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콧 보고서’의 메시지

2016.07.15 21:49 입력 2016.07.15 21:50 수정
이인숙 국제부

[기자칼럼]‘칠콧 보고서’의 메시지

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 결정과 후폭풍, 이라크·방글라데시·터키에서 일어난 ‘라마단 테러’, 상설중재재판소(PCA)의 남중국해 영유권 판결, 영국의 사상 2번째 여성 총리 탄생 그리고 15일 충격적인 프랑스 니스 트럭 테러 소식까지. 숨가쁘게 쏟아지는 세계 소식을 쫓다보니 7월의 절반이 지나갔다. 그에 묻혀 비교적 ‘조용히’ 흘러가 버린 소식을 이곳에 끄집어내 본다.

‘칠콧 보고서’라 불리는 영국의 이라크전쟁 보고서가 지난 6일 발표됐다. 2003년 영국이 이라크전에 참전한 이후 공영방송 BBC가 토니 블레어 정부가 참전 결정의 주요 이유였던 대량살상무기(WMD) 관련 정보 문건을 왜곡했다고 보도하는 등 이라크전의 문제를 지속적으로 제기한 것이 발단이었다. 논란이 가라앉지 않자 블레어의 후임인 고든 브라운 총리의 결정으로 2009년 6월 원로 행정가 존 칠콧이 이끄는 진상조사위원회가 꾸려졌다. 위원회는 정부문서 15만건을 분석하고 최종 결정권자인 블레어 등 120명의 증언을 들었다. 조사비용만 1000만파운드(약 150억원)가 들었다. 총 12권짜리 보고서에는 소설 ‘해리포터’ 시리즈보다 2.6배 많은 260만 단어가 쓰였다. 이라크전 참전 이후 조사위가 만들어지는 데 6년, 조사에 다시 7년이 걸려 보고서가 2016년 7월에 나오게 된 것이다.

보고서의 결론은 놀랍지도 새롭지도 않다. 영국의 참전은 합당하지도 않고 잘못된 정보로 내려진 결정이라는 것이다. 전쟁을 일으킨 미국에서도 애초에 WMD는 있지도 않았고 잘못된 전쟁이었다는 결론이 내려진 마당에 참전이 옳았다고 했다면 더 이상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칠콧 보고서’가 눈에 들어온 2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 번째는 비록 13년의 지난한 과정을 거쳤지만 정부의 이름으로 정부와 지도자의 정치적 결정을 다시 따져보고 엄정한 책임을 물었다는 점이다. 한 국가의 지도자가 ‘통치행위’라는 이름으로 내리는 수많은 결정에는 어마어마한 무게가 실린다. 블레어가 ‘부시의 푸들’이라는 주홍글씨를 얻어가며 내린 결정은 자국의 군인 179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이라크 민간인의 피해는 말할 것도 없다.

두 번째는 이 모든 책임의 정점에 있는 블레어의 태도였다. 블레어는 보고서가 나온 직후 기자회견을 열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그건 영국 총리로 있던 10년 동안 가장 어렵고 중요하고 고통스러운 결정이었다. 오늘 나는 그 결정에 대해 어떤 예외나 변명도 없이 모든 책임을 인정한다.” 그러면서도 “당시 사담 후세인 이라크 대통령을 그냥 두게 되면 영국과 세계가 치러야 할 대가가 더 크다”는 믿음 때문에 참전을 결정했다고 해명했다. 그러면서 거짓말이나 속임수는 없었다고 했다.

블레어가 모든 잘못을 인정한 건 아니지만 정치인으로서 자신의 책임을 피해가지는 않았다. 이제 유족들은 블레어를 헤이그 국제형사재판소(ICC)로 보내 전범의 죄를 묻자고 한다. 실현 가능성은 높지 않지만 지도자의 잘못된 판단으로 가족을 잃은 사람들의 입장에서 충분히 주장할 수 있는 얘기다. 한국에도 엄정한 평가가 필요한 지도자의 정치적 결정이 너무도 많아 보이지만 제대로 책임을 묻는 절차가 진행된 적이 있었던가. 그나마 정권이 교체되면 전 정권의 정치적 결정을 겨냥한 것으로 보이는 수사가 시작되고 형사적 책임을 묻느냐, 마느냐는 식으로 전개되는 게 공식이었다.

문제는 범죄와 정치적 잘못이 늘 일치하는 건 아니라는 점이다. 법망만 피해가면 정치적 책임은 소멸되는 걸까. 반대로 뭐라도 죄를 찾아 법정에 세우면 정치적 책임이 규명되는 걸까. 그렇게 검찰과 법원에 정치적 판단을 빌리다 보니 정치는 점점 빈곤해졌다.

서울중앙지검 1층 현관이나 서울중앙지법 형사법정이 아니라 국민 앞에 솔직하게 나와 자신의 정치적 행위를 소명하는 정치인을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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