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합리화의 코드

2015.04.24 22:03 입력 2015.04.24 22:08 수정
황현산 | 문학평론가·고려대 명예교수

지난번의 이 칼럼에서 나는 중대한 실수를 저질렀다. 나는 내 스승이 한·일 혼혈이라고 말했는데, 그게 사실이 아닌 것을 나중에야 알았다. 선생이 소년기를 일본인 의모 아래서 보냈던 사실을 다른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나도 잘못 이해하여 혼혈로 생각해 왔던 것이다. 이 오해는 두 문화를 아우르는 선생의 철저한 지식에서도 어느 정도는 연유했다. 한·일의 문화적 정수를 매우 깊은 자리에서 이해하고 있었던 선생은 일본의 문화적 근간에서 늘 한국적 뿌리를 발견하고, 현대 한국의 문화적 외피에서 자주 일본적 형식을 간파하곤 했다. 그러나 그 이야기를 입 밖에 내는 일은 드물었다. 당신 자신은 그 이야기가 정교하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선생은 논리와 표현에서 한 오라기의 실만 빠져도 거기에서 오는 마음의 짐을 쉽게 넘기지 않았다.

[황현산의 밤이 선생이다]자기합리화의 코드

대학원 시절, 내가 기말 보고서로 제출한 글에서 선생은 번역해서 인용한 문장 하나를 지적했다. 부사 하나가 잘못 번역된 것이다. 문장의 한 부분과 연결된 부사를 문장 전체에 걸리는 것으로 번역했으니, 전후의 문장 간에 논리가 불통하는 것이 당연하다. 선생의 책망은 짧고 조용했다. “이럴 때 마음속에 고통을 느끼지 않느냐?”

나는 아마도 고통을 느꼈겠지만 자기합리화의 억지 논리가 그 고통을 재빨리 지웠을 것이다. 자기 자신을 속이지 않기는 어렵다. 허위와 진실의 갈림길에서 위험한 자기합리화에 맞설 수 있는 무기는 엄중한 자기검열밖에 없다. 인간이 성장한다는 것은 자기검열을 두려워하지 않을 만큼 용감해진다는 말이기도 할 것이다.

그 후로 스승의 저 짧은 책망은 늘 나를 따라다녔다. 이치에 닿지 않는 것 앞에서 그 배리를 머리보다 먼저 몸으로 느끼는 섬세함, 거기서 오는 고통을 정직하게 받아들이고 저 자신을 객관적 이성의 대리자로 만들어 사안을 처음부터 다시 검토하려는 용기, 생각한 것의 작은 혈관까지 성실하고 정교하게 표현할 수 있는 언어 능력 등, 쉽기도 하고 어렵기도 한 이런 자질을 끊임없이 연마하려 했던 것도 저 스승의 책망이 언제나 내 곁을 지키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공부하는 일의 목적이 고통을 고통으로 느낄 수 있는 지각의 훈련과 그 고통 앞에서 정직할 수 있는 용기의 연마에 있을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초등학생이 되어 학교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부터 ‘이치의 그물’ 안에 든 물고기와 같다. 학교는 왜 바람이 불고 비가 오는지를 가르치고, 일출과 일몰, 사계절의 순환이 어떻게 필연적인가를 증명한다. 자연만물에 이치가 있다는 것을 알고 우리는 안도한다. 때로는 가뭄이 들거나 홍수가 나고, 태풍이 불기도 하지만, 그런 재변이 일정한 테두리를 넘어서는 일은 드물고, 그 폐해가 조만간 복구되는 것도 사실이다. 자연은 끝없는 설명의 욕구를 자극하고, 그 설명이 불완전할 때 우리는 고통을 느끼지만, 자연의 ‘완전성’에 구멍이 뚫리면 우리 삶도 위협을 받을 것 같기에 그만큼 합리화의 욕구가 강해질 수밖에 없다. 자연에 대한 기대가 정직해질 수 있는 용기를 방해한다고 해야겠다.

인간 세상에도 물론 규칙이 있다. 그것은 자주 자연을 모방한다. 하늘에 태양이 하나이듯이 왕도 하나라거나, 법은 물이 흘러가는 것과 같아야 한다는 말이 모두 그런 범주에 속한다. 많은 경우 인간이 만든 규칙은 자연을 뛰어넘지만, 그 안에서 부딪치고 살다 보면 규칙 자체가 습관이 되기에 결국 통용되는 질서는 ‘자연스러움’의 외양을 갖추고 만다. 전제적 규칙이라고 해서 민주적 규칙보다 덜 자연스러운 것도 아니다. 인간 사회의 규칙 또한 그 설명이 불완전할 때 우리는 심각한 고통을 느끼지만, 그에 대한 신뢰가 일상의 안전과 연결될 것만 같기에 그 합리화는 거의 운명적이다. 실제로 정직해지려는 용기의 발휘가 규율문란의 획책으로 몰려 사회적 제재를 받는 일은 흔하다.

게다가 우리 사회에서는 이 정직해지려는 용기와 노력이 ‘종북’의 혐의를 둘러쓰기까지 한다. 한 사회의 권력과 질서에 대해 그 약점을 말한다는 것은 그 사회의 적을 이롭게 하는 일인데, 우리의 적은 북한일 뿐만 아니라 북한이어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질서의 편’에 선 사람들은 권력에 대한 하찮은 비난도 견디지 못하고 어김없이 ‘빨갱이’라는 말을 입에 올린다. 물론 사람들은 이 ‘빨갱이’라는 말이 터무니없다는 것을 모를 만큼 바보가 아니다.

그러나 여론조사도 투표도 그 터무니없는 말에 늘 결정적인 영향을 받는다. 우리 사회의 정신 상태에 알 수 없는 어떤 코드가 존재한다고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다. 비겁함을 감싸주는 자기합리화의 코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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