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말 한마디

2014.01.27 20:36 입력 2014.01.27 21:59 수정
김지숙 | 소설가

어릴 때부터 명절의 시끌벅적한 분위기를 좋아했다. 하지만 아릿한 기억도 많다. 대부분은 명절노동을 떠안았던 엄마에 관한 것이다. 명절이 다가오면 엄마는 이불 홑청부터 다 뜯어서 빨고 삶고, 시쳤다. 다들 먼 데서 와서 하루나 이틀씩 자고 가기 때문이었다. 대청소를 하고, 그릇을 꺼내서 닦는가 하면, 저번 명절과는 조금이라도 메뉴를 달리하느라 고심했다. 명절 내내 엄마는 부엌에서 나오지 못했고, 명절 때 친정에 가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별별시선]따뜻한 말 한마디

철이 들면서 엄마의 노동이 마음에 걸리기 시작했다. 우리집의 노동은 엄마 한 사람에게 편중되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명절에 오는 친척들이 엄마를 괴롭히는 불청객처럼 느껴졌다.

명절 때 어떤 게 가장 힘들었냐고 물은 적이 있다. 엄마는 고심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밥 먹고 과일 먹고 커피까지 마시고 집에 가면서 ‘고맙다, 수고했다’ 이 말을 안 하는 거야. 너무 당연해진 거지.”

따뜻한 말 한마디로 모든 게 해결되는 게 아니지만, 그것조차 없는 것보다는 낫다. 사실 대부분의 명절 스트레스는 말에서 비롯된다. 명절은 가족(확대가족)이 모여 정을 나누는 시간이라지만, 사실상 여러 가족(핵가족)들이 모여 서로를 비교하고 평가하는 자리이기도 하다. 형제자매여도 잘나가는 사람이 있고, 일이 안 풀리는 사람이 있다. 똑같이 자식을 낳아도 누군 일류대를 가지만, 누구는 공부에는 취미가 없다. 취직을 하려고 노력했지만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을 만큼 취업상황은 녹록지 않다. 결혼적령기에 좋은 배우자를 만났을 수도 있지만, 잘 안되었을 수도 있다. 또는 결혼이 영 싫어서 혼자 살기로 결심했을 수도 있다.

그런데 명절 때는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사랑과 관심’이라는 명목으로 서로에게 질문을 날린다. 결혼은 언제 하니? 취직은 했고? 대학은 붙었니? 사실 문제는 질문이 아니다. 저런 질문도 못하게 한다면, 명절 때 가족들 간의 대화 소재는 반으로 줄어들 것이다. 단지, 질문에 대한 답을 가지고 평가하는 말들이 문제다.

결혼적령기를 넘긴 비혼 남녀, 취업 장수생, 요리 못하는 며느리, 실직한 가장 등 명절이 겁나는 사람들은 많다. 자신의 처지가 더 두드러지며 열등감과 죄책감에 새삼 휩싸이기 때문이다. 자식이 삼수 끝에 대학에 가고 나서야 가족모임에 갔다는 사람도 있고, 카드빚이라도 져서 최고 성수기인 명절 때마다 해외로 뜬다는 비혼 여성도 있다.

나는 명절이 다가오면 나름대로 마인드컨트롤을 한다. 괜한 열등감과 죄책감을 불러일으키는 질문을 만나면, ‘난 나름대로 잘 살고 있는데?’ 하고 넘겨버리는 배짱을 키우는 것이다. 명절노동을 당연시 여기는 사람들에게는, “이거 제가 만들었는데, 엄청 맛있죠? 어제 하루 종일 만든 거예요” 하고 생색을 내고, 밥 먹고 자연스럽게 텔레비전 앞으로 가는 친척들에게 과일이라도 깎게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많이 노동을 부담할 엄마에게는 명절이 지나고 달콤한 케이크라도 선물할 것이다.

텔레비전 광고에서 행복한 가정을 연출하는 모습은 대부분 비슷하다. 웃음이 넘치고, 모두가 건강하며, 경제적으로도 풍요로워 보인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저런 가족은 흔치 않을뿐더러, 사실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을.

모든 가족은 저마다의 문제를 가지고 있는데, 그걸로 서로를 괴롭히면 불행한 가족이 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당히 배려하면서 살면 행복한 가정이 되는 것이다. 이번 명절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복한 가족모임이 되기를 빈다. 우선 따뜻한 말 한마디를 건네는 것부터 시작해보자. 돈도 안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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