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시감, 그러나 보이지 않는 몇 가지

2015.12.01 20:51 입력 2015.12.01 21:12 수정
신좌섭 | 서울대 의대 교수·의학교육학

1980년대, 20대 젊은 나이로 가두를 누볐던 친구들이 송년회를 위해 모였다. 화제는 자연스레 최근의 정국으로 모아졌고, 친구들은 한결같이 강한 기시감에 동의했다. 요즘 상황이 30여년 전과 똑같다는 것이다. 그러나 대화의 주제는 곧 무력감으로 옮겨갔다. 우리가 30년 전의 젊은 혈기를 되찾는다면 오죽 좋으련만 나이는 돌이킬 수 없는데, 세상만 30년 전으로 돌아간 데서 오는 무력감이다. 수많은 벗들이 흘린 피는 다 어디로 갔나?

대화의 주제는 다시 성찰로 옮겨갔다. 1990년대, 친구들은 국회로, 학계로, 생활전선으로 돌아가면서 안토니오 그람시의 진지전을 입에 담았지만 과연 지난 30년간 우리는 진지전을 수행해온 것인가? 진지전을 핑계로 타조처럼 머리를 모래에 처박고 개인적인 안위만 추구해온 것은 아닌가?

[공감] 기시감, 그러나 보이지 않는 몇 가지

국정교과서를 둘러싼 이념 논쟁으로 사회가 소용돌이치고, 한겨울을 앞둔 지금 거리와 고공으로 내몰린 노동자, 농민들의 단발마가 울려 퍼지고 있다. 세월호 참사로 억울하게 죽어간 아이들의 부모들은 참척(慘慽)의 고통을 끌어안고 아직도 거리를 헤매고 있다. 이번 주말 5일에는 다시 제2차 민중총궐기 집회가 예고돼 있는데, 경찰은 집회를 불허하고 참가자들을 모두 체포하겠다고 한다.

경찰은 다시 차벽을 치고 살인적 위력의 캡사이신 물대포를 쏠 것이다. 집회 참가자들은 아마도 복면을 하고 나타나서 결국 각목을 쥘 수밖에 없을 것이고 경찰은 예고한 대로 참가자들을 체포할 것이다. 최루탄과 화염병이 등장하지 않을 뿐 지금도 고화질 TV처럼 생생하게 떠오르는 80년대의 거리 모습과 다를 바가 없다.

그러나 30년의 세월을 뚫고 되살아오는 그림 속에 뭔가 빠진 것이 있다. 첫째, 강력한 야당이 보이지 않는다. 얼마 전 서거한 김영삼 전 대통령은 공과를 차치하고 역사적 고비들을 단식의 결기로 돌파했으며 김대중 전 대통령은 수십만 군중의 마음을 흔드는 명연설로 대오를 하나로 모았다. 현 정부가 제공하는 수많은 기회 앞에서도 내분으로 지리멸렬한 야당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등장인물들이 있었던 것이다.

둘째, 강력한 연대의 중심이 보이지 않는다. 80년대만 해도 학계, 종교계, 노동계, 빈민, 학생 등 각계각층을 망라한 지역별 연합체가 존재했고 이들은 민통련, 전민련 등 전국 차원의 상설협의구조를 갖추고 있었다. 지금은 이것이 보이지 않는다. 셋째, 정부와 민주세력의 유혈충돌을 중재하던 원로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세월과 더불어 기존 원로들이 사라져가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국민 대다수의 존경을 받는 후계자들이 없는 것이다. 이런 와중에 조계종 화쟁위원회가 5일 집회에서 다른 종교인들과 함께 ‘사람벽’을 세워 평화 시위를 주도하겠다는 구상을 밝혔다. 이것이 가능할지는 모르겠으나 작은 희망의 씨앗을 보는 것 같다. 우리는 이한열이나 김근태를 기억하고 있으나,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채 아직도 30여년 전에 입은 신체적, 정신적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넷째, 기만일지라도 대화의 흉내라도 내던 정부가 보이지 않는다. 정부는 이미 불통의 밀어붙이기가 최선의 전략이라고 믿는 것 같다. 그러나 밀어붙이기는 갈등을 심화시킬 뿐이다.

갈등에는 여러 단계가 있다. ‘내가 옳고 네가 틀렸다’는 낮은 단계로부터 ‘세상을 양편으로 가르는’ 양극화 단계, ‘상대방이 틀렸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선 무슨 짓이든 하는’ 조작 단계를 거쳐 최종적으로는 ‘내가 죽더라도 상대를 망가뜨리는’ 파괴적 단계로 치닫게 되어 있다. 낮은 단계의 갈등은 상대의 입장을 파악하는 역지사지의 대화를 통해 해결될 수 있지만, 단계가 높아질수록 약한 쪽을 보호하면서 중립적인 입장에서 중재를 강제하는 제3자를 필요로 한다. 원래는 이것이 정부의 존재 이유이지만, 갈등의 주체를 자처하는 정부 대신에 누가 이 역할을 감당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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