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란법을 대하는 자세

2016.09.23 21:20 입력 2016.09.23 21:22 수정

[기자칼럼]김영란법을 대하는 자세

‘오전 9시 차를 몰고 출입처 건물에 들어선다. 외부인 차량은 진입이 통제되거나 주차료를 내야 한다. 하지만 홍보실에서 준 주차증이 있어 통과다. 기자실로 올라와 언론사명이 붙여진 책상에 앉아 노트북을 편다. 조간신문을 훑으며 홍보실에서 제공한 커피와 토스트로 아침식사를 한다. 오전 일을 마친 뒤 점심 장소로 예약된 일식당으로 향한다. 출입처 간부와의 자리. 비공개로 진행된 간부회의에서 무슨 얘기가 나왔는지, 어제 발표한 정책에는 어떤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오간다. 밥값은 신경 쓰지 않는다. 저녁은 모 기업 홍보맨들과 하기로 했다. 마감 후 ○○한정식집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한국에서 취재기자로 밥 벌어먹고 사는 사람들의 일상이다. 물론 모든 기자가, 매일 이런 것은 아니다. 그러나 평균적으로는 이 패턴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나도, 선배 기자도, 선배 기자의 선배 기자도 그랬다. 얼마 전까지도 자각하지 못했다. 이것이 특권이란 것을. 기자 명함을 들고 다닌 지난 16년간 이는 당연하게 누린 권리였다. 과한 접대나 향응을 거절한 적은 있지만 이것이 일상에서 누려온 특권을 정당화해주진 못한다. 가끔 내 지갑을 연 적도 있지만 그렇다고 얻어먹은 게 없어지는 건 아니다. 회사가 재정적으로 뒷받침을 못해준다, 내밀한 취재를 위해선 어쩔 수 없다, 얻어먹어도 기사만 똑바로 쓰면 된다고 말하는 것도 자기 합리화일 뿐이다. 외국에선 한국 언론의 이런 취재 관행을 이해하지 못한다.

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 일명 ‘김영란법’이 28일부터 시행된다. 당장 출입처에서 기자실 고정좌석이 없어지고 다른 외부인들과 똑같이 주차요금을 내야 할지도 모른다. 당장은 불편하고 당혹스러울 일이다. 그런데 대다수 국민들은 시행 여부조차 느끼지 못할 김영란법이 부담으로 느껴진다는 것 자체가 언론인이 법 적용 대상에 포함돼야 하는 이유다. 당연할 이유가 없는 것들을 관행이라 치부하고 저항 없이 습성화시킨 건 언론인이다. 김영란법이 식사한도로 정한 3만원까지는 얻어먹어도 되네 안되네를 놓고 갑론을박하는 우리들의 모습에 자괴감이 든다.

한 금융권 종사자의 얘기다. “미국 중앙은행인 FRB 직원들과 밥 먹을 일이 있었다. 메뉴를 고르는데 FRB 사람들은 1인당 샐러드 하나씩 주문해 먹더라. 나 혼자 스테이크 먹기가 뭣해 똑같이 샐러드 한 접시 먹고 나왔다. 계산은 당연히 더치페이다. FRB 직원들은 외부에서 선물이나 기념품을 받아도 모두 회사에 자진 신고, 제출한다고 한다. 미국에선 어느 조직이든 그게 관행이더라. 한국이 법인카드나 선물에 너무 익숙해져 있는 것 같다.”

지난해 기업들이 법인카드로 결제한 접대비는 10조원에 달한다. 그 혜택은 누가 누렸나. 규제를 쥐락펴락할 권한을 쥔 공무원, 전문가라는 명함을 팔아 입맛에 맞는 보고서를 써줄 수 있는 교수, 여론몰이를 할 수단이 있는 언론인에게 흘러들어갔다. 기업 돈으로 전세기를 타고 수억원대의 호화 유럽 여행을 다녀온 언론인도 나오지 않았나. 직무와 관련이 없다면 기업은 이들에게 단돈 천원어치의 편의도 제공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언론은 국민들의 일상생활에 밀접하게 연결된 분야이고, 국민들은 이 분야의 부패 정도가 심각하고 그로 인해 직접적으로 피해를 받고 있다고 인식하고 있다. 언론인에게는 공직자에 맞먹는 청렴성 및 업무의 불가매수성이 요청된다.” 지난 7월 헌법재판소가 김영란법에 대해 합헌 결정을 내리면서 언론에 가한 일침이다. 언론은 세상의 빛과 소금이라고 한다. 감춰진 곳을 조명해야 할 빛이 흐릿해지고 부패를 막아야 할 소금이 썩어버리면 답이 없다. 김영란법의 시행은 주요국 중 최하위권에 머무는 한국 언론에 대한 신뢰도를 높일 기회일지도 모른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첫 번째 방법은 문제가 있다는 걸 인식하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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