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 가벼움이 허락된 시간

2015.03.29 20:41 입력 2015.03.29 20:50 수정
강유정 | 영화평론가·강남대 교수

▲ “되돌아보는 눈으로만 그린
방황과 혼돈의 ‘아픈 청춘’은 그만!
진짜 스물의 순수한 가벼움은
현실의 중력을 이기는 힘이다”

[강유정의 영화로 세상읽기]청춘, 가벼움이 허락된 시간

청춘이라는 말과 함께 어떤 단어들이 떠오를까? 소설가 김연수는 <청춘의 문장들>이라는 책에서 “내가 서른 살 너머까지 살아 있을 줄 알았더라면 스무 살 그즈음 삶을 대하는 태도는 뭔가 달랐을 것이다”라고 쓴 바 있다. 그렇다. 이상은의 노래 가사처럼 젊었을 땐 젊음을 모르고 사랑할 땐 사랑이 보이지 않는다. 젊기 때문에, 젊음의 그 에너지 자체가 용처 모르는 힘으로 스스로를 괴롭히는 시기, 생각보다 괴로움은 많은 에너지를 태운다.

젊음이 에너지가 되어 괴로움을 활활 태우는 시기, 그래서인지 청춘을 그린 영화들은 방황을 주목하는 경우가 많다. 기억에 남는 청춘영화들, <파수꾼>, <월플라워>, <죽은 시인의 사회>와 같은 영화에서 청춘들은 젊기에 젊음을 앓는다. 그러다 보니, ‘아프니까 청춘이다’와 같은 잠언도 등장하고 가짜 환상도 나타난다. 젊어서 아플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그 역이 진리가 될 수는 없다. 젊기 때문에 아픔에 더 예민한 거지 아프니까 청춘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고통이 젊음의 부산물일 수는 있어도 고통이 젊음의 전제가 될 수는 없다. 그것은 도착적 최면이자 강요에 불과하다.

논리학은 그만두고, 다시 청춘의 이야기로 돌아와 보자. 엔트로피 이론에 따르면 에너지가 높을수록 무질서도 역시 증가한다. 앞서 말했듯이 방황이나 고민에도 에너지, 열정이 필요하다. 청춘의 고민들은 대개 순도가 매우 높다. 사랑, 돈, 가족과 같은 문제를 그 어원부터 고민할 수 있는 순수한 정념의 시기, 그게 바로 청춘인 것이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청춘영화를 젊은이들이 만드는 경우는 드물다. 그래서 많은 청춘영화들은 일종의 회고적 문법을 취한다. 강형철 감독의 <써니>나 곽지균 감독의 <젊은날의 초상>이 대표적일 것이다. 이제는 청춘의 혼돈을 정리한 지금, 너무 조용해서 삶의 권태가 엄습할 무렵 추억하는 과거, 그 과거의 이미지로 청춘이 그려지는 것이다. 시선이 과거를 바라볼 때 기억은 추억이 되곤 한다. 낭만화되는 것이다. 젊어서의 고통은 그래서 아름다웠노라와 같은 낭만과 상실감은 회고담의 상투적 양식이기도 하다.

때로 어떤 청춘은 무질서도가 너무 높아 좌충우돌, 사건과 고통, 좌절의 연속인 경우도 있다. <청춘>, <야간비행>, <파라노이드 파크>와 같은 작품 속에서 젊음은 괴로운 충돌의 촉매로 등장한다. 그러다 보니 청춘영화들은 에너지의 부작용을 폭력적으로 보여주거나 괴로운 내면적 방황에 쏠리곤 했다. 청춘의 가벼움은 배제되었던 셈이다. 이 가벼움은 온갖 세속적 의무라는 무거운 추를 달기 전에 가능한, 시한부 순정함이기도 하다. 문제는 이 순정한 가벼움은 유통기한이 짧아 뒤늦게 재현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젊음이 그려내는 청춘, 그 청춘이 그리운 까닭도 여기에 있다.

그런 점에서, 이병헌 감독의 <스물>은 꽤나 반가운 청춘영화이다. <스물>은 지금껏 우리 영화에서 거의 담아내지 못한 청춘의 가벼움을 담아낸다. 영화에 등장하는 세 청년은 지금 2015년을 살아가는 젊은이들의 표본으로 선택되었다. 평범하게 대학을 다니는 스무 살, 대학은커녕 아무것도 하고 싶은 게 없어서 클럽과 여자를 전전하는 스무 살, 대학에 가고 싶고 하고 싶은 일도 있지만 경제적 사정이 여의치 않은 스무 살. 이 세 스무 살을 통해 이병헌은 평범한 스물의 표본을 재현하고자 한다.

2015년을 살아가는 세 청춘을 그린 영화 <스물>의 한 장면.

2015년을 살아가는 세 청춘을 그린 영화 <스물>의 한 장면.

이병헌 감독이 찾아낸 평범한 스무 살은 젊은 남성의 육체로 수렴된다. 스무 살의 육체는 사고하기보다 먼저 행동한다. 사고와 내면에 주목하면 비극이 되지만 행동에 주목하면 희극이 되곤 한다. 생각보다 먼저 움직이고 고민하다가도 행동이 앞서는 세 사람의 모습은 그래서 희극이 된다. 각기 다른 문제로 고민하고, 힘들어하지만 행동은 ‘여자’ 문제로 귀결된다. 어쩔 수 없이 그들의 육체는 스물이기 때문이다. 만일, 40대의 남성들이었다면 어땠을까? 아마 그 교집합은 돈이 되지 않을까? 말하자면, 영화 <스물>은 무척 비루하지만 가장 보편적이기도 한 문제를 최소 고민의 지표로 제시하는 것이다.

영화 속의 인물은 <말죽거리 잔혹사>에서 주인공이 대한민국 사회를 대상으로 내뱉었던 도전적 단말마인 “대한민국 학교 다 ××× 그래”와 같은 대사를 농담으로 희화화한다. <스물>에는 군부독재 체제와 꼭 닮은 학교나 선배도 없고 그렇다고 목숨 걸고 대항해야 할 부패한 적도 없다. 극중 인물의 말처럼 그들의 스무 살은 ‘울기에도 애매’하다. 1970년대의 스무 살이 견고한 사회적 장벽이나 독재와 싸워야 했다면 2015년의 스무 살은 무엇과 싸워야 할까? 신자유주의라고 말하기도 애매하고 그렇다고 아무것도 싸울 게 없다고 말하는 것은 더욱 무책임하다.

<스물>에 그려진 스무 살은 우리가 오포세대나 잉여라고 자조하는 그 이십대의 시작점이라기보다 스무 살 이후를 낭만적으로 기대하는 십대의 끝에 더 가깝다. 아마도 군대를 다녀온 후 그들이 마주하게 될 세상은 지금, 스무 살보다 더 팍팍하고 고단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스무 살들이 어두운 미래를 내다보며 미리 무거운 현실의 추를 달고 침잠을 학습해야 하는 것일까? 스물이라면 아무 생각 없이, 가볍게 현실을 질주해도 좋다. 가벼울 수 있는 특권, 에너지를 가벼움으로 전환해 통통 튈 수 있는 중력의 유예기간, 그것이 바로 스무 살이다. 스무 살만큼은 가벼웠으면 좋겠다. 무거운 것이 꼭 진지한 것은 아니다. 때로는 가벼움이 힘이 된다.

추천기사

바로가기 링크 설명

화제의 추천 정보

    오늘의 인기 정보

      추천 이슈

      이 시각 포토 정보

      내 뉴스플리에 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