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이의 맛

2016.06.23 20:40 입력 2016.06.23 20:51 수정

[박찬일 셰프의 맛있는 미학]오이의 맛

껍질 대충 벗긴 오이만을 고추장 찍어 밥 반찬으로 하던 때가 있었다. 마른 멸치랑 날오이, 식은 보리밥은 여름 오찬의 한 전형이 아닐까. 여름에 오이만 한 반찬이 없다고들 했다. 오이선이라고 해서 익힘 요리도 있는 모양인데, 여염의 요리는 대개 날것이었다.

[박찬일 셰프의 맛있는 미학]오이의 맛

오이는 정말 쌌다. 그저 시장에서 ‘한 무더기’로 팔았다. 가물면 쓰고 장마지면 싱겁다고 했지만, 늘 나는 오이가 좋았다. 호박은 질색하고 가지는 정색했지만 오이는 아삭아삭 간식으로도 먹었다. 포장마차에 가면 기본 안주였고, 등산 갈 때 물 대신 챙겨 갔다. 산 정상에서 오이 한 입 베어무는 맛이란! 청계산 정상 부근에는 오이 파는 행상이 있었는데 요즘도 나오시는지 모르겠다. 그 산 초입에는 농사지은 오이를 놓고 파는 농부도 있었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꼬부라지고 덜 떨어진 오이가 좌판에 놓였는데, 그게 더 고소하고 맛있었다.

뭐니뭐니해도 오이의 맛은 오이지다. 딱 소금만으로 맛을 내는, 그래서 오이의 진맛을 제대로 보여주는 찬이 아닌가.

오이지 담그는 게 그렇다고 쉽지만은 않은 모양이다. 아내에게 물으니, 소금간이 안 맞고 저장 조건이 나쁘면 골마지가 끼고 시원찮아진다고 한다. 좋은 소금도 있어야 하고, 무엇보다 오이의 질이 우선이란다. 좋은 오이 사는 것도 운수소관이라, 겉으로 봐서는 모른다. 일일이 잘라 먹어서 싱거운지 쓴지 알아볼 수도 없는 노릇이니.

소금간 잘 배고 뜨지 않게 호박돌로 꾹 눌러놓아 제대로 쪼글쪼글해진 오이지를 슥슥 썰고, 딱 쪽파나 곁들여 찬물에 담아내면 여름 반찬의 왕이다. 입맛 없을 때 이런 반찬이 있다는 건, 염장의 기술이니 조상의 지혜니 거론하지 않아도 그저 고맙다. 오이지는 다 건져 먹고, 짭짤한 물을 후루룩 마셔보라. 짜다고 만류하는 식구가 있어도, 이건 참을 수 없다. 밥을 다 비우고 숭늉 대신 이 국물을 마시면 속이 다 시원해진다.

오이 따는 구경을 하러 경북 상주의 농가에 갔다. 이미 오이 노지 재배는 드물다. 시설이 제법 근사하고, 돈도 좀 들었다 싶게 단단하다. 겨울부터 따서 칠월에 마친다. 성장을 조절하고, 출하 시기를 보아가며 따서 돈을 만드는 게 요즘 시속이다.

이랑 사이에 구부러진 오이가 버려진 것이 아팠다. 모양이 곧지 않으면 아무도 안 사간다고 한다. 이런 걸 거두어 오이지를 담그는 방법은 없을까. 이렇게 버려지고 솎아지는 오이가 얼마나 많겠나 싶어 속이 쓰렸다.

농산물은 지역에서 소비되는 과거와 달리 전국적인 유통망으로 움직인다. 그러니, 이런 ‘쭉정이’들을 건사하고 소비할 방법이 별로 없다. 생산지에는 이미 인구가 줄어 문자 그대로 먹어낼 입이 없으니, 버려질 수밖에. 가공으로 돌려서 생명을 연장하는 경우도 있지만 맛은 좋아도 모양이 나쁘다고 땅에 묻히는 작물이 한둘이 아니다. 동그랗게 예쁘지 않으면 시장에 나가지 못하고 천덕꾸러기가 된다. 농산물마저 규격화, 통일화된 시대를 산다.

추천기사

바로가기 링크 설명

화제의 추천 정보

    오늘의 인기 정보

      추천 이슈

      이 시각 포토 정보

      내 뉴스플리에 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