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는 ‘실질 대책 외면’ 지자체는 ‘방치’…지역 전세사기 피해자들, 기댈 곳이 없다

2023.12.01 21:29 입력 2023.12.01 21:30 수정

특별법 시행 6개월…개정 촉구

“피해지원금 안 쓰고 만남도 회피…울화통만 터진다”
지역 전세사기 피해자들 ‘눈물’
8일까지 동시다발 1인 시위 열어

<b>대통령을 향한 호소</b> 한 전세사기 피해자가 지난달 30일 용산 대통령실 청사 인근에서 피해자들에게 도움이 되는 대책 도입을 촉구하는 1인 시위를 벌이고 있다. 이준헌 기자 heon@kyunghyang.com

대통령을 향한 호소 한 전세사기 피해자가 지난달 30일 용산 대통령실 청사 인근에서 피해자들에게 도움이 되는 대책 도입을 촉구하는 1인 시위를 벌이고 있다. 이준헌 기자 heon@kyunghyang.com

전세사기 피해지원 특별법이 1일로 시행 6개월을 맞았다. 하지만 전국 각지의 전세사기 피해자들은 피해자 실질 구제를 위해 특별법을 개정하자는 요구를 외면하는 정부·여당에 더해 지방자치단체의 방치로 “두 번 상처를 입는다”고 호소하고 있다. 중앙정부가 전세사기 피해지원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 상황에서 여러 지자체는 사기 피해자들과의 소통마저 외면하고 있다.

■ 지원 예산 63억 중 62억 날린 인천

인천 미추홀구 전세사기 피해자 안상미씨는 지난달 27일 인천시청 앞에서 ‘인천시장, 조직적 전세사기 피해자 대책 마련 대화 촉구’라고 적힌 팻말을 들고 섰다. 인천시가 올해 전세사기 피해지원을 위해 편성한 예산 63억원 중 사용하지 않은 62억원을 ‘불용처리’하겠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새로 편성된 내년도 예산도 11억원으로 삭감됐다.

인천시는 올해 초 미추홀구 전세사기 피해자 4명이 숨지자 지난 4월 추가경정예산으로 피해자 지원에 63억원을 편성했다. 대출이자와 월세, 이사비 지원 등 당장 집에서 쫓겨날 위기에 처한 피해자들을 지원하는 것이 주목적이었다. 인천시는 “예산 편성 이후 특별법이 시행되면서 시의 지원사업 수요가 줄었기 때문에 예산 사용이 적었다”고 설명했다.

안씨는 “처음부터 대책위가 예산 항목을 지금처럼 책정하면 실질적 지원이 안 된다고 분명히 얘기했다”면서 “피해자들의 목소리가 반영되지 않았던 탓에 불용예산이 이렇게 많이 남은 것”이라고 말했다. 피해자마다 대출 여부와 피해 상황이 다른데 애초 시가 지원 대상을 너무 협소하게 잡아놓고 적극적으로 지원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전세사기 피해자 인천 대책위는 “남은 예산을 피해자들이 처한 상황에 맞춰 유연하게 쓸 수 있는 긴급지원금 형태로라도 사용하라”고 촉구했으나 시는 ‘법적 근거가 없다’며 불용처리 계획을 굽히지 않았다. 피해자들은 건물주 일당이 구속되는 바람에 피해 주택을 관리하지 않고 있어 단수와 승강기 고장 등에도 시달리고 있다.

안씨는 인천시의 소극적인 태도에 답답함을 토로했다. 그는 “유례가 없는 피해가 발생했는데 왜 시장 직권으로라도 대안을 찾으려고 하지 않는지 모르겠다”면서 “피해자가 숨졌을 때는 모든 지원을 할 것처럼 이야기하더니 이제 와선 ‘당장 쫓겨나는 것 아니면 해줄 수 있는 게 없다’는 답만 반복한다”고 말했다.

■ 피해자 안 만나는 대전

대전 전세사기 피해자 전성진씨는 지난 8월 이장우 대전시장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피해자들과 간담회를 열어달라고 요청하는 댓글을 달기 시작했다. 피해 상황을 알리고 싶다고 요청했지만 시장 측으로부터 되돌아온 것은 ‘계정 차단’이었다. 직접 단 댓글이 삭제되기도 했다는 전씨는 “대전시장의 언론플레이에 피해자들 울화통이 터지는 상황”이라고 했다.

피해자들이 기자회견을 열어 ‘댓글 삭제’를 규탄하자, 이 시장은 지난달 27일 “(공무원들의) 소극적 대처에는 엄중한 책임을 묻겠다”는 입장을 냈다. 이에 전씨는 “공적 자리에서 전세사기 문제를 언급하지 않던 사람이 아랫사람들에게만 그렇게 얘기하다니 염치가 없다”고 했다. 다른 피해자들도 “시장이 제일 적극적으로 대처를 안 했다” “시장이 안 나서는데 말단 공무원들이 무슨 수로 적극적으로 나서냐”는 반응을 보였다.

피해자들은 대전시가 전세사기 피해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며 “시장이 피해자들을 직접 만나지 않는 것이 주된 이유”라고 했다. 다가구주택에 전세계약을 한 전씨는 임대인과 공인중개사로부터 선순위 보증금이 4억5000만원이라고 들었지만 실제로는 10억4500만원이었다는 것을 입주 후 1년이 지난 6월에서야 알게 됐다. 계약 당시 전씨가 선순위 보증금을 확인할 방법은 없었다.

그런데도 대전시는 지난달 SNS를 통해 전세사기 피해지원센터 확대 운영을 홍보하며 “임대차계약 시 선순위 임차인의 확정일자와 보증금액 확인은 필수”라고 했다.

전씨는 “다가구주택은 계약 전에 세입자가 선순위 보증금을 알아볼 방법이 제도적으로 전무해 사기꾼이 이 허점을 이용한 것”이라며 “피해자와 간담회조차 진행하지 않으니까 시가 이런 기본적인 부분도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것 아니냐”고 했다.

대전 대책위에 따르면 대전 전세사기 피해 가구 중 92%가 특별법상 사각지대에 놓인 다가구주택 피해자들이다. 전씨는 “특별법이 시행되면 뭐 하냐”며 “지방정부에서 목소리를 내야 중앙정부도 들을 텐데 이렇게 외면하기만 하면 도대체 피해자들은 어떻게 하라는 것인지 답답하기만 하다”고 말했다.

■ “당론 때문에 곤란” 무관심한 대구

대구·경북 지역 피해자들은 “전세사기를 당했어도 서울·경기 지역에서 당해야 했다”고 자조한다.

그만큼 시장·도지사, 지방의원들이 전세사기에 무관심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대구 전세사기 피해자 정태운씨는 “대구시에는 전세사기 피해지원센터조차 마련돼 있지 않다”며 “최근에 만난 어느 국회의원은 ‘피해자 지원도 중요하지만 지금 공천을 준비하고 있어서 도와줄 수가 없다’고 대놓고 얘기하더라”고 했다.

한평생 일가족이 국민의힘 당원으로 살아왔다는 그는 지난달 28일 탈당 신고서를 들고 서울 여의도 국민의힘 당사를 찾아가기도 했다.

전국 전세사기 피해자들이 모여 있는 단체대화방에서도 “대구는 왜 전세사기 상담도 해주지 않느냐” “대구는 시에서 나서서 하는 지원이 적다 보니 다른 지역에 비해 다소 열악한 것 같다”는 하소연이 공유되고 있다.

정씨는 포항, 경주, 구미, 김천에 사는 피해자들이 시청을 찾았다가 “시에서 해결할 문제가 아니다”라는 말을 듣고, 안동에 있는 경북도청까지 방문해 피해 신고만 간신히 하고 오는 모습도 자주 목격한다고 전했다.

이 지역 피해자들은 전세사기 피해는 정치 성향과 무관한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구의원부터 시장까지 전부 정부·여당 기조에 맞춰 전세사기를 소홀히 하는 모습이 답답하다고 했다. 32년을 대구·경북 지역에서 살았다는 정씨는 전세사기 사건이 정리되는 대로 고향을 떠나겠다고 했다.

그는 “알고 보니 자기들 (정치적) 텃밭이라고 생각해 피해자들을 챙기지 않는 사람들이 가득한 곳이었다”며 “여기 계속 있어봐야 그 사람들 배만 불릴 테니 TK 지역을 벗어나고 싶어졌다”고 했다.

전국 전세사기 피해자들은 지난달 30일부터 정부·여당에 특별법 개정 면담을 요구하는 동시다발 1인 시위를 각 지역 국민의힘 시도당사 앞에서 진행하고 있다. 이들의 시위는 정기국회 마지막 날인 오는 8일까지 예정돼 있다.

추천기사

기사 읽으면 전시회 초대권을 드려요!

화제의 추천 정보

    오늘의 인기 정보

      이 시각 포토 정보

      내 뉴스플리에 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