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저녁

2015.04.12 20:42 입력 2015.04.12 20:48 수정
박성준 | 시인·문학평론가

▲ 봄날저녁

아직 한 페이지의 저녁은 남아 있을 때
나는 말이 그립기도 한가봐
그러나 나는 말이 참 두렵기도 한가봐
그래 뜻 없는 소리로 몸 바꿀까도 생각하나봐
전화 벨소리나 무슨 문 두드리는 소리쯤으로
울려보고 싶은가봐
아무도 울음인 줄은 모르게
심심함을 애써 감추고 다급한 듯이
캄캄한 방을 두드리고 싶은가봐
열 번 스무 번 서른 번쯤을
전화 벨소리로
울어보고 싶은가봐
다 퇴근하고 아무도 없을 시간
마음대로 휘젓다가
주인 없는 책상을
무뚝뚝하게 멈춘 회전의자를
담배가 꺾어져 누운 재떨이를
그 속의 식은 재를 집어보고 싶은가봐
손가락 끝에서 맥없이 빠져나가는
식은 시간의 재를 가만히
그러고서야 봄날 저녁은 가는가봐
봄날 저녁은 그렇게 가는 건가봐

- 최정례(1955~)

[경향시선 - 미래에서 온 詩]봄날저녁

△ 이곳에 없다는 것은 무엇인가? 부재의 사태는 결국 남아 있는 이들의 몫이며 ‘여기 없음’을 호명하기 위해서는 여기 남아 있음을 노출해야만 한다. 그러니 호명 자체에서 우리는 위치나 감정선들을 들킬 수밖에 없다. 이 시는 부재하는 것들을 호명해보는 시인의 관찰력이 돋보인다. 캄캄한 방에 전화를 수차례 하는 상황도 그렇고 빈 사무실을 관할하는 방식도 그렇다. “담배가 꺾어져 누운 재떨이”라든가 “무뚝뚝하게 멈춘 회전의자”를 바라보고 있는 나의 소고는 주인이 없는 책상을 드러내는 기표다. 즉 있는 사물을 통해 없는 대상을 추론해내는 직관들인 것이다. 왜 그래야만 했을까? 그립기도 하고 두렵기도 한 말 때문일까. 그저 목 놓아 울음으로 질문을 놓고 싶은 시인 특유의 곡진함 때문일까. 무엇이든 좋다. 시적 자아는 어떤 이유에서든 다가오는 봄의 계절감에 통해 슬픔으로 진입하고 있다. 물론 봄날에 쉽사리 만질 수 없는 슬픔에 관해서는 그뿐만이 아닐 것이다. 언제부턴가 물이라는 단어가 물이 아니고, 바다라는 공간이 바다가 아니다. 지난 봄, 공동의 내상을 겪고 난 이후 우리는 물과 바다의 의미역들을 다르게 보충하고 있다. 작가들은 바다의 쓰리고 아픈 장소감을 형상화해냈고, 광장은 최소한의 윤리를 요구하는 목소리들로 환했다. 우리는 그렇게, 한동안 쓰린 봄의 기억에 복무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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