럼 매일같이 싸우는 부모와 사느니, 한부모라도 안정적인 환경을 제공할 수 있는 분과 같이 사는 편이 더 건강해질 수 있거든요.

이준영 = 네, 안다고요. 머리로는 아는데 가슴은 힘들어요. 나 때문에 헤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은 아는데, 제가 한없이 초라해져요. 나란 것은 존재하지 않았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절망감이 들었어요. 이러려면 뭐 하러 나를 태어나게 했을까요? 이렇게 버릴 거면서 말이죠. 정말 두 사람을 용서할 수는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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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박사 = 당연한 감정이에요. 버림받았다는 감정이 오래가지 않았으면 좋겠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는답니다. 안타깝게도 평생 준영군의 가슴속 깊이 남을 수도 있겠죠. 그래서 지금은 오히려 미움의 감정이 도움이 될 수 있어요. 이해하기에는 너무 가슴 아픈 사실이기에, 차라리 모른 척 미워하는 것이 나아요. 이해하기 전에 충분히 미워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물론 그 미움 때문에 성장의 과정에서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어요.

이준영 = 짐작이 가요. 저는 죽어도 결혼 같은 거 안 할 거예요. 당연히 자식도 만들지 않을 거고요.

김 박사 = 네, 그런 선택 역시 준영군 몫이에요. 좀 더 시간을 갖고 고민해볼 문제예요. 부모가 아픔을 주었다고, 그 아픔 때문에 내 인생을 왜곡할 이유는 없어요. 신중하게 생각해보다가, 성인이 되어서 그런 선택이 옳다는 믿음이 들면, 그때 가서 비혼이든 결혼이든 선택하면 되겠죠.

이준영 = 제 인생이니, 부모가 겪었던 비극의 그림자에 깔려 있지 말라는 말씀이죠? 명심할게요. 또 하나 의논 드릴이 있어요. 만약 제가 아빠와 함께 살기로 한다면요. 아까 말씀드렸듯이 그 집에 어린아이가 있거든요. 그 아이와 제가 함께 잘 살 수 있을까요? 비슷한 처지의 친구들 이야기 들으면 너무 힘들다던데요. 외동인 제가 갑자기 생긴 동생과 잘 지낼 수 있을지 자신이 없어요. 매일같이 싸우면 어떻게 하죠? 그 아이 엄마가 저를 미워하면요?

김 박사 = 요즘은 이혼이 과거보다 늘었잖아요. 그렇다 보니 전에는 생각지 못했던 상황이 나타나요. 그중에 하나가 ‘재구성가족’의 등장이죠. 갑자기 동생이 생기기도 하고, 맏이였던 아이에게 형이나 언니가 생기기도 하고요. 그렇게 가족의 구조가 바뀌는 것도 힘든 이슈지만, 새롭게 생긴 형제자매 관계가 쉽게 원만해지지 않는다는 거죠. 부모님들이 준비시켜 주시겠지만, 준영군도 마음의 준비가 필요해요.

새 동생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섣불리 관계 정립 나서는 것 금물, 스스로 원하는지 생각하고 결정을

이준영 = 어떤 준비요? 어떻게 해야 동생을, 아니 그 아이를 제가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김 박사 = 새로운 형제 관계를 정말 준영군이 원하느냐가 제일 중요해요. 물론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스스로가 새로운 관계를 맺길 원하는가를 알아야죠. 아직 부모님 이혼의 상처가 가라앉지 않았다면, 조금 기다리길 권해요. 물론 완전히 그 상처가 아물 수는 없겠지만, 혹시 생길 수 있는 관계 속의 갈등을 참을 수 있는 정도는 되어야 해요. 만약 준비가 안 되었다면, 부모님에게 알리고 좀 더 기다려 보세요. 섣불리 관계를 정립하려다가, 세상 원수가 되기도 하거든요. 물론 준비만 잘한다면, 친형제보다 가까워질 수도 있지요.

이준영 = 서두르면 안 되겠네요. 또 뭐가 필요하죠?

김 박사 = 형제자매가 될 당사자들은 친구를 사귀듯 천천히 다가서면 돼요. 부모의 이별로 인해 치유하기 힘든 상처를 받았다는 공통점이 있으니, 어쩌면 더 쉽게 ‘절친’이 될 수도 있죠. 하지만 자신에게 상처를 준 가해자로 여긴다면, 그만큼 극복하기 힘든 일도 없을 겁니다. 사실 제일 중요한 것은 부모들의 준비와 태도예요. 상처받은 아이들을 위한답시고 편애해서는 절대 안 됩니다. 부모로서 스스로의 감정을 잘 통제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이들을 어른스럽게 대해주는 것도 도움이 돼요. 상처를 받을수록 아이들은 부쩍 자라나니까요.

이준영 = 쉽지 않겠네요. 이미 아빠 엄마도 사람 때문에 상처가 많은데, 아이들까지 잘 챙길 수 있을까요? 저, 더는 상처받고 싶지 않아요.

김 박사 = 어쩌죠, 준영군. 또 상처를 받을 수 있어요.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아도, 또 받고 싶지 않아도 말이죠. 하지만 이런 것이 삶의 일부랍니다. 중요한 것은 삶은 스스로 선택하고 만들어 가는 것이라는 사실이에요. 양육과 성장은 부모의 절대적인 지배를 벗어날 수 없으니, 우리 삶의 기초는 어쩔 수 없이 그분들의 영향 안에 있을 수밖에 없어요. 그렇지만 성인이 되면 달라져야죠. 완전히 벗어날 수 없더라도, 독립된 성인으로서 성장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해요. 인생은 완성되는 것이 아니에요. 인생의 본래 모습은 노력하는 과정에 있답니다. 같이 노력해요. 부모님도 함께요.

▶필자 김진세

[김진세 박사의 K상담실]“미워할 시간 필요… 아픔 때문에 자신의 인생 왜곡할 이유는 없죠”


정신과 전문의 김진세 박사는 슬럼프 극복을 위해 떠난 산티아고 순례길에서도 ‘길 위의 카운슬러’로 나섰던 천생 상담가다. 고려제일정신과의원 원장으로 20년 이상 진료실에서 상담을 하고, 정신 건강과 관련된 수백편의 글을 써왔다. 저서로 <심리학 초콜릿> <행복을 인터뷰하다> <태도의 힘> <길은 모두에게 다른 말을 건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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