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링보다 ‘시묘(侍墓)’

2012.12.20 20:57 입력 2012.12.20 23:09 수정
정희진 | 여성학 강사

영화 <브리짓 존스의 일기>에는 여자 주인공의 스타킹이 찢어져 ‘뚱뚱한’ 엉덩이가 노출되는 장면이 나온다. 직장 동료들 앞에서 민망한 사고를 당한 ‘노처녀’는 창피해서 제정신이 아니다. 하지만 그녀는 이를 악물고 현장이 녹화된 비디오를 반복해서 보고 또 본다. 나름 끔찍했던 사건에 대한 그녀의 치유 방식이다.

회피와 직면 사이에서 대개 사람들은 회피를 선택한다. 공포의 근원은 현실 직면의 두려움에 있기 때문이다. 부인, 합리화, 망각…. 수많은 자기 방어가 생존을 가능케 한다. 그러나 회피는 결국 자신에 대한 거짓말이기 때문에 언젠가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 지나친 경우 자아 경계가 흐트러지는 ‘사이코’가 될 수도 있다. 인간은 자기 발화(發話)를 통해 형성되는 존재여서 방어만 하다보면 내가 누구인지, 내 말이 정말인지 거짓말인지, 누가 누구를 속이고 있는지 모르는 ‘무아지경’에 빠진다.

[정희진의 낯선사이]힐링보다 ‘시묘(侍墓)’

작년에 ‘웰빙’이었다면 올해 그에 견줄 만한 단어는 ‘힐링’일 것이다. 원래 웰빙(well-being)은 복지, 번영의 뜻이라 ‘건강한 심신’을 의미한다면 웰니스(wellness)가 맞다는 지적이 있었다. 힐링(치유)도 치료(treatment)가 더 적합하다. 마음의 상처에는 치유고, 몸의 상처에는 치료인가? 중요한 것은 구체성이다. ‘약 바르고 붕대를 감고 주사를 맞는’ 치료 행위가 연상시키는 구체성.

아무리 좋은 말이라도 많이 들으면 진력이 나는 일반론에서도 그렇고, 원래 힐링은 ‘사기성’을 띠기 쉬워서 나는 이 말을 경계하는 편이다. 치유의 어감은 영적인 통찰과 성장에서부터 일시적인 위안, 혹세무민까지 다양하다.

나 자신이 치유가 시급한 사람이라 시중의 힐링 관련 책들을 탐독하는 편인데, 저자와 독자 사이의 ‘마음의 양극화’를 여러 번 느꼈다. 읽는 사람은 사는 게 괴로워 죽을 맛인데, 책 내용은 ‘한가할’ 때 느끼는 좌절감!(물론 심각한 사람은 책을 읽을 것이 아니라 병원에 가야 한다). 주변에 물어보니 나와 비슷한 경험을 한 이들이 의외로 많아 그게 오히려 힐링이 되었다. 비슷한 경험이란, 책을 읽다가 “열불 나서” 던져버렸다는….

힐링 책은 위약(僞藥) 효과부터 생명 구조까지 다양한 역할을 할 수 있다. 약효가 짧아서 그렇지 위약 작용만 해도 소기의 목적에 충실한 것이다. 그런데 실상은 이조차 약효가 변변치 않다. ‘성공한 멘토’의 훈계에서부터 심지어 지은이의 세속적 스펙에 대한 동경까지, 지당하신 말씀에서부터 종잡을 수 없는 ‘아름다운’ 말까지. 헨리 나우엔의 <상처받은 치유자> 패러다임은 기대하기 어렵다.

웰빙과 달리 힐링은 시장화를 추구할수록 힐링과 거리가 멀어질 수밖에 없다. 개인의 삶이 다양하듯 고통 역시 그렇기 때문에, 힐링 상품의 마케팅이 ‘라면’이나 ‘토플책’과 같을 순 없기 때문이다. 상품이든 담론이든 대량 생산체제에서는 불량품이 나오기 마련인데, 특히 지식이나 마음 관련 제품(?)의 상품화는 ‘하향 평준화’를 피하기 어렵다.

건조한 분석가들은 자기계발서나 힐링서의 범람이 그 자체로 경쟁사회의 재앙이자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절망한 개인의 무력한 대응이라고 말한다. 나는 그렇게까지 생각하지는 않지만, 대부분의 힐링서들이 심리학에서 말하는 고통(grief)의 다섯 단계인 부정, 분노, 타협, 우울, 수용(순서대로 진행되는 것은 아니다) 중 어느 상황에도 도움이 안되는 경우가 많은 것은 사실인 듯하다.

현실을 마주하기보다 관념적인 ‘마음의 안정’을 권하는 책들이 많은데, 힐링은 마음의 평화를 의미하지도 않고 그것이 바람직한 것도 아니다. 아니, 마음의 평화 자체가 불가능하다. 가장 확실한 마음의 평화는 죽음이기 때문이다.

인생에서 인간이 피할 수 있는 유일한 고통은, 고통을 피하는 고통이라고 한다. 브리짓 존스처럼 망신에 직면, 고통에 박치기하는 것이 최고의 힐링이라는 얘기다.

작년에 엄마가 돌아가셨다. 사연 없는 죽음이 어디 있으랴. 나는 1년을 누워 지냈다. 엄마의 부재를 인정하지 못하고 온갖 초자연적 증상을 겪으며 병원을 들락거린 끝에, 내게 빛처럼 등장한 치유는 ‘시묘(侍墓)’였다. 부모의 상중에 3년간 무덤 옆에서 막을 짓고 사는 시묘살이. 예전에는 그저 유교적 관혼상제, 허례허식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보다 더 과학적 치유가 없는 것이다! 시묘는 피하거나 부정하는 방식이 아니다. 상실의 생활화다. 상실 곁에 내내 쪼그리고 앉아서 닿기만 해도 눈물이 터지는 쓰라린, 그러나 절대로 사라지지 않을, 이물질을 몸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과정이다.

도피하는 한, 도피하면 할수록 고통은 품어지기보다 우리를 점령할 것이다. 살아남는 것이 최선인 세상에서는 현실을 으스러지게 껴안으면 조금 덜 아플지도 모른다. 그 현실이 오늘 아침 신문에서 느낀 것, 북한과 달리 자발적 투표로 국민의 권리로서 ‘민주적’ 절차로 부녀 세습을 구현한 대한민국의 모습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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