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영화’보다 더 본질적인 ‘경쟁’ 논리

2013.12.18 20:48
류동민|충남대 교수·경제학

추위를 달래려 국밥에 곁들였던 막걸리의 취기가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 세미나 모임까지는 한참 남은 시각, 지하철 역사에서 곧바로 연결되는 대학 건물에 들어서자 별천지가 펼쳐진다. 우아한 실내장식에 은은한 불빛, 세련된 시설의 헬스장, 이태리식 이름이 붙은 카페, 자유롭게 노트북이나 책을 펼쳐 놓고 시험공부를 하는 학생들 사이에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 앉아 커피를 마신다. 불콰해진 중년의 겸연쩍음을 감추기 위해 부스럭거리며 이면지를 꺼내 오랜만에 펜으로 휘갈기듯 글을 쓴다. 문득 옥스퍼드나 하버드쯤 되는 외국대학 근처의 노천카페에 앉아 세상을 뒤흔들 문장을 만들고 있는 석학인 양 우쭐한 느낌에 사로잡힌다.

스피노자의 <에티카>라는 책을 읽고 있다. 정직하게 말하면, “알기 쉬운 스피노자” 따위의 개설서만 두 권째이고 진짜 스피노자는 두어 달 넘게 머리맡에 뒹굴고 있다. 뜬금없이 스피노자에 꽂힌 것은 개인적으로 “도대체 신은 존재하는가?”, 아니 무신론자에게 맞게 표현을 바꿔보자면 “도대체 신적 정의는 존재하는가?”라는 물음을 지우기 어려운 세월을 견디고 있기 때문이다. 고작 해설서 하나 읽은 주제에 선뜻 말하기는 어려우나, 그래, 신이 정의상 무한한 존재이며 다른 원인도 갖지 않는 절대원인이라면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제아무리 불의해보이는 일도 이미 그 자체가 신의 일부인 것이리라. 그러하니 신은 핍박받는 이들을 위해 찬란한 영광으로 보상해줄 다음 세상을 준비할 아무런 필요성도 느끼지 않을 터, 신은 아무것도 계획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결국 사랑할 수 없는 것을 사랑하고 용서할 수 없는 것을 용서하며 이렇게 살아가는 수밖에 없다는 말인가?

류동민|충남대 교수·경제학

류동민|충남대 교수·경제학

우리는 누구나 마음속에 신을 간직하고 살아간다. 돈이나 권력, 육욕 같은 물신을 모시고 살기도 하며, 대개는 자기중심적으로 해석된 권선징악이나 인과응보의 원리라는 신에 대한 개념이라도 갖고 있다. 애덤 스미스 이래 많은 수의 경제학자들에게 신의 역할을 해온 것은 경쟁이라는 개념이다. 경쟁은 좋은 것이다. 이제 주어와 서술어의 자리를 맞바꾸면 희한한 변화가 일어난다. 좋은 것은 경쟁이다! 경쟁은 좋고 선한 모든 것을 부르는 이름이다. 심하게 말하자면, 내게 반대하는 모든 것은 종북이며 설명할 수 없는 모든 잔차항은 북한의 짓이라는 논리와도 비슷해져버리는 것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더라도 가장 이익이 많이 날 것이 뻔한 수서발 KTX 노선을 분리하는 것이 민영화인가 아닌가를 둘러싸고 논란이 벌어진다. 민영화한다고 해서 서울~부산 기차요금이 몇십 만원 될 것이라는 주장도 귀족노조 운운하면서 공공서비스를 수익성 논리로 재단하는 것 못지않게 분명 선동의 요소를 담고 있다. 기대와는 달리 민영화 자체가 선인지 악인지에 대해 경제학은 속 시원한 답변을 들려주지 못한다. 한편에서 민영화의 실패사례를 제시하면, 반대편에서는 다시 그것이 왜 ‘민영화’가 아니라 ‘다른 그 무엇’의 실패인가를 들이댄다. 끝없는 논란을 종결짓는 것은 결국 힘이다. 어쩌면 권력자들이 진정 보여주려는 것은 힘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민영화가 아니라 경쟁논리 도입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한편으로는 논점을 회피하는 전략일 수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문제의 본질에 더욱 접근하게 만드는 것일 수도 있다. 경제학자들에게 실상 신이란 민영화가 아니라 경쟁이며, 그 신의 개념을 이 땅에서 실현하는 것은 정치권력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권력자로부터 힘의 부스러기를 얻기 전과 후에 테크노크라트들의 소신이나 이론이 달라지는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경쟁시스템의 꿈결 같은 성과를 만끽하며 취기를 눅이던 바로 그 캠퍼스에서, 바로 그즈음 “안녕들 하십니까?”라는 대자보가 붙었다. 결국 대안은 신에 대한 ‘나’의 개념과 ‘너’의 개념, ‘우리’의 개념과 ‘그들’의 개념을 터놓고 얘기하는 것이다. 그 단순명쾌함만큼이나 모든 힘 가진 자들이 꺼렸던 바로 그것. 해서 힘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슬픈 현실을 알면서도 마지막 순간까지 물음을 멈추지 않는 것, 신의 무한성을 받아들이면서도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을 수밖에 없음, 그것이 삶의 비극이자 역설적으로 희망이기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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