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를 만나다

2013.11.15 21:13 입력 2013.11.15 22:01 수정
김영민 | 철학자

2년 전 가을에 빌라 생활을 청산하고 기어이 마당이 있는 한옥으로 이사했다. 정몽주와 이색 등의 학맥을 잇는 명유(名儒)이자 영남사림의 종장(宗匠)으로 추앙받는 점필재 김종직 선생의 생가가 있는 마을이다. 그를 추념하는 예림서원(禮林書院)도 지척이다. 밀양의 안산(案山) 종남산을 등지고 밀양강의 사행(斜行)을 굽어보는 지역으로, 나같은 한량이 노량으로 바장이기 좋은 곳이다.

첫 겨울을 넘기고 찾아온 봄날, 어느 아침이었다. 대청마루문을 열고 나서려는데, 신발장 옆으로 고양이 새끼 세 마리가 한 데 엉겨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쥐새끼라도 작은 덕에 예쁜 터, 이 미물(微物)들은 내겐 그야말로 낯선 진경(珍景)이었다. 나는 맹자의 측은지심으로 출렁거리면서 더뻑 그 놈들을 품에 안았다가, 아차차, 다시 내려놓곤, 졸급하게 부엌에서 우유를 가져와서 먹이기 시작했다. 놈들이 우유를 핥아 먹는 모습에 잠시 넋을 놓고 있던 중에, (마치 헬렌 켈러가 후각으로 태풍의 징조를 느끼듯) 어떤 묘한 시선을 느껴 돌아보니 불과 몇 걸음 앞에는 어미임이 틀림없는 고양이 한 마리가 자세를 낮춘 채로 나를 지그시 주시하고 있었다.

[사유와 성찰]고양이를 만나다

수 개월이 지나면서 새끼 중 두 마리는 다시 볼 수가 없었고, 어미도 종적을 감추었다. 그러나 남은 한 마리는 이후에도 꾸준히 내 집을 들락거렸다. 그 놈은 암컷이었다.

그러다가 내가 고양이라는 존재를 참으로 ‘대면’하게 된 것은 올해 여름의 어느 날, 그새 훌쩍 커버린 바로 이 놈이 이번에는 제 새끼를 네 마리나 데리고 내 집으로 찾아들었을 때였다. 이때부터 이 어미는 내게 표나게 부닐기 시작했다. 개나 고양이를 길러본 적이 없는 나는 몇 차례의 착각 끝에 아양을 부리거나 호의를 구하는 태도 등을 구별해서 알아채게 되었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새끼들은 모짝 천방지축이었다. 새끼들은 음식을 향한 즉물적 욕구 속에서 천방(天放)을 구가했지만, 어미는 그 음식의 출처에 대한 ‘사회적(?)’ 관심 속에서 미세한 심리의 분열을 드러내곤 했다. 나는 한 지기에게 농반진반으로 새끼들에 비하면 어미의 얼굴이 마치 ‘지식인’ 표정을 방불한댔는데, 무릇 심화된 매개는 곧 짐승을 벗어나는 노릇일 것이다.

충순한 개와 달리 고양이는 거꾸로 제가 사람에게 주인 행세를 한다고들 하지만, 어미 고양이는 달랐다. 어미는 나의 존재를 인정하고 자신의 깜냥을 십분 이해하는 듯했다. 먹을 것을 요구하다가도 포기할 것은 속히 포기했으며, 스스로 절제할 것에도 제 처지를 분명히 하는 눈치였다. 그는 인간처럼 ‘약속할 줄 아는 동물’(니체)은 아니지만, 최소한 기다릴 줄 알았다.

내가 하루 두세 차례 정도 우유를 주는 사이, 어미는 틈틈이 어디론가 외출한 뒤 쥐나 생선 토막 등을 물어오곤 했다. 흥미롭게도, 어미가 물어온 것은 먼저 채가는 놈이 임자요, 결코 이것 때문에 동기간에 다투는 일이 없다는 점이 차라리 사람보다도 나았다. 이것은 내가 생선이나 고기를 줄 때에도 마찬가진데, 일단 먼저 취득한 놈의 음식을 다른 놈이 넘보는 일은 아예 없었고, 그저 멀찌감치 떨어져서 가히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의 표정 속에 자족할 뿐이었다.

나는 가족이라는 관계에 인간의 희망을 두는 사람이 아니고, 또 모성(母性)에도 시뜻해하는 편이지만, 여기에서도 예의 모성은 엄연했다. 우유와 달리 고기나 생선을 줄 경우에 어미의 태도는 사뭇 달랐는데, 그 요점은 ‘자발적으로 빼앗기는 태도’였다. 새끼들은 하나같이 악지를 부리며 어미 몫을 빼앗아갔고, 어미는 ‘도를 행하면서 날로 덜어내는(爲道日損)’ 눈길 속에 잠잠할 뿐이었다(그러나, 여기에서도 성별 차이는 분명했는데, 내게 접근하거나 음식을 탐하는 행동 일반에서 수컷은 암컷보다 냅뜰성이나 넘너리성이 동뜨게 달랐다). 어미가 혼자 있을 때를 골라 특별한 음식을 주더라도 그는 독식하는 법이 없고, 꼭 제 새끼들을 어디에선가 데리고 왔다.

어쨌든 우리 사이에는 애착이 없으니 ‘애증을 끊어내고 얻은 환함(但莫憎愛而洞然)’을 익힐 뿐이다. 독일에서는 “고양이를 위한 것은 쓸데없는 시간낭비”라고 하는데, 나는 이 슬프게 맑은 가을에 고양이들에게 얻은 게 한둘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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