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일 셰프의 맛있는 미학]을지로 노가리골목

전국엔 무슨 무슨 골목이라고 하여 명물집들이 있다. 서울에도 신당동과 신림동 순대골목, 장충동 족발골목, 저동 골뱅이골목 등이 유명하다. 한여름이 되면 각별해지는 골목이 있는데 을지로 노가리골목이다. 수표교 근처, 을지로3가역 4번 출구로 이어지는 골목에는 밤이면 ‘야장’의 멋이 넘친다. 야장이란 밤에 간이 테이블을 꺼내놓고 장사하는 임시 영업을 의미한다. 내 외국인 친구가 한번은 이 골목을 보고, ‘골목 유토피아’라고 표현한 적이 있다. 휘황한 전등 불빛에 플라스틱 테이블을 깔고 수백명의 손님들이 500㏄ 생맥주를 마시는 장면은 그렇게 부를 만했다.

어느 골목이든 터줏대감과 원조가 있다. 이 골목에서 가장 작고 낡은 집, 바로 을지오비베어다. 올해 아흔인 강효근 선생이 1980년 11월에 문을 열었으니 벌써 만 36년이 됐다. “그때 여기는 다 인쇄골목이었어. 제지업체들이 많고 납기 맞추느라 밤샘근무도 많았지. 게다가 을지로3가역이 지하철에서 일하는 양반들 교대하는 역이었어요. 아침 9시만 되면 우리 집에 교대조들이 물려와 한잔 마시고 노가리를 뜯었지.”

[박찬일 셰프의 맛있는 미학]을지로 노가리골목

통금이 없어지고 서울이 24시간 체제로 돌아가기 시작한 무렵이었다. 막걸리 대신 ‘호프’가 이 노동자들의 교대시간에 맞추어 한잔 걸치는 음료로 기능한 것도 특이하다. 막걸리와 김치 쪽의 오랜 역사가 호프와 노가리에 자리를 내준 역사적인 기록이다. 노동자들은 적당한 막걸리집을 찾지 못했고, 시원한 생맥주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을지오비베어는 본디 옛 오비맥주의 프랜차이즈로 탄생했다. 이 집이 을지로 두산빌딩 지하의 1호집 다음의 2호집이라고 한다. 강 선생은 3년 전에 87세로 은퇴했다. 놀라운 체력이다. 황해도에서 1·4후퇴 때 이남으로 내려와, 인천, 동두천, 다시 서울로 옮겨 삶을 꾸려왔다. 고향 잃은 디아스포라의 삶이 을지로 정착으로 이어졌다.

“노가리가 그때 100원이었소. 연탄불에 구운 노가리를 뜯으며 그 시절 사람들은 하루를 마감한 게지.” 당시 오비맥주는 10평 이상 되는 넓은 공간의 가게에는 ‘호프’라는 이름을 붙였다. 독일어로 ‘마당’이라는 뜻이다. 광장에서 맥주를 즐기는 독일의 관습을 한국으로 옮겨온 것이다. 이후 생맥주는 엉뚱하게도 ‘호프’라는 이름을 얻었다. 일종의 와전이다. 그렇지만 언중이 쓰는 말이니 사전에도 올라 있다. 생맥주는 본디 고급 술이었다. 냉장 설비에 돈이 많이 들어가고 수송도 쉽지 않다. 교통망 확충과 배송시스템의 정착, 병맥주보다 싼 가격은 1970~80년대 한국을 생맥주의 시대로 만들었다. 한 잔의 시원한 생맥주 맛을 우리는 기억하며, 고단한 노동의 뒷길을 걸어왔다.

이 집은 이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냉장보관 디스펜서’를 유지하고 있다. 생맥주 통이 들어오면 냉장시켜서 천천히 온도를 맞춘 후 판매한다. 요즘 유행하는 강제냉각식과는 다르다. 그래서 그런지 맛이 부드럽고 향이 살아 있다. 여름에는 2도, 겨울에는 4도의 적정 온도를 지킨다.

“시원하게 한잔씩들 해. 쭉 들이켜는 게 제맛이야. 노가리도 좀 뜯고.” 아흔 노구를 이끌고 인터뷰에 나온 강 선생은 정정했다. 500㏄도 마시고, 담배도 두어 대 피웠다. 을지로 노가리골목의 한 시절이 천천히 흘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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