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에 대한 예의

2013.09.13 22:13
배병삼 | 영산대 교수·정치사상

무심코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개가 짖는 바람에 깜짝 놀랐다. 개 주인은 짖는 개의 입을 막으면서 “인사를 해야지!”라고 한다. 놀람 결에 튀어나왔을 그 말이 우습기도 하고 씁쓸하기도 했다. 이젠 사람이 개한테 인사를 받는 시대다 싶어서다.

애완동물이 늘어난다는 것은 고독한 사람이 늘어난다는 뜻이다. 사람의 행복은 어디에 있나? 부탄의 지성, 카르마 우라는 말한다. “우리는 로빈슨 크루소의 행복을 믿지 않습니다. 행복은 관계 속에 있어요.” 로빈슨 크루소는 개인주의를 상징한다. 개인은 고독한 사람이다. 고독한 개인이 자연을 극복하고 영웅이 된다는 생각이 로빈슨 크루소의 스토리에 들어있다.

[공리공담]인간에 대한 예의

우리는 다르다. 사람을 관계 맺고 사는 동물로 봤기에 한자로 ‘인간’이라고 썼다. ‘인-간’이란 사람다움(人)이 너와 나 사이(間)에 있다는 말이다. 곧 행복은 너와 나 사이, 그 어느쯤에 있다. 다만 그 ‘사이’는 손에 잡히지 않고 눈에 보이지도 않는다는 게 문제다. 하나 육안으로 보이지 않는 너와 나 사이의 행복을, 마음의 눈으로는 발견할 수 있다. 마음의 눈을 기르는 것이 실은 교육이고, 공부하는 까닭이다.

사람이 외로워지면 독해진다. 분노와 증오는 외로움이 빚어낸 질병이다. 우리 사회의 언어가 이토록 거칠어지고, 다시 보지 않을 듯 매몰찬 것도 고독의 소산이다. 고독은 이석기 의원이 좌파 골방에서 뱉은 독화(홀로 하는 말) 속에, 우파 역사 교과서의 독설(홀로 세운 학설) 속에도 가득하다. 독선, 독백, 독점, 독재에는 상대방을 이웃으로 여기지 않고, 아랫사람으로 낮춰보는 우쭐거리는 고독이 덕지덕지 들러붙어 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가면, ‘너를 내가 바꿔주겠다’는 비극의 손길이 탄생한다. 나를 바꾸지 않고, 너를 내 식으로 바꾸겠노라는 오만과 독선이 나치와 파쇼, 일본 군국주의에 공통된 질병이었다. ‘내가 너희를 잘살게 해주겠노라’는 선의가 결국 독재와 전제정치로 끝나는 이유도 여기 있다. ‘너를 잘살게 해주겠노라’는 이른바 위민(爲民) 정치를 의심해야 하는 까닭이 여기 있다. 춘원 이광수의 비극이 자리하는 곳도 여기다.

이광수는 남을 ‘위하여’ 살았다고 자부했다. 해방 뒤조차 이렇게 자문자답한다. “나는 깊이 반성해 보았습니다. 내게는 불순한 동기가 없었더냐고. 내 명리욕을 위한 것이 없었더냐고. 그러나 나는 민족을 위하여 살고, 민족을 위하다가 죽는 이광수가 되기에 부끄러움이 없습니다.”(‘인과’) 평생을 ‘민족을 위하여 살았다’던 사람이 민족을 배신한 결과를 빚은 아이러니, 이것이 그의 ‘위하여’의 비극이자 또 우리 근대사의 비극이다.

생각하면 ‘위하여’는 얼마나 오만하고 또 치욕스러운 말인가. 제 자신은 많이 갖고, 높이 있는 사람으로 자처하면서, 상대방은 모자라고 부족한 존재로 대하는 눈길에서야 ‘위하여’가 나온다. 조국해방을 위하여 시민들의 등에 ‘장난감 총을 개조하여 쏘겠다’는 발상이나, 일본의 식민지 경영이 조선인을 위했다는 발상이나 그 단초는 같은 것이다. 고독이 낳은 지독한 오만, 외로움의 질병이 ‘위하여’다.

이름은 우익인데 머리는 좌익으로 쓴다고 놀림을 받던, 지금은 죽고 없는 농투성이 전우익의 말놀이를 들어보자.

“세상에 있는 물건을 사람만이 독식해서는 안되지요. 새와 곤충이 없이 사람만이 산다면 얼마나 삭막할까요? 그런데도 혼자 먹겠다고 야단이지요. 권력이란 것도 돈이나 농약만큼 독한 것이지요. 그걸 몇몇이서 독식하면 금방 끝장나는데도 한사코 독차지하자고 몸부림치는 꼴이 가관입니다.” 독식, 독존, 독한 것, 독차지로 이어지는 ‘독’의 말놀이는 고독의 질병이 인간을 권력의 노예로 만들고 끝내 ‘사이’가 없는 짐승으로 타락하는 첩경임을 퉁겨준다.

사람을 동등한 이웃으로 영접하는 ‘사이 길’이 예의다. 그러니 무례하다는 것은 큰 욕이 된다. 상대방을 사람으로 대하지 않고, 사물로 소외시키는 태도가 무례함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석기 의원의 말과, 우파 교과서의 진술에 분노하는 것은 특별히 좌파나 우파 어느 일방을 편파해서가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을 모욕하는 무례함 때문이다.

벌써 추석 냄새가 난다. 아파트에는 택배 트럭이 분주히 오가고, 전철에는 선물꾸러미를 든 시민들이 눈에 띈다. 고달픈 세월 속에 그나마 유산으로 남은 농경시대의 추억이 추석이다. 추석(秋夕)은 ‘가을-저녁’이란 뜻인데, 그것이 왜 ‘가을과 저녁’이 되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그렇지만 가을이든 저녁이든 두루 애틋하다. 여름과 겨울이라는 맹렬한 계절 사이에서 둘을 이어주는 것이 가을이듯, 저녁은 한낮과 밤중 사이에 위치한다. 추-석이란 말은 그러니까 사이와 관계의 상징인 듯하다. 우리의 행복이 너와 나 사이에 있다면, 추석은 사람을 사람으로 대접하는 예의의 마당이야 마땅하다. 올 추석은, 지독하게 덥던 지난 여름 일인 양 독선과 오만을 뒤로하고, 사람을 사람으로 접대하는 인간다운 명절이길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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