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발이 넘치게, 막걸리로 건배를

2009.10.11 18:55 입력 2009.10.11 19:02 수정
하응백 문학평론가

청록파 시인 조지훈은 그의 수필에서 술꾼을 18단계로 구분했다. 술을 아주 못 먹진 않으나 안 먹는 사람을 최하위인 ‘부주(不酒)’로, 술을 마시긴 마시나 술을 겁내는 사람을 ‘외주(畏酒)’라 하여 그다음 단계에 두었다. 이렇게 올라가서 최고 술꾼의 경지를 ‘폐주(廢酒)’라 이름했다. 이는 술로 말미암아 다른 세상으로 떠나게 된 사람을 말한다. 물론 시인 조지훈도 술 때문에 돌아가셨으니 자신의 글로 본다면 최고의 경지에 오른 셈이 된다.

하 응 백<br />문학평론가

하 응 백
문학평론가

술꾼들 사이에서는 몇 가지 원칙도 있다고들 한다. 첫째는 생사불문(生死不問)이다. 죽고 살고는 따지지 말고 일단 마시고 보자는 것이다. 둘째는 청탁불문(淸濁不問)이다. 맑은 술 탁한 술 따지지 말고 마시자는 것이다. 셋째는 원근불문(遠近不問)이다. 멀고 가까움을 따지지 말고 술과 벗이 있으면 만사 좋다는 것이다. 네번째는 주야불문(晝夜不問)이다. 밤낮을 구분하지 말고 마시자는 것이다. 다섯번째는 현외불문(現外不問)으로 현금과 외상을 따지지 말자는 것이다. 마지막은 남녀노소불문(男女老少不問)으로 술 상대가 누구든 가리지 말고 즐기며 마시자는 것이다.

술꾼의 아내로 고생한 사람이나, 알코올 중독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의사선생님 입장이나, 외상값을 못 받아 울분에 차 있는 술집 주인의 입장에서 이런 술꾼들의 이야기는 기가 막힐 노릇일 것이다. 사실 이런 이야기는 심각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술꾼들이 안주삼아 농담삼아 장난스럽게 하는 것이니 그리 귀담아 둘 것은 못 된다. 비판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술을 못 먹진 않으나 일이나 건강 때문에 안 마신다면 그것 또한 좋다. 내 경험으로는 술을 겁내면서 마셔야 과음에 의한 실수를 방지할 수 있다. 술 때문에, 즉 술병으로 죽는다면 그것 또한 술이 내 인생의 주인이 되는 것이니 과히 바람직하지 않다. 더군다나 생사를 불문하고 술을 마신다는 것은 너무 과한 것이다. 도시생활에서 일상의 분주함은 원근불문이라는 말도 무색하게 만든다. 가끔 강북에서 강남으로 술 약속 때문에 가다 보면, 교통체증 때문에 꽉 막힌 차안에서 ‘왜 내가 그곳에 약속을 정했을까’ 하고 후회하는 경우도 많다.

주야불문이라고 하지만 낮술을 잘못 마시면 그날 일을 망치는 것은 물론이고 그다음 날까지도 술의 후유증으로 고생하는 경우도 많다. 현외불문도 옛말이다. 요즘이야 카드로 계산하는 시대여서 어지간한 단골집이 아니고서야 외상하자고 하면 미친놈 취급받기 십상이다. 남녀노소불문은 더 위험하다. 젊은 이성에게 혹해서 마시다 보면 경제적, 사회적 비용이 만만찮게 든다. 대범한 술꾼이 아닌 소심한 술꾼이어서 이런 말을 하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술꾼의 6계명 중에서 쏙 마음에 드는 것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청탁불문이다.

소주나 청주 같은 맑은 술도 좋지만 탁한 술도 좋다. 탁한 술의 대표 주자가 바로 막걸리다. 요즘 막걸리 붐이기도 하지만 막걸리는 원래 좋은 술이다. 쌀과 누룩으로 빚어 바로 걸러 마시는 것이 막걸리가 아닌가. 주곡 자급화가 목적이었던 시대를 거치면서 막걸리의 원료가 수입 밀가루로 바뀌고, 아스파탐 같은 감미료가 첨가되어 막걸리의 원래 맛이 좀 망쳐지기는 했지만, 최근에는 좋은 막걸리가 많이 생산되고 있다. 와인 장사를 하는 내 친구가 화낼 이야기지만, 출판기념회와 같은 여러 행사에서 왜 굳이 꼭 와인으로 건배를 해야 하는가도 진지하게 고민을 해보아야 한다(샴페인도 와인이다). 막걸리를 잘 담는 장인도 많고 막걸리 잘 만드는 술도가도 많다. 막걸리 만들 쌀도 남아돌아 걱정인데, 우리 막걸리로 건배를 하면 우리의 품위가 손상될까.

“막걸리 장인 하응백이 빚은 막걸리로 건배를 하겠습니다. 사발에 넘치도록 따라주세요. 자, 건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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