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선택, 촛불을 잊지 말자

2017.05.01 11:37 입력 2017.05.01 22:28 수정
정지은 | 문화평론가

2005년 봄, 나는 스페인에 있었다. 여자 셋이 가진 돈을 탈탈 털어 무작정 여행을 온 참이었다. “이때쯤 가면 큰 인형들을 잔뜩 태우는 축제가 있는데 그렇게 멋있대!” 그렇게 떠난 여행의 마지막은 바로 발렌시아. 방금 도착한 여행자도 ‘뭔가 있구나’를 단박에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축제가 시작된 도시의 분위기는 남달랐다. 라스 파야스(Las Fallas), 일명 ‘불의 축제’를 위해 온 도시 사람들이 1년을 준비한다는 말은 과장이 아니었다. 사람으로 가득한 대로, 흩날리는 꽃들, 눈부신 햇살은 기본, 디즈니 만화부터 성경의 한 장면까지 개성 넘치는 거대한 목각 인형들이 위풍당당했다. 사람들이 터트리는 폭죽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지는 거리에서 덩달아 흥분한 우리는 인형을 찾아 낯선 도시의 골목골목을 쏘다녔다. 그리고 축제 마지막 날, 거리의 인형들에 하나씩 불이 붙기 시작했다. 전통에 따라 단 하나의 인형만을 남겨두고 나머지 인형들은 모두 불사르기 때문이다. 지나간 나쁜 일들을 태워버리고 새롭게 시작한다는 의미란다. 공들여 만든 인형들이 사라진다는 아쉬움은 많은 사람들과 함께하는 거대한 불구경 앞에서 순식간에 잊혔다.

[청춘직설]2017년 선택, 촛불을 잊지 말자

일상이 전혀 다른 질감의 공기로 채워지는 느낌, 그야말로 축제라는 특별한 자장 속에서만 느낄 수 있는 매력이다. 자동차만 지나다니던 대로를 막고, 사람들이 어슬렁어슬렁 돌아다니고, 노래를 부르고, 처음 보는 사람과도 인사를 나누고…. 분명히 익숙한 공간인데도 어쩐지 다른 일들이 일어나는 순간, 그때야말로 축제다. 무대가 아니라 일상의 공간에서 축제가 열릴 때, 관람객과 참여자의 경계가 없을 때 축제의 비일상성은 더욱 빛을 발한다. 멀리 갈 것도 없다. 촛불이 타오르던 지난겨울의 많은 토요일들이 바로 그랬으니까. 도심 한복판의 왕복 16차로 도로를 평화롭게 돌아다니던 사람들 사이에서 느낄 수 있던 공기는 그때 그 축제를 떠올리게 했다. 물론 발렌시아 ‘불의 축제’ 공기와는 다른 종류의 질감이다. 스페인의 공기가 햇살과 ‘뜨거움’과 ‘열광’ 자체라면, 서울의 공기는 밤의 서늘함과 ‘분노’에 ‘이런 게 가능하구나’란 놀라움이 뒤섞인 그 무엇이었다. 청소년부터 초로의 노인까지 뒤섞인 군중 속에서 누군가 “박근혜”를 외치면 “퇴진하라”를 자연스럽게 이어받고, “토요일은 쉬고 싶다”처럼 재미있는 구호를 외치면 키득거리며 지나가던 사람들의 자유로움과 느슨한 연대! 유난했던 지난겨울의 추위에 코가 빨개지고 감각이 둔화된 와중에도 그 독특한 질감의 공기가 여전히 생생한 것은 일상의 공간이 일정한 시간차를 두고 비일상의 공간으로 바뀌는 드문 경험이었기 때문일 테다.

그렇게 만들어낸 ‘장미 대선’이 딱 일주일 남았다. 광장을 밝히던 촛불들의 선택이 다가오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10%도 되지 않던 홍준표 후보의 지지율이 올라가면서 2위인 안철수 후보와의 차이를 좁혀가고 있기 때문이다. ‘국정농단’의 방조자였던 ‘자유한국당’의 후보인 그가 반성은커녕 대통령에 당선되면 “박근혜를 사면하겠다”고 외친다. 지난 토요일, 대선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열린 촛불집회 참가자들이 “대통령 선거에서 광장의 목소리가 사라지고 있다”고 경고하고 나선 이유도 바로 이 같은 상황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 19대 대선은 촛불로 촉발된 대통령 탄핵과 그로 인해 치러지는 초유의 ‘보궐선거’다. 투표 종료 시간이 오후 6시가 아니라 8시인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런데 선거가 막판으로 치닫기 시작하면서 이 선거가 어떻게 시작된 것인지 그새 잊어버린 사람들이 많아진 것 같다.

스페인 불의 축제는 1년 후에 다시 열리지만, 한국에서 선택의 시간은 5년 이후에나 다시 돌아온다. 불의 축제에서 최후에 선택된 단 1개의 인형만을 박물관에 영구히 보관하는 것처럼, 우리가 이번에 선택한 후보는 19대 대한민국 대통령으로 역사에 영원히 남을 테다. 게다가 우리에게는 축제 불구경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촛불혁명’이라는 밀도 높은 공동의 기억이 있지 않은가.

인형을 태운 불은 축제와 함께 꺼졌지만, 서울의 밤거리를 밝혔던 축제 같았던 촛불은 꺼지지 않았다. 무엇을 위해 광장에서 촛불을 들었는지 선거라는 민주주의의 축제를 앞두고 다시 생각해볼 때다. 딱 일주일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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