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 국회 텔레비전

2016.03.01 21:03 입력 2016.03.01 21:11 수정
윤태진 | 연세대 커뮤니케이션대학원 교수

인기 드라마도 언젠가는 마지막회를 방영한다. 이 글이 실릴 때면 <마국텔(마이 국회 텔레비전)>이라는 애칭으로 불리던 필리버스터 중계가 이미 끝났을지도 모른다. 아니더라도, 영원히 진행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사람들은 필리버스터 중계를 <인간극장>이나 <그것이 알고싶다>, 심지어 <종교방송>에 비유했다. 인터넷 강의라 부르는 이들도 있었다.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비유한 반응들이 많았다는 것은 가장 정치적인 소재를 가장 (대중)문화적으로 소비하는 현실의 반영이다. 사실 지금의 정치·문화의 지형 속에서 정치의 예능화는 불가피하다. 정치를 비일상적 영역으로 밀어놓은 채 냉소와 독설의 침만 뱉는 것보다는 예능화가 훨씬 생산적이다. 유력 정치인들이 토크쇼에 나와 이름을 알리는 것은 정치인의 예능인화이다. 정치의 예능화와는 다르다. 정치적 사건과 논제에 관심을 갖고 웃기도 하고 이야기도 나누고, 그러다가 즐거운 마음으로 기부도 하고 투표도 할 수 있다면, 정치의 예능화는 오히려 권할 일이다.

[문화비평] 마이 국회 텔레비전

많은 비유 중에서도 가장 많은 지지를 얻은 필리버스터 중계의 별명은 <마국텔>이었다. MBC <마이 리틀 텔레비전(마리텔)>에 빗댄 이름이다. <마리텔>은 1인 인터넷 방송의 포맷을 빌려 먼저 온라인 방송을 하고, 그 편집본을 지상파로 방송하는 프로그램이다. 실제로 <마리텔>의 박진경 PD는 27일 트위터에 “엄청난 강자가 나타나 버렸다”는 글을 남기기도 했다. <마국텔>이 <마리텔>의 인기를 위협한다는 풍자로 해석되었다.

<마리텔>의 차별성은 인터넷 생방송과 실시간 온라인 댓글에 있다. 그렇다면 <마국텔>이라는 별칭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원한다면, 온라인을 통해 날것을 그대로 볼 수 있음이다. 이리저리 잘려진 ‘얌전한’ 편집본을 거부할 수 있음이다. 원한다면, 댓글을 남기고 칭찬과 조롱을 던질 수 있음이다. 필리버스터는 복수의 유튜브 채널을 통해 중계되었고, 평균 2만명에서 5만명 사이의 누리꾼들이 꾸준히 실시간 중계를 봤다. 보면서 갖가지 댓글을 달았다. 발칙하고 유쾌한 언어들이 날아다녔다. 연인원으로는 수백만이 시청했다. 국회방송 채널을 통해 중계를 시청한 이들도 적지 않다. 지난 주말의 시청률은 0.3% 가까웠다니, 개국 첫 1년간 ‘TV조선’이 기록한 시청률(0.35%)과도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하지만 날것을 보지 못한 많은 사람들은 과연 무엇을 볼 수 있었는가? 생중계까지는 못하더라도 편집본을 만드는 성의 정도는 가져야 마땅할 공영방송 뉴스들은 이들에게 무엇을 얼마나 보여주었는가? 필리버스터가 진행되는 일주일 동안, <MBC 뉴스데스크>는 토론발언을 제대로 요약한 적도, 인용한 적도, 사운드바이트로 전한 적도 없었다. 유승희 의원 목소리가 딱 한 번 나왔다. “국회의장의 테러방지법 직권상정은 국회법을 정면으로 위반한 것입니다”였다. 딱 한 번 전해준 필리버스터 발언이 법률안 내용의 부당성이 아니라 절차에 관한 문제 제기였다. 7일 중 3일은 아예 관련 보도를 하지도 않았다. 필리버스터가 시작된 날, <KBS 뉴스9> 앵커가 현장의 기자에게 던진 첫 질문은 “지금 몇 시간째 진행되고 있죠?”였다. 무슨 내용인지, 왜 반대하는지 묻지 않았다. 이후 일주일 동안 토론 내용은 세 번 소개됐지만, 그중 한 번은 정청래 의원이 최장연설 신기록을 깼다는 내용 속에 삽입된 장면이었다.

<마리텔> 제작진들은 생방송 자료들을 편집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인다. 재미있는 장면들을 엄선하고, 적절한 자막과 이모티콘을 붙이고, 댓글들을 효과적으로 배치해서 보여준다. 그래도 날것과는 많이 다르다보니, 열성 팬들은 불만이 많다. 하지만 가뜩이나 방송 콘텐츠들이 파편화되어 몇 분짜리 ‘인기 동영상’으로 소화되는 현실에서, 어찌 편집을 탓할 수 있겠는가? 오히려 날것을 접하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서는 유능한 편집이 필요하다. 만약 <마리텔> 제작진들이 필리버스터 생방송 자료들을 편집해서 ‘진짜’ <마국텔>을 만든다면, MBC 보도본부도 깜짝 놀랄 작품이 나오지 않을까? 이것이야말로 정치의 예능화가 아닐까?

얼마 전 한국일보 박상준 기자는 필리버스터를 보며 느낀 단상을 이렇게 적었다. “기사를 쓸 때조차도 어떻게 해서든 읽는 사람의 눈을 자극하기 위해 (필리버스터를) ‘누가 더 길게 했나’ 하는 ‘경주식 보도’에 집착한 것 같기도 해 부끄럽기도 합니다.” 대한민국 방송사들에 묻고 싶다. 당신네들 보도본부에는 이 같은 진지한 반성을 할 인물이 없는가? 생방송도 못하지만 편집 능력도 없고, 보도도 못하지만 예능감도 떨어지는, 그런 이들밖에 없는 건가? 마침 이틀 전 열린 미국 아카데미 영화상에서 영예의 작품상은 <스포트라이트>에 돌아갔다. 열릴 줄 모르던 진실의 문을 마침내 열어젖히는, 집요하게 취재하고 보도하는 기자들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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