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것 같은 내 것 아닌 것

2016.05.04 20:55 입력 2016.05.04 20:58 수정
박영택 | 경기대 교수, 미술평론가

꽤 오래전에 대구에 있는 작가를 찾아간 적이 있었다. 상가 건물에 위치한 작업실에서 작가는 내게 보이차를 대접했다. 비교적 이른 아침이었다. 앞산이 보이는 창가에 앉아 작품과 보이차를 동시에 흡입하고 있었다. 뜨거운 차를 마시자 온몸이 훈훈해지는 듯했다. 신기하고 묘했다. 보이차를 처음 마셔본 것이다. 당시 믹스커피나 즐겨 마시던 나에게 보이차의 맛은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뭔가 다른 느낌이었다. 그 후 나는 틈나는 대로 좋은 보이차를 구하러 다니기 시작했다. 보이차 파는 곳을 소개받기도 하고 중국에 들어가는 지인에게 부탁도 해보고 보이차 전문가란 이들도 여럿 만나서 토막 정보나마 귀동냥을 해서 얻어들었다. 얼마 전에는 순천에 계신 분이 좋은 황차를 전해주셨다. 내 연구실 한쪽에는 그렇게 모인 차들이 제법 쌓여있다. 틈틈이 그 차를 우려 마신다. 아직 차 맛을 모르는 내게 좋은 차란 큰 의미가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가능한 한 차 맛을 제대로 음미할 수 있는 ‘혀’를 간절히 원한다. 각각의 차 맛의 차이를 감지하는 감각을 극대화하고 싶은 것이다.

[문화와 삶]내 것 같은 내 것 아닌 것

그리고 이것은 단지 차에 머물지만은 않는 것 같다. 그림을 보는 게 직업인 나로서는 전시장이나 일상에서 몸의 감각의 밸브를 최대한 열어놓고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찾는다. 내 감각의 촉수에 달라붙는 매혹적인 것, 아름다운 것, 놀라운 것, 재미있고 낯선 것들 말이다. 미술이나 음악이나 혹은 책, 오브제, 문구류, 차가 모두 그렇다.

중앙대에 있는 김모 교수는 차에 일가를 이룬 이다. 그는 한 달치 교수 월급에 해당하는 보이차 150~200g 정도를 구입하는 것을 결코 아까워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일 년에 한, 두 번 만나 짧은 대화를 나누는 게 고작이지만 나는 그 시간에 그로부터 많은 것을 배운다. 한 100여 종의 차 중에서 가장 좋은 차를 골라내는 미각, 감각에 대한 얘기를 나누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좋은 차를 고르는 미각을 소유한다는 것도 좋은 그림을 골라내는 안목과 하등의 차이가 없을 것이다. 시각, 미각 그리고 패션은 결국 한 사람이 자신의 감각, 취향과 세계관을 전면화하는 일이다. 이 감각의 일관성! 바로 그것이 진정한 예술교육이 아닐까?

한국의 예술교육은 단지 기계적인 실기교육에 의존해서 이루어지고 있다. 입시미술이 그 적나라한 예다. 학원은 미술을 교육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아이들의 미적 감각을 극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정답이라는 틀을 기계적으로 반복, 암기시켜 입시시험을 치르게 하는 곳이다. 석고데생과 정물데생, 그리고 무슨 무슨 구성으로 치러지는 시험이란 것이 죄다 그렇다. 회화나 디자인을 하기 위한 기초적인 훈련일 수는 있지만 수년간 비싼 비용을 치르면서 이루어지는 입시미술이란 한 개인의 독창성, 감각의 극대화, 미적 안목의 구현과는 무관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신의 삶의 구체성에서 왜 미술을 해야 하는지, 그림을 그리면서 어떤 삶을 살고자 하는지에 대한 물음은 차단시킨 채 단지 대학에 진학하는 수단으로만 그 일을 시키고 있다는 게 문제다. 그러다 보니 입시학원을 다니면서 보낸 수년의 시간 동안 학생들은 획일적인 기술과 도식적으로 그리는 방식에 매우 익숙해지고 길들여져 있다. 이런 학생들이 대학에 가서 좋은 작가, 개별적인 감각을 가진 아티스트, 독창성을 지닌 디자이너 등이 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대학에 와서는 추상적인 개념어에 의존해서 현대미술을 받아들이거나 미술계라는 제도에서 용인되고 있는 작품을 부단히 답습, 모방해내면서 마치 기성 작가인 것처럼 위장하고 있다. 이 허위의식이 한국미술계의 문제라면 문제다. 단 한 번도 자기 삶과 자기 감각에 의존해서 미술을 사유해 보는 훈련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저 내 것이 아닌 것을 내 것인 것처럼 하거나, 또는 자신이 하는 작업조차 그것이 도대체 무슨 작업인지 모르면서도 하고 있는 것이다. 작가란 결국 자신의 모든 것을 투명하게 작품으로 보여주는 존재인데 그것이 가능하지 않다면 작가나 작품이란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그래서 삶도 안 풀리고 작업도 당연히 안 풀리는 것이다. 자신의 삶의 구체성으로부터 길어 올린 자기 감각의 부재가 빚어낸 참극이다.

추천기사

바로가기 링크 설명

화제의 추천 정보

    오늘의 인기 정보

      추천 이슈

      이 시각 포토 정보

      내 뉴스플리에 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