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는 시간이 걸린다”

2016.08.05 21:07 입력 2016.08.06 14:17 수정

[기자칼럼]“민주주의는 시간이 걸린다”

스웨덴의 두번째 도시 예테보리. 이 도시의 중간을 가르는 예타강 하류에는 엘브스보리 다리가 있다. 예테보리의 북쪽과 남쪽을 잇는 이 다리는 녹색이다. 다리 색깔을 정한 것은 시민들이었다. 시 당국은 “엘브스보리 다리 도색을 하는데 어떤 색깔을 칠하면 좋겠느냐”는 공고를 지역신문에 냈다. 시민들의 다양한 의견이 쏟아졌다. 청색, 하얀색, 노란색, 아이보리색…. 많은 토의를 거친 끝에 최종 수렴된 색깔이 녹색이었다. 공고부터 도색까지 6개월이 걸렸다.

이 강 상류 강변에는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원통형 가스저장소가 있다. 시는 시민들에게 “이 저장소를 철거할 것인가, 다른 용도로 쓸 것인가”를 물었다. 시민들이 제안한 아이디어는 유스호스텔. 예테보리의 부족한 숙박난을 더는 데 도움이 된다는 의견이었다. 치열한 논쟁이 시작됐다. 최종 결론은 ‘철거’였다. 경제성이 없을뿐더러 가스저장소는 굳이 보존해야 할 건축물이 아니라는 의견이 많았다. 이 결론을 내리는 데 4년이 걸렸다.

2주간 스웨덴을 다녀왔다. 스웨덴은 한국정부가 모델로 삼는 국가다. 구조조정을 해서 성장을 이룬 나라라는 것이다. 이 결과 1990년대 초반 일본과 함께 동시에 불황을 맞았지만 스웨덴은 탈출했고, 일본은 탈출하지 못했다고 했다. 하지만 한국정부가 애써 외면한 스웨덴의 힘은 다른 데 있었다.

짧은 출장에서 체험한 스웨덴의 힘은 ‘소통’이었다. 정부와 지자체는 정책추진 때 반드시 시민의 의견을 사전에 수렴한다. 여차하면 원점으로 돌릴 수 있는 수준의 의견청취다. 사실상 정책을 결정한 뒤 들러리 세우는 한국식 공청회와는 많이 다르다.

결정까지 걸리는 시간은 중요하지 않다. 의견이 수렴되지 않으면 토론하고 또 토론한다. 다리 색깔 하나 결정하는 데도 6개월이 걸리는 나라다. 그러니 시민들이 적극 참여해 의견을 개진한다. 결정이 났을 때는 승복하고 힘을 보탠다. 정부가 부러워하는 ‘스웨덴식 구조조정’도 시민들의 의견을 충분히 물은 결과다.

이런 전통은 의회로 이어진다. 여당이 발의한 법이라도 야당의 대안이 좋다면 야당 발의로 제출한다. 미리 일정을 박고 밀어붙이는 날치기는 상상하기 어렵다.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 4일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를 성주군 내 다른 지역으로도 이전이 가능하다”고 했다. 단 한 번 성주군민과의 대화 없이 사드 배치를 결정한 지 22일 만이다. 이에 앞서 3일에는 이화여대 최경희 총장이 평생교육 단과대학(미래라이프 대학) 신설을 철회한다고 밝혔다. “사전에 왜 한마디 상의도 하지 않았느냐”며 항의하는 학생들을 경찰력을 동원해 끌어내려 한 지 나흘 만이다.

정부는 성주군민과, 이대는 학생들과 왜 사전에 소통을 하지 않았을까. “학교의 주인은 학생이 아니다”라는 이대 모 교수의 말에서 그 답을 엿볼 수 있다. 국가는 국민을, 학교는 학생을, 기업은 노동자를 ‘주인’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주인이 아니니 의사결정 과정에 낄 자격이 없는 셈이다. “정부입법은 행정부와 여당의 고유권한”이라며 야당 의견을 무시하는 것과도 일맥상통한다.

하향식 의사결정은 명쾌해 보일지 몰라도 부작용을 남긴다. 갈등비용을 뒤로 미뤘을 뿐 결코 줄인 게 아니기 때문이다. 상대가 목숨 걸고 반대하면 정책은 추진되기 어렵다. 추진이 되어도 탄력을 받기 힘들다. 승복하지 않기 때문이다. 밀양이 그렇고 강정이 그렇다. 기업구조조정도 마찬가지다. 그 사이에 피어나는 것은 불신과 반목이다.

“민주주의는 원래 시간이 많이 걸린다. 느리지만 강하다. 기다릴 수 없다면 민주주의를 할 자격이 없다. 괴로워도 소통, 소통, 소통밖에 없다.” 예테보리 관계자의 이 말이 오랫동안 머릿속에 남았다.

추천기사

바로가기 링크 설명

화제의 추천 정보

    오늘의 인기 정보

      추천 이슈

      내 뉴스플리에 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