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나지 않은 ‘거위의 꿈’

2016.08.25 20:39 입력 2016.08.25 20:43 수정

열정, 노력, 집요함. 말단 당직자에서 시작해 여당 대표를 꿰찬 새누리당 이정현 대표의 ‘인생 역정’은 이 세 단어에 함축돼 있다. ‘그분’을 향한 과정에서 형성되고 사람들에게 각인됐다.

[로그인]끝나지 않은 ‘거위의 꿈’

이 대표는 ‘정치인 박근혜’의 말들을 모았다. 읽고 또 읽었다. 2008년에는 “혼자 보기 너무 아깝다”며 <박근혜 어록>으로 출간했다. 박 대통령의 말은 ‘정치인 이정현’의 언어, 사고로 체화되고, 어떻게 얘기해도 그분의 생각의 범위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실제 박 대통령은 과거 이 대표를 두고 “한번도 제가 하지 않은 말을 옮긴 적이 없다”고 인증했다. ‘복심(腹心)’은 그냥 되는 게 아니었다.

박 대통령은 취임 석 달도 안돼 터진 ‘윤창중 사건’으로 이남기 홍보수석이 물러나자, 후임으로 ‘정무수석 이정현’을 수평이동시켰다. 박근혜 정부 인사 원칙인 ‘국정철학을 공유하는 자’는 여럿 있었겠지만 박 대통령의 심기를 읽어 언론을 통해 메시지를 전달하는 능력으로 치자면 이 대표만 한 인물이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 대표의 ‘단독 드리블’도 본격화됐다. 9명의 수석비서관 중 ‘왕수석’으로 불렸다. 청와대 참모들은 물론, 대변인조차 함부로 청와대 내부 얘기를 언론에 얘기하지 못했다. 오롯이 ‘청와대 핵심 관계자’로 표현된 홍보수석의 몫이었다. “내 이름을 써도 좋다.” 작심하고 말할 때였다. 야당이 박근혜 정부의 정통성을 문제 삼거나 부친 박정희 전 대통령을 건드리면 여지없이 그의 실명이 등장했다. 그의 목소리는 한 옥타브 올라가고 발언대를 손으로 내리치기도 했다. “저항세력 앞에서 뜻을 굽히지 않는 것이 불통이라면 5년 내내 불통 얘기를 듣겠다. 자랑스러운 불통” 등 어록도 생성했다.

청와대 시절 그는 사석에서 “앞으로 선출직에 출마할 생각이 없다”고 했다. 그랬던 그가 돌연 2014년 7·30 재·보궐선거 전남 순천·곡성에 출마했다. 청와대를 나와 호남에 출마한 과정이 의도했던 대로 흘러간 것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덜컥 당선이 됐다. 1988년 소선거구제 도입 이후 호남에서 보수정당 후보의 최초 승리였다. 20대 4·13 총선에선 순천에서 3선에 성공했다. 그 기세를 몰아 지난 9일 전당대회에서 호남 출신 최초의 보수정당 선출직 대표가 됐다. 정당사의 한 페이지에 담길 일이었다.

우려도 컸다. ‘이정현 대표’였기 때문이다. 그는 취임 첫날부터 대통령 중심의 당 운영 구상을 피력하며 “대통령·정부와 맞서는 것이 정의라고 인식한다면 여당 소속 의원으로서 자격이 없다”고 일갈했다. 이튿날 청와대에서 이 대표를 그윽한 눈빛으로 바라보던 박 대통령의 표정은 상징적이다.

출범 보름 정도 지났다. 이정현 체제는 삐걱거리고 있다. 당 안팎에서 걱정했던 대로 박 대통령, 청와대와의 관계 설정 문제 때문이다. 박 대통령이 외통수로 밀어붙이는 청와대 우병우 민정수석 거취가 표면화된 이유다. 이 대표가 침묵으로 일관하는 것은 박 대통령의 뜻을 너무 잘 알기 때문일 것이다. 이 대표는 “제가 하는 것이 반영되는 것도 있고, 안되는 것도 있다”(지난 19일), “벼가 익고 과일이 익는 것은 보이지 않는 바람도 작용한다”(24일)고 했다. ‘아무것도 안 한 것은 아니다’ 수준이다. 난마와 같이 얽힌 국정이 우 수석 문제를 끊어내지 않으면 풀리지 않는 형국인데, 여당 대표의 자세는 아니다. 이 대표 역할의 한계도 점차 분명해지고 있다. 이런 상황이 지속된다면, ‘이 대표는 누구를 섬기는 머슴이 되려는가’라는 근본적 질문에 맞닥뜨릴 것이다.

‘영남당’에서 호남 출신 흙수저·무(無)수저가 대표가 된 것만으론 ‘거위의 꿈’이란 노래는 끝나지 않는다. “언젠가 나 그 벽을 넘고서 저 하늘을 높이 날을 수 있어요.” ‘그 벽’을 넘어야 한다. 쉽지 않을 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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