님을 위한 행진곡, 민주적 ‘합창’을 위하여

2016.05.18 20:32 입력 2016.05.18 20:45 수정
최유준 ㅣ 전남대 HK교수

최근 몇 년간 5·18민주화운동 주간 때마다 음악용어 때문에 어리둥절해진다. ‘5·18민주화운동 기념식’에서 ‘님을 위한 행진곡’을 ‘합창’하는 것은 좋지만 ‘제창’하는 것은 허용할 수 없다는 보훈처의 반복되는 입장표명 때문이다. 여기서 ‘합창’과 ‘제창’의 차이는 뭘까? 보훈처 홈페이지 게시판의 자료에 따르면, 기념식에서 “참여자에게 의무적으로 부르게 하는 것”이 ‘제창(齊唱)’인 반면, “합창단이 합창하고, 부르고 싶은 사람은 따라 부르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부르지 않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합창(合唱)’이라고 한다. 보훈처가 조선시대의 음악 관장 기관인 장악원(掌樂院)처럼 느껴지는 대목이다.

[문화와 삶]님을 위한 행진곡, 민주적 ‘합창’을 위하여

‘5·18민주화운동기념일’과 같은 보훈처 지정 국가기념일은 총 45개다. 이들 기념일에 거행되는 기념식에서 ‘애국가’를 포함한 기념 노래(‘현충일의 노래’, ‘개천절 노래’, ‘4·19의 노래’ 등)는 대부분 보훈처 식으로 ‘제창’된다. 그런데, 기념식의 ‘제창’에서 “의무적으로” 노래를 해야 하는 이들이란 일반 참석자들이라기보다는 기념식의 VIP들, 더 정확히는 기념식 중계 카메라에 포착돼 대중에게 노출될 가능성이 있는 정·관계의 귀빈 참석자들이다. ‘제창’이냐 ‘합창’이냐가 예민한 문제가 되는 것은 이 때문이기도 하다. 예컨대, 취임 첫해였던 2013년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5·18 기념식’에 참석한 박근혜 대통령은 ‘님을 위한 행진곡’을 따라 부르지 않았고 그런 모습이 카메라에 담겨 언론에 소개되기도 했다. 보훈처의 의미규정상 “제창”이었다면 문제가 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님을 위한 행진곡’의 기념곡 제정과 ‘제창 허용’을 요구해 온 이들도 냉정히 따져볼 필요가 있다. 보훈처가 규정한 의미의 ‘제창’은 과연 ‘님을 위한 행진곡’이라는 노래의 역사적 의미에 부합할까? “참여자에게 의무적으로 부르게 하는 것”이라는 의미의 ‘제창’은 적절한 영어 번역어조차 찾기 어려운 비민주적이며 비음악적이기까지 한 용어다. ‘제창’이 정말 그런 뜻이라면 과감하게 버려야 한다. ‘합창’이면 족하다.

제창을 합창으로, 예컨대 ‘애국가 제창’을 ‘애국가 합창’으로 바꿔 쓴다고 문제될 것은 조금도 없다. 일제강점기 임시정부의 활동을 기록한 ‘독립신문’에서, 해방 이후 건국의 벅찬 희망 속에 서술된 ‘동아일보’ 등의 신문기사에서 “애국가 합창”이란 표현은 수없이 등장한다. 근대 시민 민주주의의 음악적 표상인 베토벤 9번 교향곡의 부제도 한글 용어로 옮기자면 ‘제창’이 아니라 ‘합창’이다. ‘합창’에는 색깔이 다른 목소리들을 함께 맞추어 간다는 민주적 의미가 담겨 있는 반면 “기미가요 제창”을 연상시키는 ‘제창’은 일제강점기와 군사독재기를 지나면서 획일적 군국주의와 국가주의에 오염됐다. 요컨대 모든 국가기념식의 기념 노래에 대해 ‘제창’을 없애고 ‘합창’으로 용어를 단일화한다면, ‘님을 위한 행진곡’ 논란도 자연스럽게 종식될 것이다. ‘국론분열’에 대한 음악학적 해법이다. 기념식의 기념 노래를, “부르고 싶은 사람은 따라 부르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부르지 않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은 민주사회에서 사실상 당연한 일 아닌가. 다만, ‘5·18 기념식’만이 아닌 모든 기념식 노래에 이 ‘합창’의 규정이 일반적으로 적용될 수 있다면 말이다.

음악이나 노래는 정치에 대한 단순한 장식물이 아니라 정치 그 자체다. 1980년대에 대학가에서, 집회와 시위 현장에서, 나아가 일상의 여러 순간에서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음악적 의미가 만들어졌으며, 그 진지한 음악적 의미화 과정은 대부분 5·18의 기억과 결부돼 있었다. 이 시기 ‘대통령 직접선거 개헌’과 절차적 민주주의를 성취한 대한민국 시민들의 정치적 역량을 총체적으로 상징하는 노래가 ‘님을 위한 행진곡’이다. 여느 기념곡들처럼 기념식의 귀빈들이 악보를 손에 쥐고 우물쭈물 ‘제창’하게 되는 노래가 아니다. 자유와 민주를 향한 시민들의 자발적 ‘합창’의 기억을 담고 있는 노래로서 ‘님을 위한 행진곡’은 오월 광주의 시민들이 도청 앞 광장에서 부르던 ‘애국가’와 닮았다. 두 노래의 가창 방식이 다르지 않아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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