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치라는 농담

2016.09.09 20:30 입력 2016.09.09 20:35 수정

[기자칼럼]협치라는 농담

4·13 총선에서 여소야대가 만들어진 뒤 정치권에 가장 많이 오르내린 말은 ‘협치’일 것이다. 여야는 각자 다른 이유에서 협치를 합창했다. 숫자의 힘으로 야당을 윽박지를 수 없게 된 새누리당은 협치를 얘기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다수파가 된 야당이 힘으로 밀어붙이지 못하도록 견제하는 명분으로도 협치는 제격이었다. 원내 1당이 된 더불어민주당은 오만해졌다는 평판을 들을세라 협치 모자를 썼다. 4·13 총선은 부분적으로는 더민주를 심판한 것이기도 했기에 자성하는 모습을 보일 필요가 있었다. 내년 대선을 앞두고 수권정당의 안정감 있는 모습을 보이려는 의도도 작용했음직하다.

새누리당과 더민주를 양극단 세력으로 몰아붙인 국민의당에 협치는 생존 문제였다. 진영 논리에서 벗어난 대화와 타협의 공간이 마련돼야 국민의당은 캐스팅보터 역할을 극대화할 수 있다. 반면 여야 대치 구도가 뚜렷해지면 ‘어느 편이냐’는 선택을 강요받게 되고 종국에는 어느 한쪽에 흡수될 수밖에 없다.

협치는 시대의 흐름이 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미 그때 여야 정치인들 내심에는 ‘협치는 쉽지 않을 것이다’는 예감이 똬리를 틀었을 것이다. 새누리당의 강경 노선을 이끌며 정쟁 복판에 선 박근혜 대통령이 협치의 키를 쥐고 있어서다. “모든 문제의 시작이고 해결의 시작”인 박 대통령의 태도 변화가 없는 한 협치는 공허한 말잔치로 끝나거나 정쟁 책임을 상대에게 전가하는 알리바이용 선동 구호가 될 수밖에 없다.

예감이 현실화하는 데는 한 달밖에 걸리지 않았다. 지난 5월13일 청와대에서 열린 박 대통령과 여야 3당 원내대표 회동을 거치면서 협치 구호는 넝마가 됐다. 회동에서 야당 원내대표들은 ‘님을 위한 행진곡’의 5·18 민주화운동 기념곡 지정을 요청했지만 돌아온 것은 ‘검토 약속→검토 결과 기념곡 지정 불가’라는 일종의 기만극이었다. 국정운영 방식을 바꾸지 않겠다는 박 대통령의 뜻이 분명하게 드러난 것이다. 박 대통령의 ‘불통’은 사드 한반도 배치 결정, ‘우병우 파동’을 거치면서 더욱 가팔라졌다.

박 대통령은 요지부동이더라도 새누리당이 청와대에 종속되지 않으면 협치 공간이 생긴다. 그러나 이 역시 기대난망이다. 몇 개의 인상적인 장면이 있다. 8·9 전당대회에서 친박계가 지도부를 싹쓸이했다. ‘도로친박당’이 된 것이다. 호남 출신인 이정현 대표는 취임 이틀 뒤인 지난달 11일 청와대 오찬에서 박 대통령에게 ‘탕평인사’를 공개적으로 건의했다. 그러나 이후 3개 부처 개각 때 이 대표의 건의는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

새누리당 의원들은 지난 6~7일 야당의 교섭단체대표연설 때 원내대표단 지침에 따라 야유와 고성을 자제했다. 박 대통령을 호되게 비판한 국민의당 박지원 비대위원장의 연설을 놓고도 “품격 있는 연설”이란 공식 논평을 냈다. 물론 그 자체로는 좋은 일이다. 그러나 이 정도의 제스처가 새누리당이 감당할 수 있는 협치의 최대치인 것도 사실이다. 박 대통령의 역린을 건드리는 사안은 ‘언터처블’이다. 두 달 가까이 나라를 흔든 ‘우병우 사태’에 대해 새누리당 지도부는 소극적이나마 청와대와 보조를 맞추고 있는 것이다.

협치가 불가능한 조건에서 협치를 말하는 것은 기만이다. 그런데도 야당은 여전히 협치 무드에 젖어 있는 것 같다. 큰 사고만 없으면 집권은 떼논 당상이라는 착각에 빠져 부자 몸 사리듯 한다. 야권공조 8대 합의사항이니 뭐니 말은 요란했지만 지금껏 똑 부러지게 관철한 게 하나라도 있나. 싸움만이 능사가 아니듯 싸우지 않는 것도 능사는 아니다. 싸울 때는 강단있게 싸워서 양보할 수 없는 가치가 무엇인지, 집권하면 사회가 어떻게 바뀔 것인지 보여주는 것도 지금 야당이 할 일이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나 만나면서 여당 코스프레를 할 때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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