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KK단과 회식 문화

2013.12.10 20:29
정희진 | 여성학 강사

나는 업무 차원의 식사나 여러 사람이 모이는 자리를 좋아하지 않는다. 학창 시절에도 공부 모임 후 뒤풀이는 공포였다. 당시 가장 큰 이유는 나는 술도 담배도 못하는데, ‘엔(n)분의 일’의 계산법이 억울해서였다. 그리고 정식 모임이 끝난 후에 더 치열해지는 향학열이 이해되지 않았다. 진짜 세미나는 술자리에서 이루어진다. 왜 술 마시며 공부를 할까.

[정희진의 낯선 사이]KKK단과 회식 문화

음식은 혼자 편안하게 아니면 친밀한 사람들과 즐겁게 먹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얼마 전 어떤 ‘높은 분’이 내게 “일 이야기가 있으니 점심 한번 합시다”라고 제안해서 나는 정중하게 e메일을 썼다. “… 영광으로 생각하지만 바쁘신 선생님의 시간을 뺏는 것은 원치 않으니….” 내 요지는 “만나지 말고 메일로 말씀하시라”였다. 그런데 무슨 한국말이 그리 어려운지 상대방은 “식사합시다”를, 나는 “메일 주세요”를 거듭하다가 결국 폭탄이 터졌다. 그는 사람 좋은 어조로 “아이고, 정 선생이 밥보다 술을 좋아하는데 서운하셨구나, 저녁으로 합시다!”라고 했다. 나는 거의 졸도할 지경이었지만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한약을 먹고 있다”는 단순한 내용을 길게 써서 보내야 했다.

한국인들이 일상적으로 주고받는 안부는 굶는 이가 줄어든 이 시대에도 “식사하셨습니까”이고, 습관적인 인사는 “언제 한번 밥 먹자”이다. 문제는 강요되는 회식 문화. 두 사람 이상이 하는 모든 인간 행위는 각자의 처지에 따라 이해관계가 다르기 마련이다. 어떤 이에게 회식은 친목 도모와 스트레스 해소의 장이지만, 어떤 이에게는 업무의 연장이다. 대개 기혼 여성들은 제때 퇴근하기를 바란다. 자기 시간을 갖고 싶은 이들에게 한없이 이어지는 술자리는 이직을 고려할 만한 괴로움이다. 회식은 귀가를 꺼리는 일부, 주로 기혼 남성이 주동하거나 그들끼리 모임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왜일까. 집에 가면 외로워서, 심심해서, 집안일이 하기 싫어서, 바빠 보이고 싶어서, 인맥 확대를 위해서…. 사연은 다양할 것이다.

삶의 질을 평가하는 기준 중 하나는 ‘저녁이 있는 삶’이다. 손학규 민주당 고문의 저서 제목이기도 한데 심각하게 읽어야 할, 정치인의 드문 책이다. 우리 사회에는 ‘성공한 사람은 바쁘고’ 집에 있는 남성은 ‘뭔가 안 풀린 사람’이라는 이미지가 있어서 업무 후 바로 귀가하지 않으려는 이들이 있다. 혼자 있는 시간을 견디지 못하는 이들이 의외로 많다.

남성은 여성과 어린이, 부모보다 동료들과 많은 시간을 보낸다. 동성 사회성(同性 社會性, homo social). 남성 연대이자 이들이 주도하는 사회의 획일성을 뜻하는 용어다. 그래봤자, “퇴직 전 자녀 결혼” 강박을 보면 이들도 자신들의 우정을 별로 믿는 것 같지는 않다.

모임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큐클럭스에서 유래한 KKK단의 시작은 미약했으나 그 끝(?)은 지나치게 창대했다(지금도 존재한다). 처음에는 남북전쟁이 끝난 직후 남부 동맹군으로 참가했던 작은 마을의 마음 맞는 젊은이들의 장난에서 시작됐다. 전쟁이 끝나자 일상이 시시해진 이들은 한밤중의 여가활동으로 몸에 하얀 침대보를 두르고 머리에는 베갯잇을 뒤집어쓴 채 말을 타고 시골길을 달렸다. 그러다 뭔가 ‘의미 있는’ 일을 해보자며 결사를 넓혀갔고 순식간에 전국 조직으로 변모했다. 나치의 전신(前身)인 프라이코프스도 평범한 노동자들이 “마누라에게 나도 바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퇴근 후 술집에서 벌이는 ‘시국토론’이 발전한 것이다.

‘일간 베스트’를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많이 받는데,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비생산적인 정치는 출구를 잃은 외로움과 불만의 결사인 경우가 많다. 상상(망상), 피해의식, 자기비하가 사회적 사명감으로 ‘승화된’ 것이다. 여성은 남성보다 가사노동을 많이 요구받기 때문에 어느 역사에도 ‘여성 KKK단’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폭력 문화는 남성 실업, 아니 ‘남는 시간’과 관련성이 크다. <한중일 인터넷 세대가 서로 미워하는 진짜 이유>(다카하라 모토아키)도 실업으로 인한 불안형 내셔널리즘에 있다. 시간이 있을 때 어떤 사람은 청소를 하고 남을 돕지만 어떤 이들은 ‘애국’을 한다.

물론 모든 회식 문화가 ‘KKK단’으로 연결된다는 얘기는 아니다. 그러나 비슷한 사람들의 비슷한 시간대의 비슷한 형태의 음주 행위는 “퇴근 후 간단히 한잔”으로 끝날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더구나 지금처럼 암묵적으로 강제된 문화라면, “건전한 음주” 이전에 그 자체로 인권 침해다.

하루 종일 많은 사람들과 부대꼈다면, 저녁에는 혼자 혹은 편안한 이들과 시간을 보내야 한다. “과도한 노동에 시달리지 않고 모두가 농부가 되고 시인이 되고 낚시를 하며 오페라를 감상하는 삶”을 스스로 거부하는 이들이 많아지고 있다. 일하고 소주 마시고 술 깨는 음료 마시고 다시 일하고…. 그렇게 제 정신이 아닌 상태에서나 살아낼 수 있는 세상이기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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