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2014.12.19 21:20 입력 2014.12.19 21:22 수정
김찬호 | 성공회대 초빙교수

스무 살이 넘은 작은딸이 얼마 전에 문득 물었다. “나 어렸을 때, 아빠는 왜 그렇게 늘 우울한 표정이었어?” 생뚱맞은 질문은 아니었다. 그 아이가 일곱 살 때, 나는 6개월 정도 무척 괴로운 시간을 보냈다. 몇가지 일들이 연거푸 실패하면서 웃음이 완전히 사라졌다. 불면증과 식욕 감퇴 속에 생활이 곤두박질쳤다.

[사유와 성찰]기억

그런데 그 반년의 시간이 아이에게는 무척 길게 느껴진 모양이다. 자신의 어린 시절 대부분이 그런 분위기로 각인되어 버린 것이다. 얼굴에 그늘이 잔뜩 낀 아빠의 눈치를 살피느라 위축된 감정이 짙은 자국으로 남아 실제보다 훨씬 긴 시간으로 저장된 것이리라.

그보다 훨씬 어이없는 기억의 오류도 있다. 어느 삼십대 남성은 아주 어렸을 때 아버지가 자기를 죽이려 했던 끔찍한 기억을 갖고 있었다. 그가 자기의 발을 들어 거꾸로 세운 다음 물통 속에 집어넣었다가, 울면서 발버둥 치니까 다시 들어 올렸던 일이다. 그 충격을 가슴에 묻어둔 채 성장하는 동안 아버지에 대한 근본적인 의심과 두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다가 결혼을 했고, 이제는 솔직한 이야기를 들어봐야겠다 싶어 어느 날 비장하게 입을 열었다. 아버지, 그때 왜 저를 죽이려고 하셨어요? 그 질문에 아버지는 머리가 하얘져 버렸다. 사실은 그 남자가 놀다가 발을 헛디뎌 물통에 빠졌고 아버지가 재빨리 꺼내준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앞부분은 까맣게 잊어버리고 아버지의 손에 발을 붙잡혀 들어 올려진 순간만 뚜렷하게 남게 되었다. 엉뚱한 트라우마를 가슴에 품고 삼십년을 살아온 것이다.

인간의 기억은 정확하지 않다. 동창들끼리 학창 시절을 추억하다 보면 동일한 사건을 전혀 다르게 입력하고 있음을 종종 발견한다. 한지붕 아래 살아온 식구들 사이에서도 그렇다. 부모와 자녀, 남편과 아내, 장남과 차남, 형제와 자매가 서술하는 가족사는 판이하기 일쑤다. 위에서 언급한 두 사례에서처럼 정서적인 괴로움이나 충격적인 사건은 과장되거나 왜곡되기 쉽다. 그리고 저마다의 폐쇄적인 의식 회로 속에서 기억을 한 방향으로 굳혀 간다. 그런 응어리에 발목이 잡혀 삶이 일그러지기도 한다.

만일 과거가 현재를 짓누르는 듯 느껴진다면, 그것을 구성하는 경험들의 객관성을 점검해볼 필요가 있다. 그 시간을 함께했던 타인과의 기억을 면밀하게 대조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각자의 방식으로 상황을 접수하고 있었음을 확인하게 된다. 적대적 관계에 있던 당사자들이 터놓고 대화하다 보면 각자가 고정관념과 증오심 속에 타인의 상(像)을 특정한 방향으로 구성하고 있었음을 깨닫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한 편파성은 집단의 역동 속에서 더욱 강화되는 경우도 많다. 자기가 소속해 있거나 그렇다고 믿고 싶은 어떤 범주 안에 실재를 가둬두는 것이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말대로 ‘기억은 일종의 약국이나 실험실과 비슷하다. 아무렇게나 내민 손에 어떤 때는 진정제가 때론 독약이 잡히기도 한다’. 그런데 그 약국 또는 실험실은 사회적으로 구성된다. 여러 가지 변수들이 작용한다. 가정환경, 학교 교육, 또래 집단, 매스미디어, 이데올로기 등을 통해 경험이 일정한 방식으로 편집되고 강화된다. 거기에 감정이라는 접착제가 가미되면서 더욱 견고해진다. 과도한 피해의식에 이끌려 사실을 취사선택하고, 습관적인 강박에 치우쳐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그 비좁은 굴레를 벗어나 보편적인 인식의 지평으로 끊임없이 나아가야 한다. 역사를 공부하는 목적도 바로 그것이 아닐까.

‘망년’이라는 말이 멋쩍은 연말이다. 수개월 전 거대한 참사 앞에서 ‘잊지 않겠습니다’라고 거듭 다짐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기억을 날 것 그대로 간직하기엔 아직도 너무 아프다. 나날의 일상조차 버겁기에 적당히 망각의 저편에 묻어두고 싶어진다. 하지만 그럴수록 악몽은 두려움 또는 죄의식과 함께 우리의 무의식을 붙잡을 것이다. 외면하면 할수록 그 상처의 뿌리는 더욱 깊어질 수 있다.

어떻게 하면 직면할 수 있을까. 애도의 물결에서 드러난 격정적 유대감을 냉철한 사회적 기억으로 변환하여 지속시켜야 한다. 집단 트라우마의 질곡을 새로운 존재에 대한 열망으로 승화시켜야 한다. 진상 규명이라는 험난한 과제도 그 기력으로 밀고 나갈 수 있다. 우리가 함께 빚어내는 마음의 상자는 세상을 담아내는 그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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